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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36)화 (21/197)

“나리, 부르셨어유?”

남산댁을 도와 저녁을 짓던 순이가 코 옆에 그을음을 묻힌 채로 사랑방을 찾았다. 옷을 갈아입고 서안을 정리하던 도겸은 하던 것도 밀어 두고 아이부터 불러다 앉혔다.

“그래. 이리 와 앉거라.”

“예, 나리.”

울지 않은 척하지만 그사이에 눈까지 퉁퉁 부은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윗목으로 종종 걸어와 앉았다.

손이 시려웠는지 다소곳이 앉은 순이는 따뜻한 방바닥에 손을 대며 몸을 녹이더니 금세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을 뻔한 도겸이 여전히 부어 있는 뺨을 보고 낯빛을 굳혔다.

“오늘 욕보았겠구나. 다친 곳은 좀 어떠냐?”

“아, 이거….”

순이가 미처 잊고 있었다는 듯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아무렇지도 않어유! 이빨 다 붙어 있고 피도 금방 멈춰서 사는 데 아무 지장 없구먼유.”

“이걸 바르면 좀 나을 것이다.”

도겸이 미리 꺼내어 둔 연고를 건넸다. 순이는 보자마자 손사래 쳤다.

“아유! 아니어유. 그거 발랐다가 너무 고와져서 내일 당장 시집가 버리면 우짠데유?”

나이답지 않은 너스레에 도겸은 이번엔 못 참고 그만 대놓고 웃음 짓고 말았다.

“그럼 필요한 혼수는 전부 해 줄 터이니 내가 허락할 만한 신랑만 데려오거라.”

순이가 좋아할 말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아이는 부쩍 시무룩해 했다.

“…너무하셔유. 나리 같은 사내를 두고 지가 우째 다른 신랑을 찾어유?”

이 집이 적은 식구에 비해 이만큼 활력 넘치게 돌아갈 수 있는 건 전부 순이 덕이었다. 온 집 안을 뛰어다니는 아이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적막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도겸은 순이를 데리고 온 것을 결코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을 이 순간을 제외하고는.

“순이야.”

“예, 나리.”

도겸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잠시 해주에 있는 내 숙부님 댁에 가 있어야겠구나.”

“…예?”

부은 눈을 뜨기도 힘들 텐데, 아이가 두 눈을 있는 힘껏 치켜떴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래유?”

말간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설아가 정말 사람이 아닌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미리 안전을 확보해 두는 게 맞다는 판단이었다.

도겸은 냉정하게 표정을 굳혔다.

“말 그대로다. 지금 바로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려 두었다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여라. 믿을 만한 이에게 너를 데려다주라 부탁해 둘 터이니.”

“나리!”

숨넘어갈 듯 도겸을 부른 순이가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지가 잘못했어유. 지가 두 개나 있는 눈을 똑바로 못 써먹는 바람에 그런 사달이 났구먼유. 안 그랬으면 오늘 대감마님 댁 아씨께 그런 무례를 범할 일도 없었을 거구, 청이 아씨도 그런 고생은 안 허셨을 텐데. 역시 나리께서도 곤란허신 거쥬? 그런 거쥬?”

울먹이며 자신의 죄상을 고하던 아이가 기어이 또 울음을 터트렸다.

“지가 잘못했구먼유. 한 번만 봐주세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유. 나리,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셔유!”

“…그게 아니다, 순이야. 오늘 일 때문이 아니야.”

오늘만 해도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청이 말처럼 조설아가 사람이 아닌 괴이한 존재라면 오늘 도겸은 아이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 버리지 마셔유. 지가, 지가 더 잘할 거구먼유….”

“ 버리는 게 아니야. 일이 끝나는 대로 즉시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 그저, 당분간 네가 위험해질까 걱정이 되어 그러는 것이니 네 탓은 할 필요 없다.”

바닥에 붙을 듯이 엎드려 사정하는 아이가 못내 마음 아픈 도겸이 결국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그러곤 덜 여문 어린 손을 감싸 잡아 주었다.

“짐이 되지 않을게유. 지도 꼭 도움이 되고 싶어유. 아씨 곁에서, 정말 잘할 수 있구먼유….”

“너에게 그런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아. 더군다나 너는 몸종도 아니고 내 식구다. 식구인 너에게 그런 고초를 겪게 해서야 쓰겠느냐? 다 내 불찰이다. 사죄한다면 내가 해야지.”

“아녀유. 그러지 마셔유!”

눈물로 뺨을 적신 순이가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진장(賑場, 고아들을 구휼하던 지방의 공립 시설)서 피죽도 못 먹고 표낭도로 살 적에 나리께서 구해 주셨잖아유. 지는 그때 맴 딱 먹었구먼유. 이 하찮은 목숨은 앞으로 나리의 것이라고.”

“그러면 더더욱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위험한 일이믄 더더욱 나리를 지켜야지 지가 어디를 가유!”

늘 말만 잘 듣던 아이가 처음으로 도겸에게 반발하며 생떼를 부렸다.

“다른 건 뭐든지 할게유. 마구간 청소도, 빨래도, 아궁이 불 때는 것도 전부 다 지가 잘할 수 있어유. 앞으로 처신도 잘할게유. 멀리 가라는 말씀만 안 허시면 안 돼유? 지가 전부 할 수 있구먼유.”

다른 이유였다면 어쩔 수 없이 아이의 고집에 넘어가 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 안 된다. 도겸은 표정을 굳히다 못해 매정하게 아이를 떼어 냈다.

“그 일들이 하고 싶다면 전부 해주에 가서 숙부님과 숙모님께 해 드리면 된다.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으니 돌아가서 짐부터 꾸리고….”

사랑방의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린 건 그때였다.

“누구 마음대로?”

어쩌면 조금은 부서졌을지도 모르겠다.

“아, 아씨!”

벌떡 일어난 순이가 쪼르르 달려가 청의 뒤에 숨었다.

“나리께서 지더러 해주로 가라고 허셨구먼유. 우째유우….”

“네가 하도 시끄럽게 울어 대서 다 들렸어.”

청은 순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순이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재차 경고할 뿐이었다.

“더 울면 앞마당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버린다고 했을 텐데.”

“아, 안 울어유!”

순이가 또다시 옷소매로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았다. 이쯤 되면 거친 옷감 때문에 더 부어오르는 게 아닐까. 도겸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최도겸을 매달까?”

그때 청이 그의 시선을 틀어쥐듯 가져갔다.

“…예?”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널 울렸잖아.”

“아, 아니어유, 아씨. 나리 탓이 아녀유! 그냥, 그냥 지가….”

“네가 아니라 해도 매달아야지. 누구 마음대로 내 소유를 함부로 해주에 보내네, 마네 하지?”

“청아.”

귀신도 저렇게 잘 듣진 못할 것이다. 도겸은 앞으로 청이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천 리 밖에 나가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 아이가 다친 것을 너도 보았지 않느냐.”

도겸은 청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뒤에 숨은 아이를 데리고 나와 어깨를 잡아 세웠다.

“아이 얼굴을 보아라. 이리 상했는데, 그래도 곁에 둘 것이냐?”

순이는 고개를 푹 숙여 숨겼지만 통통하고 뽀얀 볼이 전과 다르다는 건 모를 수가 없었다.

“나, 나리, 지는 참말로 아무렇지 않구먼유!”

도겸은 순이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던 두 손으로 아이의 두 귀를 막았다. 그러곤 청을 보며 나직이 상기시켰다.

“내가 말한 적 있었지. 피를 봐야만, 죽여야만 해가 되는 게 아니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닌 게 아니라고.”

순이를 바라보던 청이 느릿하게 눈을 들었다. 짙은 속눈썹이 걷히고 흠 하나 없이 깨끗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도겸을 응시했다.

“그래서?”

“…뭐?”

도겸은 저도 모르게 아이의 귀를 더 꽉 틀어막았다.

“나, 나리?”

순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풀어줄 수 없었다.

“나는 순이를 해한 적 없고 앞으로도 해할 생각 없어. 그런데 왜 보내는 거냐고 묻잖아.”

“네 입으로 말했지 않느냐. 조설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그 낭자의 몸종이 나서서 아이를 매질했을지도 모른다고.”

도겸의 어조는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작아져 있었다.

“네가 손찌검할 것 같아 아이를 피신시키는 게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하려는 일에 언제 어떻게 주변 사람들이 다칠지 모르니까. 오늘만 해도!”

“…….”

“…아이가 죽을 뻔했지.”

“안 죽었잖아.”

청은 전혀 기복이 없었다. 도겸이 아이의 죽음을 이야기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과를 봤으니 다행이라지만 난 약간의 염려라도 불식해야겠다.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는 게 최선이고.”

“안 죽을 거야.”

도겸이 설득해도 청은 막무가내였다. 이번만큼은 도겸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모호한 희망에 아이의 목숨을 걸 순 없어.”

“그럼 해주는 인간이 아닌 자가 없을까? 네가 가진 약간의 염려까지 모두 불식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한 곳이야?”

“그건 아니지만….”

자신할 수 없는 건 황해도 자체가 안전한 지역은 아니기 때문일 터. 사람이 많이 사는 삼남지방보다 인구는 적지만 흉흉한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탓에 목사로 재임 중인 숙부조차 골치가 아프다 한 적이 있지 않나.

“적어도 여기서처럼 쉽게 엮이진 않을 것 아니냐.”

물러서지 않긴 했지만, 청이 도겸에게 해주 또한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을 심은 이상 확신은 없었다. 청은 순이의 귀를 막은 도겸의 팔목을 잡아 억지로 떼어 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내 곁이야.”

자칫하다간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아 도겸은 손에서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청은 태연히 순이를 끌어당겼다.

“이 아인 못 가.”

순이는 도겸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청의 뒤에 숨었다. 떠나고 싶지 않다는 완강한 의지였다. 눈만 빼놓고 도겸의 눈치를 살피는 가여운 아이는 비 맞은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한테 셈하는 법 알려 주기로 했단 말이야.”

“그럼유! 지가 알려 드리기로 혔구먼유? 지는 아씨 거라서 아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돼유!”

되바라지게 구는 순이에게 도겸은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순이 너, 조금 전엔 나한테 목숨을 주겠다 마음먹었다고….”

“지가 깜빡혔네유.”

억지로 떨어트릴까 청의 팔을 꼭 붙든 순이가 뻔뻔하게 굴었다.

“그렇게 됐슈.”

“…….”

도겸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순이의 해주행이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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