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감히 내 딸을 상하게 한 이를 몸 성히 보낸 것은 아니겠지.”
봄바람처럼 따뜻한 어조였으나 그 내용은 북풍한설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제 목이 날아갈지의 여부가 달려 있었다.
춘옥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모아 쥐었다. 꽁꽁 언 손가락들은 아무리 꼭 잡아도 냉기만 더할 뿐이었다.
“어린애가 땅바닥을 구르도록 매질을 해 주긴 했사온데….”
“아니야. 이것이 아버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년한테 붙잡혀서 제대로 혼내지도 못했단 말입니다!”
조설아가 악을 써 댔다.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며 눈은 반쯤 혼이 나간 듯했다. 너른 마당에 줄지어 서 있던 노비들은 숨만 죽인 채 눈치를 볼 뿐이었다.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조설아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마치 그녀 혼자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래서.”
뒷짐을 진 조익환이 다시 물었다.
“어느 집의 계집이더냐? 우리 설아를 이리도 화나게 만든 이는.”
***
“뭐?”
일찍 퇴궐하기 위해 얼마나 격무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바삐 집에 돌아오자마자 도겸은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장에 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누굴 만나?”
차라리 규장각으로 돌아가 다시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기가 차서 되묻자 순이가 갑자기 청의 앞을 가리고 섰다.
“아, 아씨는 잘못 없어유. 지를 구해 주셨구먼유!”
한쪽 뺨이 퉁퉁 부은 아이는 도겸이 무어라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울먹였다. 터진 입술이 팔(八)자가 되어 온 얼굴이 서러움으로 씰룩이는지라 당혹스러웠다.
“아니, 순이야. 나는….”
“백 냥에다 백 냥을 더해도 저랑은 안 바꿀 거라고, 그러셨어유!”
정작 아이를 앞에 둔 청은 느긋하게 와작 소리를 내며 유과를 크게 한 입 깨물 뿐이었다.
“대감댁 몸종은 백 냥에 그냥 다시 데려가라고 허셨구먼유…. 지는, 지는 이백 냥을 줘도 안 판다고….”
결국 순이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졸지에 아이를 울린 도겸이 당황하여 손수건을 꺼내 들자 순이가 그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고 단령에 파묻혀 더 크게 울어 댔다.
“너를 탓하려던 게 아니다, 순이야. 무엇보다 애초에 너는 사고팔 수 있는 신분도 아니지 않느냐.”
“알쥬. 아는데유, 나리….”
아마도 많이 놀라 겁을 먹고 긴장한 마음이 안심할 사람을 만나니 사르르 풀어진 듯싶었다. 도겸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발톱만 한 게 왜 이렇게 시끄러워?”
도겸이 능숙하지 못한 손길로나마 아이를 달래던 차, 결국 청이 짜증을 드러냈다.
“귀 아파. 계속 울면 저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눈물이 다시 들어가게 해 주마.”
“…예?”
순이가 눈물범벅인 채로 도겸에게서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난 청이 간식이 쌓인 그릇을 아이에게 대뜸 안겼다.
“아까운 물 빼지 마. 못생겨지지도 말고. 마음에 안 들어.”
“지, 지 안 울어유! 안 울게유!”
언제 통곡했냐는 듯 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은 순이가 아직 엉망인 채로도 방긋 웃었다. 실로 손바닥 뒤집듯 태세 전환이 상당히 빨랐다. 도겸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됐쥬? 그럼 지는 저녁 준비 도우러 갈게유!”
간식 그릇을 소중히 품에 안은 아이가 경칩 전에 깨어난 개구리마냥 폴짝폴짝 뛰어서 부엌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던 도겸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순이가 네게 상당히 감동을 받은 모양이구나.”
도겸이 사모를 벗어 마루에 내려 두며 청의 곁에 앉았다. 디딤돌 안쪽으로 길게 들어온 불그스름한 오후의 햇살이 대청에 앉은 도겸의 짙은 단령 자락을 물들였다. 명치 부근은 아이의 눈물로 흠뻑 젖어 짙은 색이 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에 단령도 수모가 많았다.
“마음에 안 들어. 아직도 피 냄새가 나.”
디딤돌 위에 선 청은 오후 내내 시달렸다더니 벌써부터 미미하게 짜증이 서린 얼굴이었다.
“그래도 용케 힘을 쓰지 않고 해결을 보았구나.”
“힘 조절이 안 돼서 죽여 버리면 어떡해.”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무정하게 굴던 청이 돌연 도겸을 흘겨보며 첨언했다.
“이 땅에서 왕은 그저 왕이기에 힘을 갖는다며.”
도겸이 한 말을 그대로 읊는 청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와중에 함부로 물리력을 휘둘렀다간 도겸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알고 현명하게 처신한 것이리라. 도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했다, 잘했어.”
“그래서 너는, 그 좌상 대감댁이라는 인간보다 가진 힘이 많아?”
“좌상 대감댁이 아니라 좌상 대감이다. 좌상은 좌의정이라고, 조선의 최고 관부인 의정부에 속한 세 정승 중 중간의 위치이고 대감은 품계가 정2품 이상인 당상관들을 부르는 존칭이지. 의정부나 품계에 대해서는 안 그래도 차근차근 설명해 주려던 건데….”
도겸이 설명하는 동안 나름의 답을 내렸는지 청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먼저 결론을 내렸다.
“말이 길어지는 것 보니 아닌가 보구나.”
그 표정이 꼭 ‘처음 만난 인간이 왕이었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 도겸은 저도 모르게 욱하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야. 아직 내 말이 덜 끝난 것이다!”
물론 청은 시종일관 무표정했지만, 도겸은 청의 속이 훤히 읽히는 듯했다.
“…천덕이라는 그 녀석이랑 비슷한 건가.”
천덕이 누군지 알 리 없는 도겸은 한쪽 눈썹을 치켜뜰 뿐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뭣보다, 여기 와서 나 말고 누구와 또 연을 맺은 것이냐?”
오롯이 서로를 독점하기로 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따지려던 차였다. 청이 턱짓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무심히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도겸은 비로소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 무뢰배의 이름이라면 그만 잊어라. 더는 상대할 필요도 없으니.”
그 악랄한 놈들이라면 어제 돌아오는 길에 잊지 않고 관아에 고발을 해둔 참이다. 기절한 상태들로 보아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아 금방 추포가 될 것이라 여겼건만, 아직 이렇다 할 결과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약까지 써 가며 괘씸한 짓들을 하는 협잡꾼들은 상부에 따로 고하여 대대적인 수사를 요청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어쨌든, 내가 좌상보다 품계는 좀 낮긴 하다만 결코…!”
“그래. 너 힘없는 거 알겠다니까.”
확인 사살당하는 게 아니면 무엇인가. 도겸은 언젠가 언이 비유한 것처럼 골절상이라도 입은 듯했다. 더는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자포자기한 그가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좌상 대감의 여식과 이리 빨리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조 낭자의 몸종이 왜 그리 과하게 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먼 곳으로 요양을 갈 정도였으니 어련히 과보호할까 싶었다.
아마도 궐에서 좌상을 마주치면 따로 이야기를 하기야 하겠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통쾌함에 도겸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른한 몸이 뒤로 느슨하게 기울어졌다.
“정해져 있다는 세자빈이 그 낭자다.”
“아아….”
오늘 산 것인지 귀한 산호 가지 노리개를 만지작대며 건성으로 듣던 파랑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았는데.”
“…뭐?”
깜짝 놀란 도겸이 급하게 상체를 세웠다. 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이었다.
“인간이 아니라니!”
갑자기 커진 언성에 청이 시끄러웠는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인간이 아닌 걸 인간이 아니라 하지, 그럼 뭐라고 해?”
“내 말은 그러니까…!”
마치 청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이었다. 믿기 어려웠다. 도겸이 적확한 답을 들을 수 있게 말을 고르는 틈에 청이 눈을 굴리며 아까 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데, 너나 순이처럼 사람의 냄새는 안 났어. 그래서 몸종이 나서서 순이를 때린 줄 알았는데.”
조설아가 손찌검했다면 순이가 죽을 수도 있기에 몸종이 먼저 손을 놀렸다는 의미인가. 도겸은 새삼스레 옷에 남은 순이의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그 낭자도 너를 알아보았느냐?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건 몰라. 말 섞는 동안 다른 얘길 안 하긴 하던데.”
“사람의 냄새가 안 났다고….”
사람이 아닌 존재가 눈앞에 청이 말고 또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 존재가 다름 아닌 좌상의 여식이라니. 뒷목이 서늘해지는 건 덤이었다.
도겸이 황망히 되새기는 동안 청은 당혹스러워하는 그를 도리어 이해하지 못했다.
“뭘 그렇게 놀라? 어차피 인간만 사는 곳은 아니었잖아.”
“그렇기야 하다만, 적어도 내게 있어 인간의 형태를 한 다른 존재는 네가 처음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제가 보던 세상이 좁았던 것인가, 세상이 달라진 것인가. 충격을 감내하기도 전에 도겸은 상황을 직시해야 했다.
조익환은 그럼 인간이 아닌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려 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인간이 아니면 무엇이더냐.”
도겸만큼 머리가 복잡하지 않은지 청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래 살았는지 냄새가 희미해서 바로 알아보진 못했어.”
“너와 내가 다르다는 건 여길 짚어 보고도 알았지 않느냐?”
“그야 사람은 널려 있으니 비슷한 냄새로 아는 거지. 거길 짚어 본 건.”
청이 기습적으로 도겸의 심장 부근을 쿡 찔렀고 도겸은 두 팔로 가슴팍을 가렸다.
“심장을 구별하기 위해서였고.”
투닥거리는 것도 잠시였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더는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벌떡 일어난 도겸은 망건이 덮은 이마를 매만지며 서성거렸다.
“조설아가 사람이 아니라면, 조익환도 사람이 아니라는….”
무심히 중얼대다 깨달았다. 도겸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져 놓고 태연한 눈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노을이 물들어 조금은 핏기가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확인할 생각조차 못 했다.
조설아가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