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34)화 (19/197)

맞은 뺨에 오소소 소름이 이는 것을 느낀 순이가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옷을 겹겹이 입었음에도 한기가 일 정도였다.

그동안 점잖은 나리 한 분만 모셔서 알지 못했나 보다. 귀한 아씨들의 자존심 싸움에는 몇 마디 오고 가지도 않으면서 돈만 수십 냥이 왔다 갔다 한다는 걸.

모르긴 모르지만 구중궁궐 공주 아기씨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싸울 것 같진 않았다.

“주인은 노비를 사고 팔 때만 입을 여는 것 같던데.”

청이 잡고 있던 여자의 팔을 조금 더 높이 치켜들었다.

“그래서 방금 전까지 네 소유였던 이 인간이 내 소유의 순이를 대신 때렸지 않아?”

드디어 임계치에 다다랐는지 조설아가 찰나에 웃던 표정을 지웠다.

“아직 덜 때렸소만.”

“그렇다면 마저 때리기 위해 몸종이 있어야겠네.”

어느새 운종가에만 무서운 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장옷도 없이, 배자도 없이 이제 겨우 저고리에 치마만 걸친 채면서 청은 떨지도 않았다. 순이는 저도 모르게 청의 치맛자락을 꼭 붙든 채였다.

조설아가 코웃음 쳤다.

“당연히 천것 때문에 내 손을 더럽힐 순 없으니….”

물론 말하자마자 뭔가 어긋났음을 깨닫고 금세 입을 다물긴 했다. 순이는 ‘설마’하는 생각에 청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주인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종을 가르치려면 10년이고, 값도 열 냥에 스무 냥이 더해질 정도로 가치 있으니까.”

청이 잡고 있던 여자의 팔을 풀어주었다.

“다시 데려오려면 더 큰 값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도 알겠지? 그렇게 ‘귀하디귀한 좌상 대감댁 따님’정도면.”

“…….”

“설아 아씨….”

졸지에 꼼짝없이 청의 소유가 된 몸종이 울상을 지었다. 순이는 할 수만 있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대감댁의 눈 밖에 날까 다들 쉬쉬하고는 있어도 그 표정들은 웃음을 참느라 바빴다. 이미 이 싸움의 승세가 파랑에게 기울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가만 청을 바라보던 조설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완벽하게 맞춘 길이의 치맛자락 끝에서 튀어나온 당혜가 앞에 있던 염낭을 다시 걷어찼다. 큰돈이 든 주머니가 데굴데굴 굴러 다시 청의 앞에 떨어졌다.

“오십 냥으로 사겠소.”

순이는 행여나 누가 채갈까 후다닥 뛰어나가 염낭부터 챙겼다.

“10년 가르친 값으로 스무 냥이 붙었는데, 오십 냥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그러나 청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십 냥에 오십 냥은 더 있어야겠는데.”

소중하게 염낭을 품고 있던 순이의 눈이 커졌다. 제가 아는 모지리 아씨가 맞나 싶었다. 실로 겁도 없이, 무려 좌상의 여식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데서 내일 아침이면 도성 안팎이 오늘 있었던 일로 시끌시끌할 것 같았다.

처음엔 숨죽이고 있던 구경꾼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웅성거리는 걸 보면 확실했다.

이제라도 서촌으로 뛰어가 나리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하지만 청이 아씨를 혼자 둘 순 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민에 손발은 얼었지만 등은 진땀으로 흥건해졌다.

“저 종년을 다시 사겠다고는 안 했소.”

조설아도 만만치 않았다. 좌상 대감댁의 따님의 시선은 순이를 향하고 있었다.

“백 냥까지 주긴 과하지 않소? 규장각 각신 나리의 누이동생 될 정도면 낭자가 부리는 종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제야 청이 눈을 돌려 순이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순이는 잘게 떨며 침을 꼴깍 삼킬 뿐이었다.

“순이는 백 냥에 백 냥을 더해 줘도 안 되는데.”

“…뭐요?”

“난 한번 내 소유가 되면 절대 안 뺏기거든.”

청은 조설아의 종이었던 여자를 턱짓했다.

“저 인간은 아직 내게 순이만큼 가치 있진 않으니, 백 냥에 데려가게 해 줄게.”

주종간의 신뢰마저 뚝 끊어지게 한 청이 조설아의 몸종을 도로 조설아가 사들이게 만들었다. 청은 평소 순이에게 터무니없는 것을 묻듯 투명한 눈으로 조설아를 괴롭혔다.

“왜, 과하다더니 오십 냥 더 내기가 힘들어서 그래?”

“겨우 오십 냥이 없을까?”

오십 냥이면 10년이나 부린 노비도 팔 수 있다던 조설아가 청을 노려보며 품에서 주머니를 찾을 때였다.

“아씨… 그, 오늘 가지고 나온 건 서른 냥뿐이에요.”

조설아의 몸종이 우물쭈물하며 사실을 고했다. 없는 주머니를 찾던 조설아가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못 들었을 리 없는 청이 기다렸다는 듯 아량을 베풀었다.

“그건 안 줘도 돼. 어차피 오십 냥 정도는 순이가 피 흘리면서 치렀으니까.”

결국 원점이 되었다. 청의 계산법에 모두가 휘말린 꼴이었다. 대동강 물을 팔았다던 편사(사기꾼) 김 씨도 울고 갈 솜씨가 아닌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려던 채로 눈만 치켜뜬 조설아에게 청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10년을 가르친 종의 몸값 정도면 이 아이가 치른 대가로 충분하지 않아?”

“날 건드려놓고 겨우 오십 냥…!”

“아씨!”

조설아의 몸종이 조설아를 뜯어말렸다.

“주인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 잊으시면 안 돼요!”

무슨 말을 했는지 역정을 내려던 조설아가 긴 숨을 내쉬며 화를 삭였다.

“…그래. 충분하네.”

그러나 청을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쉽사리 삭이지 못했다.

“규장각 각신 나리의 누이라 하여 끝까지 예를 갖추었건만 어찌 이리도 품위가 없는지!”

들으라는 듯이 비난해도 청은 덤덤하기만 했다.

“글쎄, 제 것도 못 지키는 주인에게서도 품위라는 건 못 느낀 것 같은데.”

청은 온기 없는 눈으로 조설아를 마주 보았고, 결국 조설아가 먼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장옷을 홱 눌러쓰며 돌아섰다. 그녀의 몸종도 잡혔던 팔을 움켜쥔 채 주춤대며 뒤를 따랐다.

“뭐해? 바쁘다며.”

“예? 예에….”

다시 의전으로 향하는 청을 따르는 순이는 두 번이나 제 품을 떠났던 염낭을 더는 잃어버리지 않게 꼭 안은 채였다. 얼마나 얼이 빠져 있었는지 입을 벌리고 있던 터라 입에서 흙 맛과 짠맛에 더해 옅게 비린 맛까지 났다.

“저 인간은 아직 내게 순이만큼 가치 있진 않으니, 백 냥에 데려가게 해 줄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청이가 한 말만큼은 뇌리에 깊이 박혀 들었다. 코를 훌쩍인 순이는 냉큼 젖은 뺨을 옷소매로 훔쳐냈다.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솟구친 순이는 더 이상 춥지 않았다.

“근데.”

“말씀하셔유.”

앞서 걷던 청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순이에게 물었다.

“열 냥에 스무 냥을 더하면 뭐야?”

“…예?”

“오십 냥에 오십 냥을 더하면 백 냥이라며. 근데 열 냥에 스무 냥을 더한 건 못 들어서.”

순이는 조금 멍해졌다. 설마 셈도 전혀 안 되는 사람이 좌상 댁 아씨와 옥신각신하며 큰돈과 사람이 오가는 거래를 한 걸까.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서른 냥이어유.”

아는 게 없어도 사람은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순이는 처음 배웠다. 그만큼 오늘 청의 모습은 순이에게 신선함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저기, 그… 셈하는 거 모르시면 지가 알려 드려유?”

“그러든지.”

한참 어리고 신분조차 다른 순이에게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조선 팔도에 또 있을까. 청을 바라보는 물기 어린 눈빛의 온도 또한, 전보다 조금 더 높아진 채였다.

아무래도 너무 대단한 주인 아씨를 만난 것 같았다.

***

“아씨, 그러다 넘어지시면 몸 상하십니다. 천천히 가셔요. 네?”

북촌으로 향하는 동안 조설아의 몸종 춘옥은 종종걸음으로 주인을 쫓았다. 어찌나 빨리 걷는지, 머리까지 쓴 샛노란 장옷이 펄럭여 안감이 내비칠 정도였다.

자칫 넘어져 귀한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아랫것들이 경을 치는지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마라도 타고 나왔다면 좋았을 텐데, 오늘따라 걷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이 사달이 났다.

“아씨 오셨습니까!”

도성에서 가장 큰 기와집의 문이 쩌억 입을 벌리고 조설아를 꿀꺽 삼켰다. 춘옥도 급하게 뒤를 따랐다. 돌아오는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씩씩대며 걷기만 하던 조설아가 행랑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홱 돌아섰다.

“넌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어? 이러면 몸 상한다, 그러면 좋지 않다! 꼭 내가 아프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다고!”

“그게 아닙니다!”

조설아의 사납고 매서운 성질머리는 하루 이틀 본 게 아니었다. 장터에서 있었던 일로 한바탕 화풀이를 할 것도 각오한 일이었다.

“저는 그저, 아씨가 걱정이 되어…!”

“닥쳐!”

장옷을 내던진 조설아가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춘옥은 헛숨을 들이켜며 아까 제 손에 맞던 작은 아이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설아, 거기서 무엇 하느냐?”

힘껏 든 손이 그 자리에서 멈춘 건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난 조익환 때문이다.

“…아버지.”

“오, 오셨습니까, 대감마님!”

춘옥은 주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허리를 깊게 숙였다. 무의식적으로 아직 욱신거리는 팔을 붙든 채였다.

“우리 딸, 무슨 언짢은 일이 있었던 것이냐?”

아버지인 조익환이 다정히 묻자 조설아가 금세 노여움을 숨기고 훌쩍였다. 숨이 짧아지더니 이윽고 분노로 응결된 눈물이 하얀 뺨 위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터에, 장터에서 어떤 년을 만났는데요, 아버지….”

“어허, 말을 곱게 하라고 이 아비가 그리 말하였거늘.”

“그년이 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이거 설아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구나.”

허허 웃은 조익환이 손수건을 꺼내어 딸의 눈물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그러곤 춘옥을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네가 설아를 따랐을 테니 상세히 설명하여라.”

“저, 그것이. 장터에서 다른 댁 아씨의 몸종과 우리 아씨가 조금 부딪쳤사온데.”

“…조금?”

조익환이 나직이 되물었고 춘옥은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서 제가 눈도 제대로 안 뜨고 다니냐며 곧장 혼쭐을 내주었지요!”

“어떻게 혼쭐을 내주었단 말이냐. 똑바로 뜨고 다니지 않아 쓸모가 없는 눈알을 파주기라도 하였느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