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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33)화 (18/197)

“주머니 찾은 건 참말로 다행이지만유, 암만 생각혀 봐도 이건 아니어유. 아씨 방금 낭도들한테 털끝 하나라두 상했음 어쩔뻔 혔어유? 아씨 털끝이 상허면은 지는유, 모가지가 날아가유!”

청이 또다시 질문했다.

“왜 네 목이 날아가?”

한양 바닥에서 가장 바삐 돌아가는 시전에서 느릿하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청은 꼭 홀로 다른 세상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지독히 태평해 보여서 순이는 순간 조금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그야 아씨는 귀헌 분이고 지는 천것이니께유!”

“천것이 뭔데?”

또다시 돌아온 질문에 순이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씨의 고운 낯은 마음껏 자랑해도 깨끗하게 빈 머릿속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일단 그, 의전으로 다시 가셔유! 급하게 나오느라 값도 못 치렀구먼유.”

순이는 청을 붙잡아 이끌고 의전으로 향하며 소곤댔다.

“아씨는 장차 세자빈이 되실 귀헌 분이시고, 지는 아씨 모시는 종이니께 천것이쥬.”

“아… 이 땅의 왕은 왕이기에 힘을 갖는다고 했지. 질서가 다르다고.”

청은 또다시 순이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그러다 순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도 귀한 인간의 털끝이 상한다고 천한 인간의 목이 날아가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대체 어디서 살다 오신 거래유? 어쨌든 간에, 여기 계시면 하루가 멀다 허고 천것들 목 날아갔다는 이야기만 줄줄이 듣게 되실 거예유.”

“…이상하다. 최도겸은 내가 너를 기절시킨 일로도 화를 냈는데.”

순간 바쁜 것도 잊고 순이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우리 나리께서 참말로, 화를 내셨어유?”

꽃샘추위에 발갛게 언 뺨이 이제는 따끈하게 익어 갈 참이었다. 청이 무감한 투로 덧붙였다.

“응. 네가 머리를 다쳐 불구라도 됐으면 어떡하냐고도.”

“아아….”

들뜬 마음에 바람구멍이라도 났는지 푸시시 꺼져 들었다. 순이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럼 더 이상 일도 못 허는 밥버러지가 될 테니께유.”

“나를 모시는 종이라면, 너는 내 건가?”

밥버러지가 무어냐 물을 줄 알았는데, 모자라지만 비범한 아씨는 의외의 것을 물어 왔다.

순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어, 나리께서 아씨를 모시라고 혔으니 그런 셈이쥬.”

“나는 내 소유의 것이 망가지는 건 싫은데.”

“그렇게 말씀 안 허셔도 다 안다니께유?”

당연하지만 왠지 모르게 속상한 마음에 뾰족하게 쏘아붙이려던 차였다.

“그러니까 아씨부터 상허지 않으시게 조심하셔야…!”

“아얏!”

미처 앞을 보지 못한 순이가 누군가와 부딪쳐 벌러덩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가 감히 우리 아씨를!”

하필 부딪친 이가 지체 높은 사람이었다. 순이는 곧바로 납작 엎드려 사죄했다.

“참말로 소, 송구허구먼유! 일부러 그런 게 아니어라!”

“이런 잡년이, 송구하면 다야? 다냐고! 우리 아씨는 바람이라도 잘못 스칠까 얼마나 조심조심 다니시는데!”

겨우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순이는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늘 혼자 다니다 누군가를 각별히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되니 자연스레 주의가 소홀해진 게 문제였다. 길게 해도 부족할 생각이 자꾸만 짧아졌다.

“어, 어디 상한 곳은 없으셔유? 지가 잠깐 한눈을 팔았구먼유. 어디…!”

고개를 들어 흙이라도 털어 주려던 순이가 돌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손바닥이 날아와 순이의 뺨을 매섭게 후려갈긴 탓이었다

반사적으로 품고 있던 엽전 주머니를 더 귀히 여겨 그것부터 끌어안긴 했지만 맞은 볼 역시 눈앞이 핑 돌 만큼 따갑고 쓰라렸다.

“감히 어딜 손을 대려고!”

“그, 그게 아니어유. 지는 그저 흙이라도 털어 드리려구….”

순이는 벌떡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었다. 뒤에 선 청이 중얼거렸다.

“…피 냄새, 나는데.”

순이는 차라리 아씨가 아까처럼 저를 두고 멀리 가 주셨으면 싶었다. 왜 표낭도는 이럴 때 안 나타나고 아까 주머니를 채간 걸까.

나쁜 놈이 더 미워졌다. 아씨가 휘말려서 좋을 게 없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네년이 더러운 몸으로 친 분이 감히 뉘신 줄은 아느냐? 이분은 좌상 대감댁의 귀하디귀한 따님 설아 아씨라고!”

완전 망했다. 귀하다는 아씨의 노란 치맛단만 겨우 본 순이는 질겁한 채로 퍼렇게 질려 갔다.

오늘 여기서 꼼짝없이 죽나 보다.

그런가 보다.

“지, 지 뺨따구 때려서 맴이 풀리신다면 얼마든 때리셔두 좋아유. 그러니께….”

“겨우 뺨 몇 대로 면피하겠다는 거냐? 오냐, 오늘 내가 아주 네 뺨을 찢어서 그 버르장머리를 확실히 고쳐 주마!”

억센 손이 다시금 하늘 높이 올라갔다. 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 아, 아야!”

하지만 다음 순간 순이는 다시 바닥과 인사할 필요가 없었다. 잔뜩 굳어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충격이 없던 탓이었다. 살짝 실눈을 뜬 순이는 곧이어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아씨!”

아까는 표낭도의 팔목을 휘어잡던 청이, 이번엔 대갓집 아씨를 모시는 종의 팔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혼절하기 일보 직전인 순이와는 달리 청에게서는 당혹감이나 놀란 기색이라곤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얘가 친 사람은 네가 아닌데, 왜 네가 화를 내지?”

“…예?”

“저 인간… 은 좌상 대감댁의 귀하디귀한 따님이신 설아 아씨라며. 너는 뭐냐고.”

순이는 안절부절못하며 눈만 굴렸다. 장옷을 둘러 눈코입만 간신히 보이는 좌상 댁 아씨는 벌어진 판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씨의 몸종만 나불거리기 바빴다.

“제, 제가 모시는 주인이십니다만! 그러는 댁은 뉘십니까?”

“나?”

청은 늘 그렇듯 평온한 어조로 답했다.

“얘 주인.”

“서, 서촌 각신 나리의 사촌 누이동생 되시는 청이 아씨여유!”

순이는 재빨리 청을 소개했다. 가슴이 두근거려 절로 숨이 가빠 왔다. 곧 염통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널 친 것도 아닌데 왜 순이를 때리느냐 물었어. 그것도 피가 날 정도로.”

“그야! 이년이 제 주인 아씨를 쳐서 우리 아씨가 크게 다치실 뻔했으니까요? 이런 일은 경을 쳐도 모자르지요!”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터에서 시비가 붙는 것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직접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난 건 순이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손이 떨리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청에게 팔이 붙들린 여인은 고통이 큰지 죽는 소리를 냈다.

“아씨의 몸종이 잘못한 일이니 이, 이것 좀 놓으세요. 부러지면 어쩌려고…!”

“그 팔이 부러져 내 몸종이 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아마도 지금 한양에서 가장 권세 있는 집 안의 딸일 조설아가 입을 열며 느긋하게 장옷을 내렸다. 온화한 인상의 아리따운 여인이었으나 순이의 눈엔 청이 훨씬, 훨씬, 훨씬 고왔다.

“맡은 소임도 못 하는 버러지와 같으니 내 종년의 값을 쳐주어야 하오, 낭자.”

온화한 생김새와 달리 나오는 말은 냉량하기만 했다. 조설아의 말을 들은 청이 뭔가 이해되지 않는 듯 습관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도 값이 있어?”

“아, 아씨!”

역시 모지리 아씨 어디 안 간다. 재빨리 청이의 곁에 붙은 순이가 소곤거리며 주의를 주었다.

“그, 원래 노비는 사고팔기도 혀유.”

“…….”

“지, 지 잘못이구먼유.”

청은 들었는지 못 들은 건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잡고 있는 대갓집 종의 팔을 놔주지 않아 조설아의 종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아씨. 그, 그만 놓아주셔유우. 좌상 대감댁이라잖아유. 이러다 참말로 큰일나유….”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닐 것 같아 순이가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청이 한술 더 떴다.

“네 종이 얼만데?”

“어, 어디 감히 함부로 우리 아씨께 말을 놓는답니까! 예를 갖춰야지요!”

“어디 몸종주제에 우리 아씨헌테 소리를 지른데유!”

팔이 부러질 위기였음에도 조설아의 몸종은 조설아를 싸고돌았다. 순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청은 가볍게 무시하며 조설아만 빤히 볼 뿐이었다.

“사온 값은 열 냥이다만.”

하지만 청의 호기에도 조설아는 만만치 않게 굴었다.

“10년 간 우리 집 안에서 잘 가르쳤으니 스무 냥 더 받아야겠소.”

순이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청이 제 쪽으로 내미는 손을 보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왜, 왜유, 아씨?”

“갖고 싶은 게 바뀌었거든. 이 인간을 사야겠어.”

“예에? 차, 참말이어유?”

“최도겸이 겨우 내가 갖고 싶은 거 사는데 열 냥에 스무 냥, 그것만 준 건 아닐 거 아니야.”

“그, 그건 아니지만유.”

나리였다면 어떻게 해결을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순이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나마 염낭을 청의 손에 고이 올려놓는 것 말고는.

묵직한 주머니를 가볍게 받은 청이 열어보지도 않고 냅다 조설아의 발치에 툭 던져 떨어트렸다.

“아, 아, 아아 아씨!”

서른 냥도 아니었다. 무려 쉰 냥이 넘는 거액이 담겨 있었다. 그걸 전부 조설아에게 넘긴 것이다. 혼이 나갈 듯한 순이는 작게 말하는 것도 잊고 크게 소리쳤다.

“저걸 다 주면 어쩐대유! 쉰 냥은 족히 든 것을!”

아무리 대감집 몸종이라지만 쉰 냥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청이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다시 줍고 싶어 움찔대는 순이를 두고 청은 조설아의 종을 더 끌어당길 뿐이었다.

“이제 내 거지?”

큰돈을 잃은 건 낭패였지만 적어도, 판을 흔드는 칼자루는 청의 손에 넘어온 게 순이의 눈에도 보였다.

“아, 아이고 아씨! 저 손목 부러져요, 아씨!”

“좋소. 무려 쉰 냥인데, 매매 문기 쓰는 일이야 일도 아니지.”

따르던 종이 울며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조설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꽃물로 물들인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하나 아직 댁의 종이 날 친 것에 대한 계산은 덜 끝나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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