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파랑의 이름은 심가의 청이다. 다들 그리 알고 극진히 대하여라. 또한 이 사실은 이 집 밖으로는 절대 새어 나가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안채의 손님이 난데없이 주인의 사라진 사촌 누이동생이 되었다. 그뿐이랴? 하루아침에 반가의 규수로 만들어 놓으라는 주인의 명령도 떨어졌다. 온 집 안이 발칵 뒤집어진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행랑아범은 당장 간택을 위해 입궐하는 길에 파랑이 타고 갈 꽃가마를 주문하러 나갔고, 남산댁은 과거 궁에서 일했던 인맥을 활용하여 파랑의 단장을 도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가고 없었다.
가장 어린 순이에게는 당장 파랑에게 필요한 의복을 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파랑이 좋아할 만한 장신구도 함께 사 주어도 좋다며 받은 돈은 순이가 평생 살며 처음 보는 천금이었다.
이렇게 큰 돈을 갖고 있으면 으레 표낭도(소매치기)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순이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구먼유!”
순이는 파랑을 시전에 있는 의전으로 데려갔다. 보통은 옷을 빌려 입는 곳이지만 대여용 옷 말고도 팔기 위해 만든 장내기옷도 다양한지라 이런 급박한 상황에 딱이었다.
무엇보다 이번엔 아씨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면 무엇이든 사들일 작정이기도 했다. 순이는 처음으로 가격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옷을 골라보았다.
“청이 아씨, 꼭 선녀 같으셔유.”
파랑이 이미 죽었다는 사람을 대신하는 것쯤이야, 남의 족보를 사다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고 양반이 되는 사람도 넘쳐나는 판국이라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순이는 본 적도 없는 진짜 청이 아씨보다야 파랑 아씨가 훨씬 곱다고 생각했기에 세자빈이 된다면야 세자 저하께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었다.
“선녀? 선녀가 뭔데?”
“선녀를… 모르셔유?”
다만 순이는 저보다 무식한 사람이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옷고름을 맬 줄 모르는 청을 대신해서 야무지게 매듭까지 만들어 주던 순이가 멈칫하며 청을 올려다보았다.
“모르면 안 돼?”
천진하게 묻는 청은 연하늘 빛 깃을 단 하얀 저고리에 산철쭉 색 치마를 걸친 청아한 모습이었다.
분도 바르지 않고, 아무런 장신구도 없이 그저 옷만 걸쳤는데도 날아가 버릴까 걱정이 될 만큼 아름다웠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있것슈?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아주 어여쁜 여인 같다는 말이었어유.”
“하늘?”
아무래도 품이 큰 건 손질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순이가 재차 살필 즈음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서 온 게 맞긴 한데.”
“예?”
“그렇다던데.”
청은 어느새 천막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시구먼유.”
순이는 떨떠름한 낯을 숨기며 괜스레 고운 치마를 한번 털어 낼 뿐이었다. 그저 ‘우리 아씨가 선녀는 몰라도 자기가 예쁜 건 아는구나’ 하고 남몰래 속으로나마 흉을 보았다.
“어머나, 이 절색은 어느 댁 아씨래? 세상에, 한양… 아니 팔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 여기 있었네!”
“서촌 각신 나리의 사촌 누이동생 되시는 분이어유. 이번 간택령에 사주단자를 넣으신다고 해서 와 계시는 거구먼유.”
도겸이 순이에게만 내린 또 하나의 특명이 있다면 바로 파랑, 아니 심청이라는 반가의 규수를 저자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이는 부러 청의 몸 치수를 재어 따로 사러 나오지 않고 직접 데리고 나와 얼굴 도장을 찍고 있었다.
“세상에, 아씨 장옷은 안 필요하신가? 배자는? 당혜도 있는데!”
뭐, 구태여 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벌써 벌떼 같은 사람들의 이목을 모두 집중시키고 있긴 했다. 가게 주인도 누군가 부추겨서 물어보는 것일 게 뻔했다.
“전부 있어야쥬. 어디, 이 집에서 젤루 고운 걸로다가 보여 줘 보라니께유?”
순이가 턱을 높이 치켜들고 으스댔다. 신난 의전 주인이 권할 옷들을 고르러 들어간 틈에 순이는 청을 데리고 굳이 가게 앞에 나와 진열된 옷을 고르는 척했다.
팔도에서 제일가는 아씨가 바로 우리 집 아씨라는 사실을 타인에게서 확인받자 괜스레 더 마음이 들떴다.
“아씨,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뭐든 골라 보셔유!”
잔뜩 흥이 난 순이가 재차 의전 주인에게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가져와보라 말하려던 차에 청이 나직이 아이를 불렀다.
“순이.”
“뭐유, 그게 마음에 드셔유?”
“…방금 누가 네 주머니 가져갔는데.”
“예?”
질문을 인지한 포동한 얼굴이 잠깐 사이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작은 손은 어느새 염낭을 숨겨 둔 치마 속을 더듬고 있었다.
“이, 이것이 어디로 갔데유… 아닌데, 여기 있어야 하는데.”
순이가 사색이 되어 턱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청이 무심히 되물었다.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던 거지.”
“그, 그럼유! 주인 나리께서 이걸로 아씨 옷이며 장신구며 싹 다 사 주라고 하셨구먼유우….”
아이가 털썩 주저앉았다. 온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져 금방 뚝뚝 떨구는 눈물에 청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가락지, 사고 싶었는데.”
아쉬운 듯 중얼거리던 아씨가 문득 어디론가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거 찾아다 주면 되지?”
“…예?”
“여기 있어. 어차피 네 다리론 못 따라와.”
“예? 아니, 예?”
순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한 번 훔쳐 내는 틈에 청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씨, 아, 아씨!”
청을 한 번 잃어버린 적 있는 순이는 염낭에 이어 아씨까지 잃을까 봐 또 덜컥 겁이 났다.
“아니, 아씨. 길도 잘 모르면서 어딜…!”
설사 표낭도를 보았다 하여도 그들은 보통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아씨가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다는 뜻이었다.
염낭이나 전대를 찢든 뺏든 한 사람이 물건을 탈취해 좁은 골목으로 달아나 쫓으면 다른 일행이 광주리 장수인 척 커다란 광주리를 들고 방해한다. 그게 보통 표낭도들의 수법이기에.
하지만 자칫 그들이 칼이라도 쥐고 있다면….
바로 얼마 전 밤에 피 칠갑을 한 채 집에 돌아온 청의 모습이 떠올라 순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공포로 남아 있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순이는 꺽꺽 울면서도 다리를 마구 때렸다.
“아씨, 안 돼유. 다쳐유….”
차라리 받은 돈을 모두 잃어버려 서촌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아씨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작은 순이의 눈에 세상은 갑자기 너무도 넓고 높아 보였다.
겹겹이 싸인 사람들 틈에서 아씨를 어떻게 찾을지, 아득하기만 했다.
“으악!”
그때 저만치서 느닷없이 돼지 멱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물처럼 흐르던 사람들이 웅성대며 멈춰 서거나 비명이 들리는 쪽으로 역류하는 덕에 순이도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놔, 놔, 놔요!”
간신히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아간 순이는 믿을 수 없는 상황과 마주했다.
“아, 아씨….”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에 청이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웬 사내의 손목을 비틀어 쥔 채였다. 표낭도의 지저분한 손에서 뚝 떨어지는 주머니를 받은 그녀가 순이에게 내보였다.
“여기서 네 냄새가 나.”
순이는 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 맞아유! 제 염낭이구먼유!”
사람들이 웅성대며 여기저기서 감탄했다. 소란한 사람들 중엔 마침 표낭도들이 없나 순찰을 돌던 포졸들도 있는지라 즉각 체포가 이루어져 관아에 넘길 수도 있었다.
“갑자기 저 처자가 저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어? 눈 깜짝할 새에 저 표낭도를 딱 휘어잡더라니까?”
“아니야. 저 가게 지붕이었어. 저기서 날아왔지, 아마?”
“표낭도도 보통 날랜 게 아닌데 말이야.”
“난 대낮에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니까?”
바로 주변에 있던 목격자들이 자신의 무용담인 양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여 댔다.
“이제 치레 거리라는 거, 살 수 있지?”
그러나 정작 사태를 일으킨 청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표낭도를 잡고 뿌듯해하거나, 순이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었다며 우쭐대지도 않았다.
“예? 그, 그럼유. 머리꽂이며 가락지며, 아씨 갖고 싶으신 건 다 살 수 있어유.”
이 모든 상황이 염낭을 꼭 끌어안은 순이에겐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게… 이게 다 뭔 일이래유….”
“시간 없다며. 해가 저 하늘 가운데쯤 오면 집에 매분구가 온다고 나 끌고 나왔으면서 왜 걸음이 느려?”
“아, 아씨. 잠시만유!”
일단 청이 또 날아가 버릴까 봐 대뜸 앞을 막아섰다. 그러곤 아직 젖은 눈가를 옷소매로 벅벅 닦은 순이가 잊지 않고 잔소리를 해댔다.
“앞으로는 어딜 가시든 지랑 꼭 붙어 다니셔야 헌다구 지가 말혔잖아유!”
“너랑 같이 왔으면 아까 그 인간 더 멀리 가서… 아마도 더 많은 인간 상대해 가면서 귀찮게 잡았어야 할걸. 최도겸이 사람 해하면 안 된다고 해서 번거로워. 아직 힘 조절도 잘 안 되고.”
방금도 부러트릴 뻔했다며 청이 가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저 하얗고 작고 고운 손으로는 엿가락 부러트리기도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방금 낭도를 잡은 것을 보면 또….
어쩌면 나리께서, 어느 깊은 산속에서 평생 무예만 갈고닦은 아씨를 데리고 온 걸까? 생각할수록 맞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제는 더 귀한 분이 될 아씨가 아닌가. 순이는 굴하지 않았다.
그게 주인 나리의 부탁인 한은 더더욱.
“그래도 지, 지도 충분히 따라올 수 있었어유!”
“너도 된다고? 그럼 왜 다른 인간들 다 땅으로만 다니지? 저 위로 다니면 안 복잡하고 편하던데.”
정말인가 보다. 나름대로 확신한 순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아무리 몸이 날래고 잘 싸워도 아씨 혼자 절대로, 혼자 위험하게 움직이시면 안 돼유. 아셨쥬?”
순이의 비범한 아씨도 나름대로 확신이 섰는지 순이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를 들고 가면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