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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31)화 (16/197)

“너 죽을 것 같아.”

“…죽진 않는다.”

무감한 눈에 어린 감정은 한 톨도 없어 보였지만 그 순수함이 무섭다는 것을 알기에, 도겸은 더운 숨을 내면서도 침착하게 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너’가 아니라 오라버니라 부르래도….”

파랑을 억지로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아 건 도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불로 가 눕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달빛이 스미는 문으로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인영이 아직 선명했건만, 눈이 감긴 그는 알지 못했다.

***

“나으리, 기침하셨습니까?”

“일어났네. 자네도 간밤에 잘 잤는가?”

간밤에 꽤 앓았는지 오늘도 도겸은 새벽 파루가 치고 나서야 눈을 떴다. 입궐을 위해서는 서둘러야 하지 싶었다.

“저야 뭐, 머리만 댔다 하면 바로 뻗습죠.”

“나도 어제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어떤 밤보다 깊고 편하게 잠들었노라 대꾸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간밤에 자신이 어찌 잠에 들었던 것인지 그 기억이 흐릿한 도겸은 쉽사리 세숫대야에 두 손을 담글 수가 없었다. 대신 그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괜찮네.”

그러고 보니 파랑을 내보내고 문 앞에서 기절하듯 잠든 것 같은데.

“낯빛도 좋지 않으신데, 혹 고뿔이라도 온 것이 아니신지….”

“저기, 파랑은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걱정 마십시오. 파랑 아씨라면 조금 전 순이가 안채에 들러서 주무시고 계신 것을 확인하고 나왔습니다요. 혹 또 안 계신가 싶어서 불러 보니까 자는데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셨다던데, 제가 다시 가서 확인해 볼까요?”

자꾸만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파랑 때문에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행랑아범이 반쯤 몸을 일으켰지만 도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닐세. 알다시피 성미가 그리 온화한 아이가 아니니 함부로 건들지는 말게. 자칫하다간 물리는 수가 있으니.”

“예?”

주름진 눈을 끔벅거리는 아범을 본 도겸이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농일세. 그보다 내가 밤새 땀을 좀 흘려서 아예 몸을 씻고 출타해야 할 것 같네. 미안하네만 목욕물 좀 준비해 주게.”

“아, 그리 하겠습니다, 나리.”

서둘러 나가는 행랑아범의 뒷모습을 멀겋게 바라보던 도겸은 다시 한번 제 이마를 짚어 보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열이 났던 것 같은데 이제 비정상적인 열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몸도 가뿐했다. 무심코 문가를 바라본 도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단단히 닫아걸었던 문고리가 뜯겨 있었다.

“…네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남아나는 문고리가 없겠구나.”

도겸은 뽀얀 햇살이 들어오는 창밖을 열고 안채가 있는 방향 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참으로 개운한 아침이었다.

***

“빨리 오시라니께유! 들러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지 아셔유?”

그 짧은 다리로 어찌나 종종걸음을 치는지 순이가 저만치 갔다가도 되돌아오길 반복했다. 터덜터덜 순이의 뒤를 따라 걷는 파랑은 눈이 반쯤 감긴 채였다.

“나 도망 안 가. 그냥 얌전히 자겠다는데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이고, 이미 늦었슈. 당장 아씨께 필요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유. 지을 옷이 많으니 골라야 할 옷감도 많고, 또 당혜도 사야 하고, 분전에 가서 좋은 분이랑 연지도 사야 하고….”

순이가 작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열심히 기억했다. 동그란 얼굴에 들뜬 생기가 가득했다. 추위로 인해 발갛게 익은 뺨은 파랑이 정원에 기르던 빨간 열매 같았다.

“내 잠 깨워 놓고도 멀쩡한 인간은 아마 네가 처음일 거라고.”

눈가를 비비다 그사이로 순이를 노려본 파랑이 이를 갈았다. 순이가 앞서 가든 말든 도로 집으로 들어가 자려는데 용케 돌아온 순이가 파랑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씨, 정신 좀 차려 보셔유. 정오 지나고서는 집으로 매분구(화장품 판매업자) 아주매도 불러 놔서 얼른 사고 들어가서 화장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니께유. 솜씨 좋은 침모는 이미 대갓집들에서 쏙쏙 데려가서 구할 수 있을라나 모르겄구먼유. 큰일이에유, 큰일!”

갑자기 쳐들어와 무작정 옷을 입혀 데리고 나오더니 고작 장을 보기 위함이었나. 파랑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나 피곤해. 밤새 네 주인… 아니, 그, 오라버니 때문에…!”

“지난번에 아씨 보셨던 그 비녀며 노리개도 살 수 있어유. 나리께서 아씨 원하시는 건 뭐든 사도 좋다 하셨구먼유.”

“노리개?”

“예. 아씨는 아직 혼례 전이니 비녀는 필요가 없으시지만 가락지나 노리개는 사실 수 있어유. 지난번엔 돈이 없었다지만 이번엔 아니구먼유?”

아마도 장신구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순이의 말에 심드렁하던 파랑의 미간이 슬쩍 펴졌다.

“…정말, 다 사 줄 거야?”

“그럼유. 좋은 물건들 나오자마자 다른 집 아씨들이 쓸어 가 버리면 우째유? 한시가 바쁘게 가야 하는데, 아씨 여기서 꾸물거리시면 안 된다니께유!”

“내가 언제 꾸물거렸어? 네 걸음이 느린 거지. 그래서 어디라고?”

용의 물욕을 우습게 본 최도겸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

언제 귀찮아했냐는 듯 파랑의 걸음이 부쩍 빨라졌고, 큰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품은 순이는 행여 엽전 한 닢 떨어질까 싶어 한껏 조심스럽게 파랑의 뒤를 따랐다.

***

“그게 무슨 소리냐? 대신할 처자를 찾았다니?”

“소리 낮추시지요. 듣는 이가 있어선 절대로 안 되는 사안입니다, 저하.”

주합루 뒤편 희우정 뜰을 거닐다 말고 도겸이 주변을 살폈다. 따라오던 이들은 저만치 뒤에 세워 둔 참이었다.

오래전 선대왕이 이곳에 들른 이후 비가 내렸다는 말이 있어 최근 유난히 자주 희우정 근처를 거니는 언을 따라왔지만 누가 숨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비록 제 사촌 누이는 세자빈 간택에 참여할 수 없게 됐지만 그 이름을 대신 쓸 아이를 찾았습니다. 사주단자를 예조에….”

“최도겸!”

언성을 높인 언이 멀리서 놀라 다가오려는 내관에게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도겸에게 돌아섰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정녕, 내가 아는 그 최도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냐 묻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려 가며 대응하다 이리된 것 아닙니까.”

“…하!”

“비범한 여인입니다. 저하께서도 그 아이를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일이 새어 나갈 일 또한 절대로 없을 것이고요.”

“허하지 않겠다. 이미 내정된 세자빈이 있는 판국에 경쟁자를 심은들, 그 아이만 고생할 게 자명하지 않느냐.”

“적어도 그 결정을 흔들어 보기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아이라면 충분히 웃전의 결정을 흔들 수 있습니다.”

“차라리 원하는 대로 세자빈을 올리라고 하여라. 가장 높은 곳에서 끌어내리는 게 더 그들을 완벽하게 무너트릴 수 있지 않겠나?”

“그 또한 저하의 업이 되면 어찌합니까.”

“덕이 될 수도 있어. 확실하지 않은 일에 어찌 이리 부나방처럼 구는 것인가?”

파랑을 얻은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터라 도겸은 다시없을 기회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파랑이 어떤 존재인지, 그 믿기 어려운 진실은 언제쯤 말해야 할까.

아마 그 사실을 밝히면 언도 반드시 허락하겠지만 그만큼 조심해야 하는지라 도겸은 언을 설득할 방법을 고심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언이 재차 도겸을 설득했다.

“도겸아, 내 죽마고우며 막역한 벗아. 내가 저어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느냐? 그저 내 하나뿐인 친우를 잃을까, 그 하나만 염려가 된단 말이다. 저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너에게도, 그 여인에게도 할 짓이 못 된다. 아니 된다. 허하지 않겠다.”

“…송구합니다, 저하.”

도겸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예조에 사주단자를 올렸습니다.”

“뭐?”

“외척이 되고자 저하의 뜻에 감히 반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를 바로잡고 나면, 저도 포기할 겁니다.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함이니까요.”

“꼭 이리 해야겠는가?”

“매번 떨어진 꼬리만 잡고 황망해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안 됩니다.”

결연하게 말하고는 있다지만 기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제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파랑이라는 존재야말로 가장 큰 위험 요소가 아니던가.

게다가 이 일에 제 목숨까지 걸었다는 말을 하면 분명 언이 이미 올린 사주단자를 빼내서라도 반대할 것임을 알기에, 도겸은 파랑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모든 것을 끝내겠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는 건 다만, 한 가지 약조를 해 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조… 최 직각, 자네 뭐 하는 겐가?”

놀란 언이 한 걸음에 다가서 도겸의 어깨를 잡았다. 도겸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탓이었다.

“혹 일을 그르치더라도, 절대 신을 보호치 마시옵소서.”

“어찌!”

“저하를 향한 충심으로만 일을 벌이는 게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원한으로 벌이는 일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 말거라. 어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저하께 누가 되고자 이리 곁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이리 궐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일어나거라, 응?”

언이 사정해도 도겸은 꿈쩍도 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약조해 주십시오.”

“네가 그러고도 친구더냐? 이 모진 놈아, 너라면 쉬이 약조하겠노라, 그리 말할 수 있겠냔 말이다.”

“쉬이 해 주시는 게 어렵다면 모질게 약조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나도 조건이 있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도겸 앞에 앉은 언이 나직이 말했다.

“대신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 판단되면 거기서 멈추겠다, 너도 약조하여라. 그리하면 나도 약조하마.”

도겸이 끌어온 힘은 이미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의 힘이 아니던가. 양심에 가책이 들었다.

“…약조하겠습니다.”

“모진 놈, 됐으니 그만 일어나라.”

언은 도겸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돌아서 얼마간 말없이 걸음만 재촉했다. 도겸은 그의 뒤를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길게 휘어지는 후원의 길을 따라 존덕정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가만 미약하게 느껴지는 희미한 봄 공기를 음미했다.

“한데 말이다.”

먼저 정적을 깬 건 언이었다. 문득 돌아선 그가 멈춰 선 도겸에게 물었다.

“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네가 그토록 자신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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