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 왜?”
“겉모습이 완벽하면 도리어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지. 내 숙부는 의심이 많은 분이시고. 그래서 너의 단점이 명확하다는 걸 보여 드린 거다.”
단점이라니. 아마 아직 이 땅의 질서를 배우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취급을 받고 있자니 아무리 무감한 파랑이라도 유쾌하진 않았다.
“난 단점이 없는데.”
“사라지기 전에 보여 드렸다, 그리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도겸은 숙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만약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약조를 번복하여서라도 반대하셨을 분이다. 분명, 네가 마음에 드신 게지.”
“…….”
“사람을 눈과 귀로 보고 듣고만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기에 부러 일찍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니 언짢았다면 내가 사과하마.”
“그럼 이제 들어가서 자도 되지?”
“무슨 소리.”
도겸이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하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
“앞으로 네 이름은 청이다. 심청.”
“심청?”
이불에 누워 달달하고 단단한 엿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던 파랑이 못마땅한 듯 새 이름을 입에 굴렸다.
“이름을 왜 바꿔야 하는데?”
“너에게 집 안과 신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나 세자빈으로 들일 수는 없으니.”
쏟아진 머리칼이 엿을 깨물어 먹는 파랑의 어깨를 물처럼 미끄러져 흘렀다. 무의식적으로 긴 머리칼을 넘겨주려던 도겸이 멈칫하며 손을 물렸다.
아까 중문을 넘어오는 여인을 보는데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금은 다시 푸른 색을 띠고 있다지만 아까는 분명 머리칼의 색이 변해 있었으니 말이다.
“이 머리는 어찌했던 것이냐?”
혹시 사람으로 하여금 환각을 보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차, 파랑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끼던 힘을 불어넣은 거야. 낮에 머리가 검은 이유를 알았거든.”
“힘을 불어넣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도겸을 위해 파랑이 귀찮다는 듯 그의 서안 위에 있던 붓을 들어 흰 종이를 대충 칠했다.
“무엇 하는 것이냐?”
“어떻게 하는 거냐며.”
그리고 칠한 부분을 또 칠하고 칠했다. 종이는 금세 넝마가 되었다. 파랑의 붓이 지나는 자리는 짙고 또 진한 먹색으로 물들었다.
“같은 색을 여러 번 덧칠하듯이 힘을 덧씌운 거야. 힘이 부족해 완전히 검게 만들진 못했지만 어두운 밤이니까 크게 보이진 않을 거 아냐.”
“…그렇군.”
같은 생각이었다. 다행히 달이 밝지 않은 밤이라 도겸 또한 초를 켜 둔 방이 아닌 밖으로 숙부를 유인했기에.
순이가 먼저 발견한다면 어떻게든 반응이 들렸을 것이므로 숙부에게는 그때 숨겨도 늦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있던 차였다.
“근데.”
붓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파랑이 엿을 하나 더 들고 깨물었다. 한참을 들고 있어도 녹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무나 세자빈으로 들일 수 없다면서, 왜 세자빈을 먼저 안 보고 집 안과 신분이라는 걸 먼저 봐?”
“배경으로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교육은 잘 받았는지, 인품은 온화하고 바른지.”
“그럼 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거구나.”
“없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내 사촌누이의 이름을 빌려 오는 거니까.”
도겸은 목을 가다듬고 나직이 파랑을 불렀다.
“청아.”
“뭐?”
“청아, 나는 이리 부를 것이다. 너도 앞으로는 나를 존대하며 ‘오라버니’라 부르면 된다.”
“오라버니?”
파랑의 눈썹이 불균형하게 구겨졌다.
“그게 뭔데? 존대는 왜 해야 하지?”
“호칭이긴 하지만 우리가 가족이라는 결속력을 만들어 주고 동시에 친밀감도 키워 주니까.”
“친밀감? 난 너랑 친해질 생각 없는데.”
이번엔 도겸의 눈썹이 불균형하게 구겨졌다.
“…어찌하여?”
엿의 단면에 난 구멍을 보던 파랑이 도겸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난 돌아갈 거니까.”
“…돌아가더라도 여기 있는 동안 네가 청이로 살아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단호하게 잘라 말한 도겸은 간식을 들고 있는 파랑의 손에 시선을 두었다.
파랑에겐 족쇄 같을 그 반지가 기실 도겸에게는 동아줄이나 다름없기에, 미안하고도 고마운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네가 이곳에서 심청으로 산들 파랑이라는 자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아마 잊고 싶어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밤마다 파랗게 변하는 머리 하며….
“당연하지. 심청으로 한 오천 년쯤 사는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도무지 인간의 범주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이가 어떻게 스스로를 잊을까.
“그러니 더더욱, 파랑으로 살며 가져온 것들은 잠시 잊고 심청으로 살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야 한다. 시간을 끈다는 건 윗전에서 이미 정해진 세자빈을 두고 고민할 만큼 네가 빼어나야 한다는 의미도 있으니까. 간택까지 시간이 길지 않아서 특히나 더 정신없이 바쁠 테니….”
“오라버니.”
잠자코 듣고 있던 파랑이 불쑥 도겸을 불렀다.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가르쳐 놓고도 그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래, 청아.”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이 된들 내 본질이 달라지진 않으니까 내게 심청으로 살며 굽히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약한 왕을 지켜야 하는 거면 차라리….”
빨간 혀로 달콤한 엿을 한 번 핥은 파랑이 도겸을 보며 눈을 번득였다.
“내가 너를 왕으로 만들어 줄게. 네가 왕이 되는 건 어때?”
지나치게 맑고 푸른 눈이었다. 거리낄 게 없다는 듯 깨끗한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눈망울을 보며 도겸은 순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야 조금 늦게 호통을 쳤다.
“두 번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거라! 절대로!”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귀가 따가운 듯 파랑이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도겸은 덥석 그녀의 양쪽 팔목을 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어디서든 그런 말을 해선 안 돼. 중죄 중에 중죄이니라. 당장 목이 잘릴 수도 있단 말이다!”
“내가 그렇게 쉽게 목이 잘릴 것 같아?”
물론 파랑이라면 왈패 놈들을 다져 놓았던 것처럼 능히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이다.
“역모 죄는 너만 죽고 끝나는 게 아니다. 나도, 이 집을 돌보는 가솔들, 그리고 심청이라는 딸을 가진 부모까지 전부 몰살당할 수 있어. 자기 목숨만 버리면 끝나는 일인 줄 아느냐?”
“…….”
그제야 파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은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의 세계와 이곳은 힘의 질서부터 다르다. 너는 힘이 있어 왕이 되었는지 몰라도 이 땅의 왕은 왕이기에 힘을 가져.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럼.”
귀를 막았던 손을 내린 파랑이 도겸에게 잡힌 양 팔목을 보며 물었다.
“내가 갑자기 돌아갈 방법을 찾아서 사라져 버리면?”
“…….”
“그때는 너나 이 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죽진 않아? 그땐 어떻게 하려고?”
도겸은 떨떠름하게 파랑을 놓고 물러나 앉았다. 차가운 살갗과 닿을 땐 묘하게 머릿속이 맑고 시원해지는 것 같더니, 다시 몸에 열감이 오르는 게 아무래도 매일 물에 빠지고 찬바람을 쐬다 가벼운 고뿔이 든 것 같았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때 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겠지. 그저 나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이런 일을 꾸미는 이유는 세자 저하께 위협이 될 자를 제거하기 위함이기에 시일이 얼마나 남았든 최대한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증좌를 모아야 해.”
가만 듣던 파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간단하게 이미 정해져 있다는 세자빈을 잡아다 죽이면 되잖아. 내가 언제 사라져도 상관없고 너에게도 시간이 많이 생기는 거 아니야?”
“청아.”
도겸이 새로운 이름을 부르며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파랑은 허리를 세우고 앉아 제 의견을 피력했다.
“죽이는 게 곤란하면 그냥 어디 꼼짝 못 하게 숨겨 두어도 괜찮고.”
이왕 도와주기로 한 것,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확실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 그러나 도겸은 파랑의 과한 의욕을 잠시 꺾어 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 나라는 명분으로 움직이는 곳이다. 만약 내정된 세자빈이 사라지면 그 세자빈이 사라짐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자부터 의심하게 돼. 그리고 그건 아마 당연히 내가 되겠지. 설령 내가 의심을 피해간다 하여도 누군가는 반드시 보복을 당할 터인데, 그걸 어찌 보느냐?”
“흐응….”
얼마 못 가 흥미를 잃은 파랑이 다시 이불에 엎드렸다. 이젠 엿을 깨물어 먹기도 질렸는지 아직 간식이 남은 그릇을 멀리 밀어내기까지 했다.
“이 땅의 인간들은 정말 피곤하게도 사는구나.”
“그래서 사람이 물고기와 다른 게 아니겠느냐.”
등불이 어른거리며 파랑의 하얀 낯을 비추었다. 처음엔 뜨거운 게 싫다며 질색했지만 이젠 그럭저럭 견딜 만한 모양이었다.
깜깜해도 잘 보이는데 왜 굳이 불을 켜냐며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던 용이 이 정도면 벌써 많이 적응한 게 아닐까, 도겸은 생각했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되새겼다.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그만 안채로 돌아가 쉬어 두어라. 날이 밝는 대로….”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일어나던 도겸이 순간 휘청했다. 파랑이 둘이 되고, 셋이 되었다.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데 셋이나 되다니, 도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너 왜 그래?”
“별것 아니다. 쉬면 나아질 테니 너는 혹여라도 옮기 전에 돌아가.”
간신히 벽을 짚고 선 도겸에게 파랑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보기만 해도 차가운 여인이 파란 눈을 굴려 도겸을 살폈다.
“너 다른 때보다 뜨겁던데. 그거 때문인가?”
하얀 손이 대뜸 도겸의 뺨을 만졌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손길이 잠시나마 멀어져 가던 의식을 잡아끌었다. 도겸은 간신히 파랑을 밀어내었다.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