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힘을 외부로 표출해 버리는 게 아니라 그저 한 곳으로 집중해서 모으면 되기 때문이다.
“저기, 아씨. 있잖아유….”
엉킨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한 순이가 작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머리를 만져 주는 일은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하다 보니 아무렇지 않은 것을 넘어 조금은,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파랑은 제법 너그럽게 순이를 채근했다.
“뭔데.”
“그게유, 그러니께.”
순이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고민하던 것을 마침내 꺼내 놓았다.
“아씨는, 정말로 이 안채의 주인이 되시는 거여유?”
“뭐?”
“아주매가 그랬슈. 아씨는 이제 곧 주인마님이 되실 거라고. 나리의… 배필이시라고.”
가만 듣던 파랑은 순이의 말들 중 몇몇 단어를 고쳐 주었다.
“주인마님 아니고 세자빈이 될 거고, 나리의 배필이 아니라 이 나라 왕, 아니 후계자의 반려가 되라던데.”
“…예?”
부지런히 머리를 땋던 순이가 멈칫했다. 서로 간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최도겸이랑 약속한 내용은 그거야.”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하나를 주면 둘, 셋을 욕심내는 작자들이 꼭 있었는데 최도겸도 마찬가지였나. 합의된 사항이긴 했으나 불쑥 짜증이 일었다.
“왜, 내가 여기서 또 뭔가가 되어야 한대?”
“아… 아녀유! 지가 잘못 알았구먼유?”
어딘가 모르게 순이의 목소리며 기운이 갑자기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휴, 그럼유. 갑자기 오셔서 그럴 리가 없쥬! 사주단자를 넣으시는 것이었구먼유.”
신이 난 아이는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파랑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그다음은 낮에 의전에 나가 대충 사 온 옷을 입게 했다.
딱 한 번 알려 준 옷 입는 순서를 파랑이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순조로웠다.
“아씨 아니믄, 몸씨 만드시는 거여유?”
“뭘 만들어?”
“하루 두 번뿐이 안 먹는 끼니마저 영 안 챙기시니께 걱정이 돼서유. 그러다 쓰러지시면 우짠대유?”
정기가 풍족하지 않아 무리하면 쓰러질 수도 있기야 하겠다만, 이 땅의 음식을 먹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파랑은 대충 흘려들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다 됐슈!”
댕기까지 야무지게 묶어 내린 순이가 으쓱한 얼굴로 빗접의 거울을 세워 보여 주었다.
“보셔유. 잘했쥬?”
기준이 어떤지 모르니 잘한 건지, 아닌지는 판단해 줄 수 없었다.
“글쎄.”
“어르신께서 보신다니께 더 신경 썼구먼유.”
“머리 모양을 만드는 것도 상대를 따져 가면서 해야 돼?”
“예?”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져?”
파랑은 단순히 몰라서 물은 것인데, 어쩐지 뜨끔한 표정을 지은 순이가 뺨을 긁적였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어유.”
“근데 왜 더 신경 써?”
“아… 앞으로는 항상 신경 쓸게유. 그럼 되는 거쥬?”
왜 그렇게 되지? 파랑이 맥락을 파악하는 동안 나무 빗접을 정리한 순이가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럼 가셔유!”
앞으로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계속 귀찮은 일들의 연속이겠지. 마뜩잖았지만 약속은 약속인지라 파랑이 어기적대며 일어나 문밖으로 향했다.
“해주 어르신이라고 했지?”
“예?”
“지금 만나러 가는 인간. 최도겸의 외삼촌.”
“네, 맞아유.”
“외삼촌이 뭔데?”
“예? 아, 그게, 그러니까….”
순이가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인 건가 싶을 즈음 대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돌아가신 마님의 오라버니 되시는 분이지.”
식사를 마친 소반을 들고 부엌으로 가던 남산댁이었다.
“조실부모한 후 나리께서 수년간 의탁한 분이기도 하니 아버지나 다름없고.”
부모와 파멸 아닌 파멸의 관계로 끝난 이후 쭉 홀로 지내온 파랑에겐 생소했다. 관계 자체를 맺지 않고 살아왔던지라 그런 관계를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표현하는 것도 낯설기만 했다.
“뭐 해? 어서 가지 않고. 두 분 기다리신다.”
“예! 가유!”
순이가 파랑을 사랑채 쪽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계시면은 아씨 좋아하실 식혜랑 약과 들고 갈게유. 너무 긴장하지는 마셔유.”
“긴장? 긴장을 왜 해?”
순이는 파랑에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 했지만 파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딜 들어가 있으라는 걸까. 최도겸과 어르신이라는 인간은 사랑 마당에 서 있는데.
“그야 웃어른 뵐 때는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께유. 특히 해주 어르신은 엄한 분이시라 어찌나 무서운지… 어매야!”
먼저 중문을 폴짝 넘어가던 순이가 깜짝 놀라 발을 헛디디는 것을 파랑이 붙잡아 주었다. 빽 소리치는 아이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본 도겸의 눈이 커졌다.
“나, 나리… 나와 계셨구먼유?”
파랑을 보고 놀란 도겸이 조금 늦게 순이를 챙겼다.
“…괜찮은 것이냐?”
뒷덜미를 거칠게 잡은 파랑이 세워 주기 전까지 순이는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시피 했다. 파랑은 무표정하게 한 팔로 아이의 무게를 전부 감당하며 가볍게 끌어당겼다.
와중에 의아한 게 있다면, 순이의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지고 체온이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엎어지는 게 나았겄어유….”
“뭐?”
“아, 아녀유! 그럼 지는 이만 가 볼게유. 말씀 나누셔유.”
도겸이 걱정하며 다가오려 하자 순이가 놀란 길고양이처럼 중문 밖으로 달아났다. 시끄러운 아이가 사라지자 사랑 마당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다.
“숙부님, 저 아이입니다.”
도겸이 긴장한 얼굴로 해주 어르신이라는 사람에게 파랑을 소개했다. 파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인사 올리거라. 해주에 계시다고 했던 내 외숙부님이시다.”
“…….”
“…….”
파랑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인사를 올리라니. 그런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눈만 깜박이는 그녀를 말도 없이 한참을 바라보던 심오균이 뒤늦게 헛기침하며 언짢아했다.
“맹랑한 아이로구나.”
“송구합니다. 아직 예법을 전혀 모르는지라.”
“뭐? 저리 기본조차 안 된 아이를 데리고… 가능한 것이냐? 겨우 인사 정도야 준비를 시키는 와중에도 쉽게 가르칠 수 있었거늘!”
“미처 준비가 부족해 숙부님께는 대단히 송구합니다. 하오나 인사 하나도 어설프게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무어?”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설프게 가르쳤다 자칫 나쁜 버릇이 들까 저어되었습니다. 오늘은 비록 큰 무례를 범하였으나….”
도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파랑에게 닿았다.
“배움이 빠른 아이입니다. 심씨 가문에 전혀 누가 되지 않으리라 자신합니다.”
도겸이 확언했지만 심오균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파랑의 이곳저곳을 뜯어보았다.
“…미형만 보고 데려온 것은 아니고?”
“기민하고 영특한 데다 쉽게 휘둘리는 성격이 아닙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제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줄 알고요. 아마 웬만한 무인보다 나을 겁니다.”
“못 본 사이에 허풍이 는 것이냐? 웬만한 무인보다 낫다니. 혹여 내가 변심할까 저어되는 것이라면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그것이 아니라….”
도겸은 파랑의 정체까지 말할 생각은 없는지 답답해하면서도 말을 아꼈다. 상대가 어떤 이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파랑도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되었다. 네가 어떤 결심인지 아는데 어련히 좋은 씨앗을 잘 골랐을까.”
“양부가 되는 일을 흔쾌히 허락하여 주셨기에 저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낯을 보여 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숙부님 외엔 저 아이의 민낯을 볼 이가 없을 겁니다.”
“그렇긴 해도….”
마뜩잖아 하면서도 심오균은 파랑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하나 저 아이는 특히 함부로 밖에 나다니지 않게 해야겠구나. 내보일수록 분란만 커질 것 같으니.”
“…분란?”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는 파랑을 두고 도겸은 깊이 이해했다는 듯 믿음직하게 약속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되었다. 제대로 된 인사는 다음에 안사람과 함께 받는 걸로 하자. 안사람에겐 내가 돌아가서 이야기하마.”
“심려 끼쳐 드리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가 봐야겠구나.”
심오균이 행랑 마당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겸이 뒤를 따랐다.
“먼 길 오셨는데, 조금이라도 쉬었다 가심이 좋을 텐데요.”
“아니다. 해주가 워낙, 한시라도 손을 놓을 수가 없는 곳 아니냐.”
돌아서 가는 와중에도 도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남겼다.
“한데 해주에 있는 안사람을 보내든, 저 아이를 해주로 부르든 해서 교육은 제대로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부족한들 어찌 인사 하나 제대로 못 한단 말이냐.”
“교육을 시킬 이는 따로 정해 두었습니다. 그이보다 더 최적인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내가 할 일은 진정 그것뿐이더냐?”
“이미 충분히 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파랑의 민낯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 준 도겸이 이번엔 함께 따르라 손짓했다. 파랑은 가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럼 가시는 길 조심히 가십시오.”
대문 앞에 선 도겸이 먼저 허리를 숙여 배웅했다. 지친 말을 대신해 도겸의 마구간에 있던 말을 데리고 나온 행랑아범도 마찬가지였다.
수천 년간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여 본 적 없었다. 그러나 도겸의 등 뒤에 서 있던 파랑은 가만 그를 바라보다 어설프게나마 상체를 기울였다.
손 모양은 보이지 않아 그저 숙인 각도만 따라 했을 뿐이었다. 또 말이 발광을 할까 싶어 아예 없는 것처럼 기척을 숨김은 물론이다. 덕분에 말은 파랑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의기양양하게 투레질을 해댔다.
“…준비가 되면 연통하거라.”
“예.”
말에 올라 그 모습을 본 심오균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떴다. 숙부를 환송하고 돌아선 도겸이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파랑을 보곤 그 머리에 손을 짚었다.
“그만 일어나도 좋다.”
벌떡 일어난 파랑은 도겸이 웃고 있는 게 마뜩잖았다.
“잠깐 가르쳐 줬어도 완벽하게 할 수 있었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