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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28)화 (194/197)

“저런, 다리를 저는 사내 말이냐? 우리 집 안은 그런 사람은 부리지 않는단다.”

그렇게 공석이 된 대사헌의 자리는 조익환에게 돌아갔다.

“이제는 직접 미끼가 되어서라도 잡을 생각입니다.”

피를 흘리며 죽어 간 부모님의 사체를 검시한 오작인들은 그 사인을 모두 불에 타 죽은 소사(燒死)라 결론 내렸다. 그 과정에서 어린아이의 간절한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친우의 사정에 세자가 나서서 왕을 설득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겸이 부모와 뱃속의 동생 모두를 잃었다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심씨 가문에 큰 누가 될 수 있음을 압니다. 가문을 생각해 거절하셔야 함이 당연하고요.”

도겸의 굳은 의지에 한풀 꺾인 심오균이 화를 삭이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곤 반대로 설득에 나섰다.

“하나뿐인 아들이 이리도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걸 알면 네 어미가 편히 저승으로 갈 수 있겠느냐? 제 목숨을 내놓더라도 자식을 지키고 싶은 이들이 바로 부모인 것을, 네가 정녕 몰라 그러는 것이지!”

도겸은 한쪽 문갑을 열고 깊숙한 곳에서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내 풀었다. 비단 보자기 속에 곱게 접혀 들어 있는 것은 피와 그을음으로 얼룩진 작은 솜두루마기였다. 도겸은 무릎을 꿇은 채 10년 전 그날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심오균의 앞에 펼쳐 놓았다.

“소자의 불효는 차후에 부모님을 다시 뵙게 된다면, 그때 사죄드리겠습니다.”

검게 말라 버린 핏자국을 어루만지는 도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부모님의 억울한 죽음뿐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주어진 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폐세자를 논하는 상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걸 네가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을 성싶으냐? 가진 세력부터가 달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진배없다.”

“적어도 계란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닙니까.”

아무리 약해도 산 것이 낫다. 죽은 것은 늘 거기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알 속에서는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

“1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자랐는지도요.”

“적폐를 일소한들 그다음은. 너에겐 본전치기도 안 될 터인데 괜찮겠느냐?”

“상대가 크게 잃는다면 잃은 만큼 제가 얻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본전치기일 수가 없지요.”

도겸은 이미 굳게 작심한 뒤였다. 심오균은 차라리 부러지길 자처하는 조카를 한참이나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표면적으로 길지 않은 틈이었지만 어쩐지 한나절은 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끝에 드디어 숙부가 답을 내렸다.

“좋다. 동참하마.”

도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허락… 하시는 겁니까?”

뜻밖이었다. 당연히 거절당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지 않나.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건 너만이 아니지 않으냐. 나 또한 누이동생과 매제,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를 잃었다. 너만 원한이 있는 건 아니란 소리지. 일찍이 내 양심에 호소한 것은 아니었더냐?”

여전히 매서운 눈을 하고도, 숙부는 도겸에게 의지할 구석을 내어 주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서운 녀석 같으니.”

혀를 차며 피에 젖은 흔적을 내려다보던 심오균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물었다.

“네가 미끼가 된다 해도 세자빈 간택에 올릴 처자는 따로 구해야 했을 텐데.”

신중한 성격답게 심오균은 도겸이 전장에 나가기 전 얼마나 준비를 해 두었는지 확인했다.

“너보다 더 최전선에 나갈 이가 누구냐. 지금 안채에 있는 것 아니더냐?”

“…예?”

사색이 된 도겸은 반사적으로 안채 쪽을 바라보았다.

파랑의 머리칼이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을 시간이었기에.

***

“아씨, 지 순이어유. 주무시는 거여유?”

묻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달려온 발소리만 해도 자신이 순이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쳤다는 핑계로 종일 잠만 자던 파랑은 느긋하게 눈을 떴다.

“아씨?”

“…자는 중이야.”

“주무시는데 우째 대답을 허신대유? 나리가 찾으셔유.”

또 도망갔나 싶어 집에 오자마자 확인부터 하러 들르더니, 이제는 오라 가라 명령이었다. 물론 늘어져 있는 게 편한 파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볼일 있는 인간이 오면 되잖아.”

무엇보다 해가 지고 한참 깜깜한 밤이었다.

“손님이 오셔서 함께 뵙자고 하셔유. 머리 해 드려유?”

눈만 굴린 파랑이 풀어헤친 머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푸른 머리칼은 여기저기 물웅덩이처럼 고인 채였다.

순이가 봐도 되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도겸과 협의가 된 게 없는지라 조금 고민이 됐다.

“지 들어가유!”

저만치서 문이 열렸다. 혼자 있을 땐 불을 전혀 켜 놓지 않기에 방 안은 어둡기만 했다. 훌쩍 들어온 순이가 파랑의 곁으로 다가왔다. 파랑은 일단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아씨, 일어나 보셔유. 해주 어르신께서 오셨구먼유?”

“난 그런 인간 모르는데.”

“우리 나리의 외삼촌 되시는 분이어유. 오늘 아침에 나리께서 서신을 보내셨는데 우째 직접 오셨는지는 모르겄구먼유.”

기분 같아선 이대로 한 천 년쯤 자고 싶었다. 이렇게 단잠을 자고 일어나 오래 깨어 있던 적이 있었나. 파랑의 삶을 비춰 보았을 때 요 며칠은 경이로울 정도로 활발한 편이었다.

“아씨, 잠깐 인사만 드리고 와서 주무셔유. 예?”

“…나 잘 거야. 나가.”

“안 돼유! 나리께서 어르신 식사하시는 동안 아씨 단장시켜 드리구 사랑으로 모셔 오라 허셨구먼유?”

“왜 내가 가? 필요한 인간이 오라고 해.”

파랑이 돌아눕자 순이가 겁도 없이 파랑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씨는 장유유서도 모르셔유? 한자는 까막눈인 저도 아는데 어찌 그러셔유. 어르신께서 부르시면 잽싸게 가야쥬!”

다른 이가 몸에 손을 댔다면 기겁했을 텐데, 살생이란 것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어린아이라 그런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 또한 신기한 일이었다.

“알 게 뭐야.”

하지만 그게 파랑이 움직일 이유는 되지 못했다.

“뭣보담 외간 남자는 규방에 함부로 발을 들이면 안 되는 거 모르셔유?”

“…그래?”

그러나 잠시 뒤 파랑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당연히 최도겸이 모를 리 없지 않나. 어젯밤만 해도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차 그녀의 머리에 제 겉옷을 뒤집어씌우다시피 하며 숨긴 그였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도겸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책임은 이 땅의 구애를 받는 그가 감당할 일이 아닌가. 저는 어찌 되든 상관 없었다.

“잘 생각허셨어유.”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자 순이가 냉큼 빗을 가져왔다. 어두컴컴한 와중에 아이가 머리를 더듬대는 게 느껴졌다.

“뭐 해?”

“아씨 밝고 뜨거운 거 싫어허신다구, 나리께서 아씨 심기 거스르지 말라구 허셨구먼유.”

“다른 말은?”

“없었슈. 이거 봉사마냥 어두운 데서 하려니 잘될는가 몰라유.”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럼 정말 신경 쓸 필요 없는 거겠지. 파랑은 더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근디 아씨, 어두운 데서 만져 보니께 머릿결이 다른 때랑 좀 다른 것 같어유?”

그래도 불을 켜는 것은 싫어서 아이가 불편하든 말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머리를 만지던 아이가 연신 감탄하며 칭찬했다.

“꼭 흐르는 냇물에 손을 넣은 것 같구먼유. 시원허구… 보드랍구.”

“그야….”

“나는 물이나 다름없지.”

도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파랑의 눈이 뜨였다. 순이는 파랑의 눈에 푸른 안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비싼 기름 안 바르고도 차분허니 얼마나 고운지 모른다니께유.”

“…….”

왕이 되어 하늘을 제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것은 파랑이 가진 힘이었다. 밤에만 푸른 머리 색으로 돌아온다는 건 이 땅의 제약을 덜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물론 살던 곳에서 쓰던 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비교적 그랬다.

그럼 낮에는 왜 검은 머리카락일까. 단순히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닮아간 것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낮엔 주작의 힘이 강해지는 탓이었다. 붉은 불길이 타오르고 타오르면 어떻게 될까. 결국 타들어 가다 못해 검은 재가 된다. 그렇게 파랑은 새카맣게 탄 검은 재와 같은 머리카락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 물은?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순간이 되면 주변에 보이던 색이 어땠더라.

또한, 검었다. 파랑은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순이야.”

“예?”

얼마간을 그러고 있었을까. 불현듯 다시 눈을 뜬 파랑이 명령했다.

“너무 어둡다. 주변을 좀 밝혀야겠어.”

“불이유? 진짜 켜유?”

“그래.”

뜨거운 건 언제나 싫었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그럼 계셔유. 가서 불씨 가져올게유.”

캄캄한 와중에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뛰어나간 순이가 곧 등잔에 불을 붙여 왔다. 들어올 땐 불씨가 꺼질까 살금살금 기어 오다시피 했다. 작은 등잔불이 사방을 비추다 이윽고 파랑에게까지 닿았다.

“아씨, 불 가져왔…!”

그리고 빛이 비춘 파랑을 본 순이의 눈이 함지박만 해졌다.

“시상에, 이게 뭐래유?”

등잔불을 내려 둔 순이가 다음 순간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어두웠나 봐유. 머리 다시 해야겄어유.”

이리저리 비죽비죽 튀어나오거나 제대로 묶이지 않은 탓에 머리가 산발이었다.

“…그래?”

파랑은 가만 순이가 다시 풀어내는 머리카락을 조금 덜어다 불빛에 비춰 보았다.

성공이다. 불에 직접 비춰 보면 푸른빛이 돌긴 하지만 확실히 깊은 물의 그것과 같은 어두운 색이었다.

“두셔유. 다시 빗어야 허구먼유.”

촘촘한 빗을 쥔 순이가 파랑이 매만지는 머리카락까지 가져가 꼼꼼하게 빗어 내렸다.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기실 파랑은 이 머리카락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를 가늠하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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