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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27)화 (193/197)

뚱하게 커다란 손을 노려보던 파랑은 마지못해 제 손을 얹었다.

“시간을 벌기만 한다고 했으니, 내가 정말 세자빈이 될 필요는 없는 거지?”

정확히는 채 닿기도 전에 도겸이 낚아챘다고 봄이 맞았다.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내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너도 협조해 주어야 한다.”

“…알았어.”

사실 파랑은 도겸의 확언보다 꽉 잡은 그의 체온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많이 뜨거운 것 같은데.

“날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때는 정말로 네 심장을 터트릴 테니까 알아둬.”

“그럼 확실히 약조한 것이다.”

파랑이 무슨 생각일지 알 리 없는 도겸은 더없이 진지했다. 심장을 터트리겠다 겁을 주어도 소용없었다.

“서로를 독점하는 것으로.”

그리고 파랑은 이 독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

“최도겸!”

노기 띤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날이 밝자마자 급히 전인을 구해 해주로 보내놓았더니 늦은 저녁에 당장 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답장이 아닌 서신의 수신인이 직접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도겸을 찾았다. 대문을 열어준 행랑아범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어, 어르신 오셨습니까!”

무시무시한 기세로 열을 올리며 나타난 이는 도겸의 외숙부이자 해주 목사인 심오균이었다.

“이 녀석 지금 어디에 있나.”

“나, 나리께서는 지금 안채에 계십니다만….”

“안채?”

아무리 안채에 주인이 없다 한들 함부로 남성이 안채에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성난 걸음을 옮기려던 심오균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예. 그, 지금 집에 묵고 계신 아씨가 거기에 머물고 계셔서… 순이야!”

“부르셨어유?”

“어서 안채로 가 나리께 아뢰어라.”

행랑아범은 소란에 놀라 뛰어나온 순이를 안채로 보내 소식을 전한 다음 심오균이 타고 온 말을 안으로 들였다.

“우선 사랑으로 가시지요, 어르신. 먼 길 오셨을 텐데 식사는 하셨습니까?”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행랑아범은 눈치가 좋은 사람이었다. 도겸이 맞닥뜨릴 심오균의 화를 조금이라도 식혀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고단하실 터인데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행랑아범의 부단한 노력이 통했을까. 심오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됐네. 나는 냉수 한 그릇이면 되고 말에게 여물과 물이나 좀 챙겨 주게.”

“그럼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시원한 물도 금방 올리겠습니다.”

심오균을 사랑에 들인 행랑아범이 문을 닫자마자 도겸이 사랑마당에 나타났다.

“숙부께서 오셨다고?”

“예.”

도겸은 매 맞기 직전의 아이처럼 긴장한 채였다. 감히 주인보다 높은 곳에 설 순 없는지라 행랑아범은 서둘러 대청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굳게 닫힌 사랑방의 문을 한번 살핀 뒤 주인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나리,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르신께서 많이 노하셨습니다.”

“…예상한 일이야. 자네는 너무 걱정 말고 가서 숙부님의 식사부터 준비하여 주게. 먼 길 오시느라 식사도 하지 못하셨을 테니.”

“안 그래도 말씀드렸습니다. 한데 냉수 한 그릇만 달라고 하셔서요.”

“혹시 모르니 식사도, 목욕물도, 이부자리까지 전부 준비해 두게. 되도록 쉬시고 내일 오전에나 출발하시게끔 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금방 준비해 놓겠습니다.”

방을 데우는 게 우선이었다. 행랑아범은 걱정스레 사랑으로 들어서는 도겸의 등을 뒤로하고 동동걸음으로 스스로를 재촉했다.

***

“해주 어르신은 우째 이 밤에 오신 거래유?”

“나야 모르지.”

행랑아범이 땔감을 한 아름 들고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 순이와 남산댁은 아궁이 앞에 모여앉아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에 적당히 마른 고구마를 묻어 놓고 이제나저제나 익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나리께서 어르신이 드실 식사를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마침 고구마도 다 익었고….”

남산댁이 잿더미 속에서 고구마를 하나씩 꺼내었다. 따끈하게 익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기대에 찬 순이의 콧구멍이 절로 커졌다.

“다행히 저녁에 끓인 국이 넉넉하여 금방 되겠네. 옜다. 많이 먹어라.”

“우와아….”

겨우 고구마 하나에 순이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행복해했다. 호호 불어 가며 까만 껍질을 벗겨 내니 노란 속살에서 폴폴 김이 올라왔다.

“한양 바닥서 고고마로는 아주매가 최고일 것이어유.”

“뭐야? 다른 걸로는 최고가 아니다, 이 말이냐?”

“다른 걸 지가 먹어 봤어야 알쥬. 근디 고고마는 딱 알겠슈. 이보다 더 맛난 게 있으면 그게 고고마래유? 꿀덩어리지.”

“그만 나불대고 부지런히 처먹기나 하렴.”

행랑아범이 물만 올려놓았던 가마솥을 빼고 국솥을 올려 주었다. 남산댁은 마른 풀을 넣고 다시 부채질을 시작했다. 은은하게 고구마를 익히던 불은 다시금 거세게 일어 솥을 데웠다.

“근디 말여유.”

순이가 안채 쪽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습관적으로 코를 훌쩍이며 닦아 내다 얼굴에 그을음이 잔뜩 묻은 것도 모른 채였다.

“아씨는 우째 저래 안 드실까유?”

답을 알 리 없는 남산댁과 행랑아범은 잠시 멈칫할 뿐, 아이에게 이렇다 할 답을 주지 못했다. 조용해진 틈에 달콤한 고구마를 오물대다 삼킨 순이가 의아한 점들을 더 털어놓았다.

“몸씨 만든다고 굶는 것이면 몰라두 당과나 엿은 또 그럭저럭 드신단 말이어유?”

“흠, 하긴….”

묵묵히 듣고 있던 행랑아범도 슬쩍 말을 얹었다.

“물에서 그렇게 오래 숨을 참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

“맞쥬! 틈만 나면 샘에 들어가 있더래니께유?”

순이가 맞장구를 치듯 덧붙였다. 멍하니 커져 가는 불길을 바라보던 남산댁도 고개를 끄덕였다.

“집채만 한 광주리에 놋그릇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번쩍번쩍 잘도 들더구먼.”

“도깨비 속곳마냥 질긴 천으로 만든 걸레였는데 박박 찢었쥬!”

“어제 피 칠갑을 해서 온 건?”

어젯밤을 생각하니 고구마를 먹던 순이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씨가 크게 다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아씨를 본 순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진땀을 빼며 엉엉 울고 말았더랬다.

“시체가 걸어 들어오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요.”

“다행히 아씨가 다치신 건 아니라 망정이쥬.”

남산댁은 소반에 반찬을 담은 그릇을 하나씩 놓았고 행랑아범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겼다.

“나리께서는 그냥 질 나쁜 무뢰배들을 만나 소동이 있었다고만 하셨습니다요.”

“그런 놈들을 만났담서 아씨는 우째 아무렇지도 않으시데유? 지는 생각만 혀도 오줌을 지릴 것 같구먼유….”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작은 소반 하나를 소담한 밥과 반찬들로 가득 채운 남산댁이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 집 안채에 머물고 계신 파랑 아씨는 이 조선 팔도에서 보기 드문 미모를 가진 데다 힘은 장사인데, 물에서는 물고기마냥 잠을 자고 성질머리는 또 강성이라는 거야?”

순이는 고구마를 쥔 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궁이에 땔감을 하나 더 욱여넣은 행랑아범도 주억거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럼 저 안채에 계신 손님은….”

말끝을 흐리는 남산댁에게 두 사람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행랑아범과 순이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셋 중 가장 학식이 깊고 연륜이 많은 남산댁의 결론을 기다렸다.

“그래! 바로 그거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남산댁이 손뼉을 딱 쳤다.

***

“오셨습니까, 숙부님.”

도겸이 방에 들어섰을 때, 심오균은 피곤할 텐데도 자리에 앉지 않고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직접 찾아뵈려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네가 진정 정신이 나간 것이냐!”

화가 많이 났다던 행랑아범의 말이 맞았다. 심오균이 문갑 위에 놓여 있던 백자를 한 손으로 번쩍 들고 돌아섰다.

그러나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어떠한 질책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도겸을 보고는 맥이 빠져 도로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죽었다 여기고 있는 내 딸의 이름으로 사주단자를 넣겠다고?”

그렇다고 화가 아예 가신 것은 아닌지라 침착하게 묻는 심오균의 목소리엔 서늘한 분노가 깔린 채였다.

“어차피 족보에 딸의 이름은 잘 올리지 않는지라 저희 집 안의 양녀로 삼아도 무관합니다만….”

“최도겸!”

“자칫 양녀라는 게 알려지면 다른 집 안 여식들과 같은 선상에 있을 때 경쟁력이 떨어질까 저어되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부탁을 드린 겁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조익환의 딸이 세자빈으로 내정되어 있다 합니다.”

그 말에 잠시 심오균의 말문이 막혔다. 한숨을 내쉰 숙부는 잠시 뒤 침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망이 없지 않으냐. 자칫 세자빈으로 만든다고 하여도 그다음이 더 문제겠지. 정쟁의 허수아비가 되든 갈대가 되든, 이리저리 휘둘릴 게 자명하다. 그러다 결국 최씨와 심씨 두 집 안이 풍비박산되는 꼴만 보게 될 테고!”

“하오나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어머니와 배 속의 제 동생을 죽인 자를 영영 잡을 수가 없습니다.”

10년 전 금화군이 도착하기 전 불이 나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 어린 도겸은 그곳에서 이미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부모님과 가솔들을 발견하였다.

불이 났는데 바닥에 핏물이 고여 있다니. 거기다 이미 숨이 끊어진 아버지는 그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보아도 몸싸움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직후 현장에 진입한 금화군에게 강제로 끌려 나가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지만….

“…도겸아.”

“분명 범인을 보았고 증좌가 있었음에도 잡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결정적으로 도겸은 그때 똑똑히 목격하였다. 절뚝이며 타들어 가는 집의 담장을 몰래 넘어가던 한 사내를.

다급히 쫓아가다 결국 북촌 초입에서 놓쳤지만 이후 후견인이 되어 주겠다며 도겸에게 자상한 제안을 해 주던 조익환의 집에서 우연히 같은 뒷모습을 봤었다.

나가려다 말고 온 집 안을 헤집으며 절뚝이는 사내를 찾던 소년에게 조익환은 역겹게도 슬픈 얼굴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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