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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26)화 (192/197)

도겸이 무언가를 더 떠올렸는지 웃음기 섞인 투로 덧붙였다.

“나 같은 인간들은 한 입 거리도 안 된다고 했던가.”

도겸은 웃었지만 파랑은 술김에 한 소리였다고 부정하거나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긴 해.”

진지하게 대꾸했지만 도겸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알고 나니 더 어렵구나.”

파랑이 아직 낫지 않았다 생각했는지 어깨를 잡아 바위에 기대게 한 도겸이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사람이 아니라 믿었다가도 당연히 너를 의원에게 데려갈 생각을 한 것부터, 의식이 없다고 이 얕은 물에 질식하면 어떡하나 한참을 붙들고 있던 것 하며… 여전히 어려워. 나의 고정된 관념들이 이리도 무섭구나.”

그사이 배에 난 구멍이 말끔히 아문 것을 확인한 파랑은 차근차근 주변을 살폈다.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붉게 남은 노을 덕에 고즈넉한 정경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몸 전부를 담그고 깊은 물에 헤엄을 치고 싶은데, 야트막한 물은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몸을 잔뜩 구부려야 간신히 가슴께에 찰 정도였다.

“어렵다며, 용케 물로 데리고 왔네.”

물 밖으로 나간 도겸은 돌아선 채 젖은 속적삼을 벗고 저고리부터 꿰어 입었다. 그의 벗은 뒷모습을 지켜보던 파랑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은 원래 저렇게 몸에 흉터가 많을까?

“너 스스로를 물이나 다름없다 말하고 물 위를 걸어 다니기까지 했으니 강제로라도 믿을 수밖에.”

“…….”

어쩐지 일어났을 때 기운이 없더라니, 취해서 흥청망청 다 써 버렸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 어제 힘을 낭비하지만 않았어도 오늘 배가 뚫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까이에 있던 계곡은 모두 말라 있어 어찌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앞으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좋겠구나.”

“안 그래도 그 생각 때문에….”

돌아가 지켜야 할 것들을 잊고 이곳에 적응해 버릴까 봐. 그래서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우울한 기분이 든 파랑이 애꿎은 물을 튀기는 틈에 도겸이 작게 기침했다.

“그래도 설마하니 물에 몸을 담근다고 정말로 상처가 나을 줄은 몰랐지만….”

꼼꼼하게 옷고름을 맨 그가 돌아섰다.

“진정 다행인 일이지.”

“왜, 내가 죽어 버렸으면 써먹지 못할 테니까?”

다행이라 되새기는 도겸에게 파랑이 불쑥 물었을 때, 도포를 걸치던 그의 손길이 멎었다.

“…….”

“내가 필요해졌다며.”

“…그래.”

어쩐지 파랑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도겸이 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어딘가 모르게 머뭇거린 그가 드디어 파랑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너에게 세자 저하의 빈이 되어 달라는 청을 하려 했다.”

“세자 저하의 빈이 뭔데?”

“세자빈이란 이곳 조선 왕의 후계자인 세자 저하의 정실부인을 말한다. 이를테면, 반려인 건데.”

“뭐라고?”

물에서 벌떡 일어난 파랑이 도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이미 내 세계의 왕이야. 그런 내가 왜 이곳의 왕도 아닌, 후계자의 반려가 되어야 하지?”

“왕… 이었다고.”

적잖이 당황했는지 그의 목울대가 깊게 출렁였다. 파랑은 내친김에 자신이 왕이 된 지 몇천 년이나 되었는지 알려 주려다 저조차도 정확히 얼마나 됐는지를 몰라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곳과 그곳의 시간 개념도 다르지 않을까. 최도겸이 제가 얼마나 대단한 용인지만 알았으면 되었다.

“그래서 너를 죽이려는 이가 많았던 것이냐?”

…그렇게 생각했는데 도겸이 의외의 부분을 파고들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네가 내게 그랬지. 죽이려고 왔냐며.”

“뭐, 절대자의 자리에 있다 보면 가끔 겁도 없이 달려드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파랑은 팔짱을 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지만 도겸은 여전히 침잠한 눈빛이었다.

“너도 녹록지 않은 길을 걸어왔겠구나.”

하필 어머니의 꿈을 꾸고 난지라 파랑의 기분이 썩 유쾌하지 못했다. 파랑은 다소 퉁명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물었잖아. 왕인 내가 이곳에서 고작 세자빈이 되어야 하는 이유.”

“세자빈이 되어 평생을 보내 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잠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어서야.”

파랑은 어렵지 않게 도겸의 집에 머물며 보고 들은 문제를 떠올렸다.

“어제 종일 집을 비우고 다녀온 일이 잘되지 않았나 본데.”

도겸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돌아갈 방법을 찾기도 바쁜데 언제 세자빈 노릇을 하고 있겠는가. 파랑에겐 도겸의 요구를 들어줄 의무도, 이유도 없었다.

“난 시간이 없어.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네 요구는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파랑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정기도 거의 없는 물에서 상처가 나은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지만 정기가 충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는 반지에게 완전히 압도당해 언제 심장이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빌빌거리며 살거나, 심장이 깨지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만 남을 테니 말이다.

“비단 네 사정도 하루 이틀 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이지는 않던데 말이다.”

그래서 우선은 삼각산이라는 곳으로 가 그곳의 정기를 받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돌아서 물길을 가늠하던 파랑은 도겸의 도발에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일단 삼각산으로 가 정기부터 채울 거야. 그러면 뭐든….”

“몰랐느냐? 이곳이 삼각산이다.”

“…뭐?”

믿을 수 없었다. 파랑은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도겸에게 다시 확인했다.

“정말 삼각산이야? 그럼 이곳의 물이 네 집 마당에 솟아오르는 거라고?”

“말했지 않느냐. 가까운 곳은 물이 말라 몸을 담글 수가 없었다고. 말을 타고 달려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도 겨우 개울 수준이 되긴 했지만.”

“아니야. 위에서 흐르는 물이 정기를 품고 있어야 아래에서 솟는 물도 당연히….”

다시 첨벙첨벙 물로 걸어 들어간 파랑이 물을 쥐며 정기를 취했다. 하지만 미미했다. 그마저도 마시는 즉시 반지가 날름날름 마셔 버려서 파랑에게 남는 것도 없었다.

“…말도 안 돼.”

남은 건 그럼 바다로 가 보는 일뿐인가. 파랑은 넋을 놓은 사람처럼 도겸을 버려두고 물길을 따라 그냥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말라 죽어 가는 이 땅을 구하러 온 것이구나. 물, 물을 다오!”

구하기는. 제가 말라 죽는 게 먼저일 듯싶었다. 내내 쩌렁쩌렁 소리를 내지르던 노파의 말들이 이명처럼 귓가에 울렸다.

“바다로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지 않느냐.”

뒤따라온 도겸이 파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더 막으면 널 저 물에 처박아 버릴 거야.”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닌지라, 파랑은 무감하던 평소와 달리 격앙된 채로 매섭게 경고하며 다시 물길을 따랐다. 그러나 도겸이 겁도 없이 재차 막아섰다.

“이번엔 진짜 죽일 거라고!”

“그 반지가 신물이라 들었다!”

우뚝 멈춰 선 파랑이 눈만 들어 도겸을 응시했다. 여지를 얻은 그가 덧붙였다.

“네가 길을 물어본 상인이 이야기하더군. 네가 우연히 성수청의 전대 국무당을 만나 신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에 순이와 장을 볼 때처럼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어 미처 입단속을 시키지 못한 게 문제였나. 파랑은 나직이 반문했다.

“그래서? 나를 그 성수청에 데려다주려고?”

“그건 불가능하다. 성수청은 한참 전에 폐지되어 이제 없는 기관이니까. 그나마도 상인이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무당이라 하여 알아들은 것이다.”

“그럼.”

“적어도 기록은 남아 있을 테니까. 또한….”

말끝을 흐리는 도겸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 파랑이 다시 비켜서 걸으려 하자 그제야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네가 온 날, 국행제가 있었지.”

“국행제?”

“비록 궁내에 소격서나 성수청은 남아 있지 않지만 궁 밖에서 무격들이 제사를 지내도록 궁에서 물자를 보내고 있다 들은 적이 있어. 그날은 아마도 기우제를 지냈을 텐데, 기우제를 지내고 네가 나타났으니 뭔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다.”

도통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은 도겸이 파랑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게다가 네가 만난 이가 국무라니. 공식적으로는 한참 전에 폐지됐으나 비공식적으로는 그동안 유지가 되어 왔다는 의미가 아니냐. 알아보면 분명히 뭔가 더 나올 것이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긴 했다. 파랑의 눈치를 살핀 도겸이 이번엔 과감하게 흥정을 붙였다.

“그리고 나는 너도 알다시피 궁에서 일하는 관리이지 않느냐. 알아보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될 텐데.”

그래도 세자빈이 되는 건 싫었다. 파랑은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가 보니까 궁에서 일하는 관리야 차고 넘치던데. 그중에 아무나 새로 인연을 만들면 그만 아니야?”

적어도 최도겸보다는 쉬운 대가를 말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무엇보다 이곳 삼각산보다 정기가 풍부한 샘이 바로 내 집 안마당에 있지 않느냐.”

“…….”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직접 한 말일진대, 이를 포기하려고?”

파랑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하니 삼각산에서 허탕을 칠 줄은 몰랐기에 난감하기도 퍽 난감하던 차였으니까.

“이래도 내가 만족스럽지 못할까? 네 길을 안내할 이들로 겨우 저런 왈짜들이나 고르는 게 네 안목이더냐?”

“지금까진 살면서 뭔가를 고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필요한 것이다.”

시선을 피해도 도겸은 집요하게 파랑을 따라왔다.

“나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도 거절한다면… 그만큼 네가 돌아가는 데 절실하지 않거나.”

“…….”

“세자빈이 되는 일이 어렵다 느끼는 것이겠지.”

“누가 어렵대? 그저 번거롭고 귀찮을 뿐…!”

발끈하여 반박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다는 것을. 파랑이 짜증스레 올려다보자 승자의 미소라도 되는지 도겸이 희미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럼 이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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