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으로… 갈 거야. 물에 들어가야 해.”
“삼각산에 닿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조금만 쉬면 돼. 피는, 금방 멈출 거야.”
이런 와중에 고집스러운 파랑 때문에 도겸은 피가 부글부글 끓는 심정이었다.
“당장 나조차도 뿌리치지 못하면서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말을 어디에 두었더라. 다급하니 방향도 제대로 기억나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끓어오르는 피가 용암이 되어 넘칠 것 같았다.
“네 도움은 필요 없어.”
“그럼 너도 내게 의지하지 말고 그저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
“…너도, 라니.”
기어이 터진 도겸의 닦달에 파랑이 가물가물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짙은 속눈썹이 걷히고 드러난 검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꼭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가는 파랑이 겨우 낸 말이었다. 도겸은 쉬이 답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그렇다고 말하기엔 달려오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온통 걱정으로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찾은 것도 맞지 않나.
잠시 고민하던 도겸이 마침내 답을 내었다.
“그래. 널 이용할 이유가 생겨 급히 따라온 것이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파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 집에서 지내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했던 것, 기억하느냐? 그와 같다. 너는 이미 내 호의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
도겸은 냉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며 이미 지나간 일에 억지 명분을 뒤집어씌웠다. 그렇게 계산적으로 대하는 것이 사람이 아닌 파랑에게 편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넌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겠지만 나는 아니다. 네가 필요해.”
간신히 방향을 잡은 도겸이 걸음을 재촉했다. 지혈하려 덮어 놓은 손수건마저 하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뭐?”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너를 만족시킬 수 있다 단언하였는데도 나를 믿지 못하였다니, 그렇다면 서로를 적절히 이용하면 그만 아니겠느냐?”
파랑이 말없이 도겸을 응시했다. 재고 가늠하는 시선일까.
아니, 따지고 보면 차라리 아무런 의미 없이 투명한 눈빛에 가까웠다. 다만 지나치게 아득히 깊어 읽어 낼 수 없을 뿐.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를 얼마든지 써먹어도 좋다. 그만큼 나도 너를 알차게 이용할 것이고. 다만 이런 버러지들과 교류하는 모험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 땅에선 오직 나만.”
“…….”
“너를 독점하고 싶다는 뜻이다.”
이 땅에서 파랑을, 그리고 파랑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이는 최도겸 한 사람에 국한되어야만 한다.
파랑은 앞으로 그가 벌일 도박의 패가 될 것이고, 도박에서 패는 아무에게도 쉽사리 보여 줘선 안 되기 때문이다.
“안 되겠느냐?”
“…감히.”
파랑의 작은 손이 도겸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하얀 손엔 힘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비로소 도겸이 파랑을 사람과 완전히 분리해 낸 순간, 파랑은 사람이 되었다.
“네가 뭔데…!”
무어라 화를 내려던 파랑이 짧은 숨을 들이켰다.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안 돼. 말하지 마라. 바로 산을 내려가 치료부터 받아야 해!”
파랑을 들어 안으려는 도겸의 팔이 잡혔다. 전과는 달리 강한 힘이었다.
“…물.”
붉은 입술마저 옅어진 파랑이 의식을 잃기 전 도겸에게 원한 것은 하나였다.
“파랑아!”
결국 파랑이 도겸의 품에서 늘어졌다. 다급히 서서 맥을 짚어 보았지만 간신히 느껴질 정도로 희미했다.
이대로 파랑이 죽어 버리면 어쩌나. 입 안이 말랐다.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더는, 누구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
파랑은 사방이 수평선만 보이는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파랑아.”
익숙한 광경이라 생각하던 순간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파랑은 그제야 이곳이 꿈속임을 알았다.
“…엄마.”
이미 수천 년 전에 죽은 이의 목소리였으니까.
“세상에, 내 딸이 바다를 만들어 내다니.”
바다를 만든 것은 파랑이 성체로 자라나던 순간이었으니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을 거슬러 왔음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 성장통을 앓은 끝에 폭발하는 듯한 고통을 겪었고 환골탈태한 몸은 몰라보게 커지며 아름다운 비늘로 뒤덮였다.
무엇보다 몸 안에서 터져 나간 힘이 주변의 땅을 수몰시켜 너른 바다로 만들어놓은 뒤였다. 깊이도 넓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바다는 곧 성장한 용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의미했다.
“파랑아, 잘 들으렴.”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차기 왕이 될 재목을 낳았다는 사실에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을 것 같다.
“너는 앞으로 이곳을 다스리게 될 거야. 너를 이기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런 건 귀찮은데.”
몸만 자랐지 생각까지 다 자라지 못한 파랑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성장통을 겪는 내내 몸을 짓누르던 힘이 제 의지대로 운용된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었다. 손가락만 튕겨도 일어나는 파도가 신기했고 조금 더 집중하면 하늘로 솟구치는 물기둥이 즐겁기만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얼굴, 그 슬픈 눈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끊임없이 왕의 견제를 받을 것이고, 호승심 강한 자들이 네 심장을 전리품 삼기 위해 달려들 거야.”
용은 본래 욕심이 많은 종족이다. 그게 반짝이는 보물이든 힘이든 원하면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용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 온다면 자신이 가진 힘과는 비견하지 못할 만큼 큰 힘을 가진 자가 눈앞에 있을 때였다.
물론 경외나 충성심으로 엎드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 목숨이 아까운 탓일 뿐.
“그러니 이곳을 나가는 즉시 왕의 성으로 가 그를 꺾어. 내 생각엔 그가 널 이기긴 어려울 것 같구나.”
사정이 이렇다 보니 먼 과거엔 이 세계에 남아나는 게 없었다. 숱한 싸움이 벌어졌고, 종족의 존속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서야 용들은 가장 강한 왕만을 인정하고 그에게 종족의 다스림을 맡겼다.
그러나 왕을 옹립한 태고의 용들이 잊은 것이 있다면, 용이 아주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성격을 가진 종족이라는 점이었다.
왕들은 철저히 자신의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것만 취했다. 약자들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걸 구경하겠다며 내버려 두고 부추기는 왕이 있는가 하면 지위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모조리 탐하기만 하는 왕도 있었다.
지금의 왕은 후자에 속했다.
“아마 바다가 만들어진 것을 알아차렸다면 벌써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파랑아.”
파랑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말했다.
“왕좌에 앉으렴. 그리고 너는 부디 약한 것들을 지켜 주는 왕이 되어 주면 좋겠구나.”
그땐 귀찮긴 해도 저도 용이라,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니 강한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흥미가 생겼었다.
“그래 줄 거지?”
“…싫어.”
하지만 지금, 이 꿈에서는 아니다. 파랑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손도 뿌리쳤다.
“파랑아.”
“나 안 할래.”
엄마. 그때 내가 왕성으로 찾아갔을 때 이미 왕은 도망친 뒤였어. 그리고 그 왕이….
저보다 강한 힘을 가진 용을 낳았다는 이유로 엄마를 찾아 죽였어. 내가 결국 그의 심장을 터트렸지만 이미 엄마는 죽어 버린 뒤였다고.
하고 싶은 말이 이 바닷물처럼 무수히 많았지만 마음대로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파랑의 생각이 울부짖는 동안 어머니는 다 안다는 듯 웃으며 재차 파랑의 손을 잡았다.
“이 약한 어미의 몸에서 너처럼 강한 용이 태어났다는 데에 엄마는 감사해. 이렇게 드넓은 바다를 내 딸이 만들었다는 것도. 엄마는 비록 약한 용이었지만 너는 꼭 왕이 되어 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아니, 싫어. 엄마랑 헤어지기 싫어! 부단히도 외쳤지만 소리는 결코 바깥으로 내어지지 않았다.
“너의 강함은 약한 것들을 돌보기 위해 특별히 주어진 거라 생각하고 꼭… 작고 약한 것들을 지켜 주렴.”
왜냐하면 이곳은 기억이 멋대로 만들어 낸 꿈이었으니까.
“그렇게, 해 줄 거지?”
파랑은 과거의 자신이 가만 고개를 끄덕이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파랑은 어머니의 원대로 그 어떤 왕보다 강력한 왕이 되었지만,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준 어머니를 잃었다.
전대 왕인 아버지에 의해서.
***
익숙한 소리에 눈을 뜬 파랑은 그것이 곧 물소리임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살 것 같더라니, 몸이 물 안에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흐르는 물결을 느꼈다.
깨끗하긴 하지만 그저 그런 물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힘이 있다면 이런 물도 제 수족처럼 다룰 텐데, 지금은 물과 연결된 실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쉽지 않았다.
애초에 물이라도 편히 쓸 수 있었다면 이렇게 다칠 일도 없었을 터라 울적해졌다.
“깨어난 것이냐?”
“뭐야?”
등 뒤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온기가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도겸이 뒤에서 저를 안고 있었다. 낭패감이 밀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피를 많이 흘리고 난 뒤라 기척을 읽는 감각까지 무뎌져 있었다. 파랑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이리도 가벼운데 어찌 가라앉아 버리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너 설마, 내가 질식이라도 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기가 찼다.
“바보야?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나는….”
“사람이 아닌 용이라는 것, 안다.”
파랑은 벌떡 일어나 도겸에게서 거리를 두며 경계했다.
“어떻게 알았어?”
용이라는 존재가 이 땅에도 있느냐 연달아 물으려다 말았다. 아까 만난 노인이 과거에 승천한 용에 대해 이야기했지 않나. 제가 살던 세계가 이 땅에서는 ‘하늘’이라 불리는 모양이었다. 전혀 접점이 없는 세계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면 파랑에게 덤벼드는 용들 대부분이 다른 동물이었다가 도력을 쌓아 용이 된 경우들이었다. 주로 막 용이 되어 겨우 일구어낸 힘에 취한 어리석은 녀석들뿐이었으니.
안타깝게도 용으로 영생을 누리기도 전에 파랑에게 심장을 빼앗기는 최후를 맞이했지만 말이다.
“어젯밤 네 입으로 순순히 말해 주지 않았더냐. 내가 아는 모습과는 전혀 달라서 네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