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지 못한 산길 위를 네 개의 말발굽이 무섭게 박차며 나아갔다.
“하!”
이미 한계의 속도로 내달리는 말을 다시 한번 재촉하던 순간 바람을 이기지 못한 갓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제대로 매듭을 지어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나 돌아볼 여지는 없었다. 도겸은 말고삐를 더욱 단단히 붙잡을 뿐이었다.
“바다는 있고, 용천이야 예전에 주워들은 대로 말했어유. 백악산 뒤로 더 큰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귀한 물이라고.”
다행히 순이의 답에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늘 물의 정기에 목말라 하던 파랑이라면 반드시 샘의 근원을 찾으려 할 것이라고. 바다야 근원을 찾은 뒤에 가 보아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하얀 저고리에 푸른 치마라면… 그 아씨가 맞습니다요!”
다만 백악산이 어느 쪽인지는 모를 것이라 하니, 도겸은 반드시 파랑이 누군가에게 길을 물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파랑이 순이를 따라갔던 저자로 나간 그는 장터 초입의 아무 상인을 붙잡고 대뜸 파랑의 행방을 찾았다.
“몸길이는 대충 이쯤 되는 여인인데, 하얀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었소. 그리고 어쩌면 머리가 풀어 헤쳐져 있었을지도 모르고… 또 굉장히 피부가 희고 눈에 띄는 미인이오. 혹 이곳을 지나가는 걸 본 적 있소?”
급박한 순간 빗장뼈 부근을 가리키며 파랑의 체구를 급하게 설명하는 도겸의 머릿속엔 그 외의 인상착의를 설명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용모파기라도 그려서 가지고 나왔어야 했나 후회하던 차였다.
“소, 송구합니다, 나리! 이 구역 자릿세를 받아먹는 놈들인지라 아씨께 차마 아니 된다 말하지 못했습니다요.”
단박에 찾을 것이라 당연히 기대치 않았건만,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상전 주인이 덜덜 떠는 손으로 엽전 꾸러미를 내밀 때 도겸은 허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서안에 있던 엽전 꾸러미일 테니 말이다.
참, 통이 큰 여인이었다.
“백악산을 넘어간다고 저쪽으로 갔습니다. 삼각산으로 데려다준다고 하긴 했지만, 아마 그놈들 집합소가 백악산 서쪽 기슭에 있으니 그쪽으로 데려갔을 겁니다. 반 시진 정도 되었으니 서둘러 가면 될 겁니다요.”
사실 파랑의 괴력을 알고 있는 도겸은 거기까지 들었을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놈들, 반반한 처녀들 납치해다 약까지 먹여 가면서 아주 괴랄하게 노는, 잔혹한 놈들입니다요, 나리!”
이런 첨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안 돼. 아니 된다….”
“으아악!”
도겸이 말을 한 번 더 재촉하려던 차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발굽 소리, 간간이 지저귀는 새소리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즉시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을 땐 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인 것 같은데.”
방향을 알 수 없어 사방을 둘러보던 도겸은 그제야 돌부리로 가득한 길을 달려왔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주인을 믿고 지나치게 험한 길을 달리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안장에서 내린 도겸이 말을 다독였다.
“미안하구나.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여기서부터는 내가 찾아볼 테니….”
“악! 살려… 으악!”
환청이 아니었다. 머지않은 기슭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울리는 게 들렸다. 도겸은 말을 묶어 놓는 것도 잊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낮이어야 할 시각임에도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옅은 푸른빛을 띤 도겸의 도포 자락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갈라져 펄럭였다.
“파랑아!”
길이 나지 않은 거친 숲을 헤치고 소리를 따라 얼마나 나아갔을까. 도겸이 앞을 가로막는 마른 가지를 손으로 막 잡아 치우던 순간 그 너머에 보이는 것은 저만치 풀썩 쓰러지는 사내, 그리고 사내에 가려져 있던 작은 체구의 여인이었다.
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고요히 파랑을 내리 비추었고, 눈을 감은 그녀가 입술 사이로 내쉬는 긴 숨이 허공에 하얗게 번졌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나 싶던 그녀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눈만 들어 도겸이 서 있는 쪽을 직시했다.
“너….”
도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찰나의 순간 검게 빛나는 파랑의 눈이 마치 짐승의 그것과도 같아 보인 탓이었다. 무어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위압감에 그는 하마터면 뒷걸음질 칠 뻔했다.
홀로 대호를 마주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산새들마저 파닥거리는 소리만 남겨 두고 날아간 이후에야 도겸은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다, 죽인 것이냐?”
얼결에 마음과는 먼 말을 냈다. 다친 것이냐. 괜찮냐는 그 한마디가 먼저였어야 하거늘.
“…죽일 걸 그랬지.”
살리는 게 더 힘든데. 파랑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애석하게도 도겸이 들을 수 없는 거리였다. 도겸이 파랑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내들의 맥을 짚어 보느라 들을 겨를이 없기도 했다.
“나와 함께 가면 될 것을, 생면부지인 이들을 잘도 믿고 따라나섰구나.”
손끝만 대어도 피가 터질 것 같은 칼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몇몇 개는 누군가의 팔이며 또 다른 이의 다리에 꽂혀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이런 와중에 누구 하나 목숨이 끊어진 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다행이었다. 남은 생을 매일매일 고통 속에 죄를 뉘우치며 힘겹게 살았어야 할 놈들이 파랑의 손에 너무 편하게 죽어선 안 됐으니까.
“너를 돌본 나는 믿지 못하고 이들을 믿은 것이냐?”
“난 아무도 믿지 않아.”
어찌나 단호한지, 도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럼….”
단 사흘을 함께했을 뿐이니 당연히 믿기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왈패들과 같은 취급은 너무하지 않나. 도겸은 울컥하여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찌 내 곁에 머무른 것이냐? 약조 따윈 내 집에 들어온 첫날 어겼으면서 말이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파랑이 ‘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도겸이 어떤 경로로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너는 나를 의심했지. 나는 그 의심을 원동력 삼아 너를 이용한 거야. 돌아가야 하니까.”
“…….”
“사흘을 기다리겠다 정한 것은 너였지. 나야 어차피 이 땅의 인간들 누구도 죽일 생각이 없으니 네 동의를 구하겠다며 불필요하게 언쟁하고 싶지 않아 그 밤에 바로 부용지에 갔던 거고.”
파랑이 무심히 설명했지만 도겸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럼 길을 찾는 대로 떠날 생각이었느냐?”
“당연히.”
일말의 여유도 두지 않고 즉시 답한 파랑이 친절하게 설명도 덧붙였다.
“그 편이 너나 나나 서로 수고를 더는 일, 아니야?”
“…아무에게 말도 않고, 영영 떠날 마음이었다고?”
“바다가 있다고 했으니 더 뭍에 있을 필요는 없지.”
도겸은 확실히 깨달았다. 파랑은 사람과 달리 감정이 없는 냉혹한 존재라는 것을.
단 며칠이라도 의지하고 따른 이들을 어찌 이렇게 매정히 버린단 말인가.
“틀렸다. 수고를 덜기 위함이었다면 처음부터 내게 이미 부용지에 다녀왔노라, 솔직히 털어놓고 의논했어야지.”
도겸은 파랑에게 다가가며 쏘아붙였다.
“그럼 나는 네가 약조를 어겼을지언정 주군을 해할 목적이 아님을 확실히 납득하고 널 도왔을 테니까!”
파랑이 혼자서 휘두를 수 있는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엿본 뒤였다. 제 도발이 그녀의 화를 돋우어 목숨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도겸은 멈추지 않았다.
“너는 내게 제대로 도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왜 나를 써먹지 않고 이리 바보 같은 짓을 하였어, 왜!”
제가 파랑을 향해 신뢰를 쌓는 동안 정작 파랑은 저를 전혀 믿지 않고 있었음을 알게 된 탓일까. 그에 자존심이 상해서?
“아니.”
마음에 솟은 의문에 대한 대답은 파랑에게서 나왔다.
“너에게 너무 의지하게 될까 봐. 난 그걸 경계한 거야.”
“…뭐?”
“네가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간 영영 돌아가지 못할까 봐.”
파랑은 도겸을 보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쓰러져 있는 왈패들을 둘러보며 솔직한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것들은 내가 이미 너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증거지. 잠깐 사이에 네가 주는 막연한 호의에 익숙해져 버리는 바람에 다른 인간들도… 똑같을 줄 알았거든. 살기 넘치는 무기들마저 네 말대로 지키기 위한 용도라 생각할 만큼.”
“…….”
“웃기는 일이야. 지키기 위한 무기가 있다는 건 정말 나쁘게 휘두르는 자도 있다는 건데.”
파랑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잠시 어리다,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안일함은 다시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내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혼자… 찾은 거야.”
거기까지 말하던 파랑이 갑자기 힘없이 나무에 기대어 무너져 내렸다. 도겸의 눈이 커졌다.
“너…!”
사내놈들이 어떻게 손을 대려 했는지 옷고름이 험하게 뜯겨 나간 채였고, 치맛자락은 칼날에 닿기라도 했는지 이곳저곳이 찢겨 있었다.
무엇보다, 하얀 손이 붙잡고 있는 배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이냐? 몸이 상한 것이냐? 얼마나!”
한달음에 다가간 도겸이 파랑을 살폈다. 약을 쓰는 놈들이라더니 정말 약을 먹이고 겁탈이라도 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보나 마나 당연히 한둘은 파랑에게 제압당했을 테고, 저마다 살기 그득한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겠지. 시간 차나 거리를 따져보면 파랑은 약에 당하고도 한동안은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의 칼에 찔린 것이다.
“어지럽지만 않았어도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이걸로 누르거라.”
손수건을 꺼낸 도겸이 상처 부위에 대 주었다.
“딱… 한 모금이었는데.”
“이야기는 다음에. 우선 피를 멈추어야 해. 이건 네가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 해도 의원에게 보여야 한다.”
파랑이 허락하기도 전에 도겸은 이미 작은 몸을 안고 말을 내버려 둔 쪽으로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