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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23)화 (189/197)

“아니, 갈 길 바쁜 아씨는 왜 쳐 부르고 지랄이야!”

하지만 눈치 빠른 왈패 놈이 좌판의 받침을 발로 퍽퍽 차 무너트렸다. 기우뚱 무너지는 상을 간신히 붙잡은 엄 씨에게 왈패 놈이 아주 나직이 말했다.

“앞으로 자릿세 두 배로 내고 싶어? 아니면, 세 배?”

“왜 불렀는데?”

협박을 듣지 못했을 여인이 엄 씨를 바라보았다. 주변 상인들이며 저자에 나온 이들 모두가 눈치를 챘는데, 가장 중요한 여인 혼자 몰랐다. 답답한 엄 씨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아닙니다요!”

소리는 질렀다. 다만 중요한 알맹이는 알려 주지 못했다. 엄 씨는 기어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저, 그, 조, 조, 조심히 가시라고….”

“그래… 아, 맞다.”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여인이 엽전 꾸러미를 꺼내어 다 무너져 가는 좌판에 올려놓았다. 엄 씨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요?”

“이 인간이 대가를 안 받는다니까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무겁기만 하고.”

돈이 필요 없다니. 엄 씨가 벙쪄 버린 사이 돌아선 여인이 가볍게 걸어 나갔다. 다만 뒤를 따라가려던 왈패 놈이 괜히 좌판을 한 번 더 발로 툭 치며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그 돈으로 자릿세 내면 되겠다. 그치?”

언젠가는 빼앗겠다는 말을 남긴 왈패 놈이 싱글벙글해서는 여인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상인은 조심스레 엽전 꾸러미를 들어보았다. 대충 보기에도 쌀 몇 섬은 족히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금을 보고도 전연 기쁘지가 않았다. 마치 사람을 팔아넘긴 기분이었으니까.

엄 씨는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온 집 안을 뒤져도 파랑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광에도 안 계셔유. 아씨 대체 어디로 가신거래유우….”

파랑을 단속하기로 한 순이가 벌써 눈물 젖은 얼굴로 우물쭈물 도겸에게 고했다.

“송구합니다. 아씨가 주무신다면 조용하게 해 드리라고, 안채 쪽으론 얼씬도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행여 순이가 크게 혼날까 저어되었는지 행랑아범이 순이의 앞에 나섰다. 도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더는 찾지 않아도 된다.”

집 안을 돌아다니다 사랑채까지 온 도겸은 그제야 파랑이 집을 나갔음을 인정해야 했다. 보란 듯이 열려 있는 제 방 서안의 서랍, 그 안에 있어야 할 엽전 뭉치가 사라져 있었기에.

“부러 꼬리를 남긴 것을 보니, 구태여 집 안을 뒤질 수고를 줄여 주고 싶었던 듯하구나.”

손끝으로 서안 위를 훑은 그는 기가 찬 나머지 작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일부러 연적에 있던 물을 쏟아 범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게끔 해 두었으니 모를 수가 있나.

“다들 내보내서 찾아보라 할까요? 주변 길도 제대로 모르실 텐데 어디로 가셨을는지.”

“잠시만.”

도겸은 연적을 제자리에 세워 두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용지를 비롯해 후원에 있는 모든 못에 몰래 잠입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으니 집으로 돌아왔을 터. 그렇다면 그 다음에 그녀가 취할 행동을 예상해 봐야 했다.

“나갔다는 사실은 밝히지만, 되도록 늦게 발견되길 원했다는 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몰래 다녀오고자 하는 곳이 있었다면 전처럼 조용히 다녀와서 시치미를 뚝 떼면 그만일 테니.

하지만 어제는 하루 종일 집에 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늦잠을 자지 않았던가. 대체 갑자기 떠날 곳이 생길 틈이나 있었느냔 말이다.

“어디 간다는 말은 없었느냐? 혹은 뭔가를 궁금해한 게 있다거나.”

갑자기 묻는 말에 놀란 순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글쎄유….”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다.”

“그래. 티끌만 한 거라도 나리께 말씀드려 봐, 어서!”

행랑아범이 순이를 차분하게 토닥이자 우물쭈물하던 순이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아! 용천! 안마당에 있는 샘에 대해 물어보셨어유!”

“샘?”

“저건 어디서 흘러내려 오는 거냐고요. 아, 그 전에 여기도 바다가 있냐고 먼저 물어보시던데유.”

애매했다. 샘의 상류와 하류를 동시에 찾았다니. 혹시 도겸이 추적할 경우를 대비해 선택지를 넓힌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닐 듯싶었다. 파랑이 저를 두려워하여 따돌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튀어 오르듯 서둘러 몸을 일으킨 도겸이 다급히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찌 답해 주었느냐?”

***

“너무 느려.”

방향만 물어볼 걸 그랬다. 인간들과 함께 가려니 너무 오래 걸리고 속도도 쳐졌다. 어쩐지 사위가 어두워지는 것 같아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빽빽한 나무들이 하늘을 완전히 가려 빛 한 점 들기도 버거워 보였다.

가뜩이나 사내들에게서 느껴지는 살기가 역겨워 구역질이 나는 터라 파랑은 슬슬 혼자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이 산에도 물은 흘렀다. 그러나 파랑이 원하는 물의 기운은 아직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워지고 있다면 찾고 있는 물의 정기가 커져야 할 텐데 어째선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대체 왜 최도겸의 집에 있는 그 작은 샘이 가장 나은지 모르겠다. 갈수록 초조한 파랑은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이고, 아씨. 가녀린 몸으로 걷기엔 산이 너무 험하지? 여기, 이거 좀 들어 보시오. 도움이 될 거요.”

파랑에게 안내를 자처한 이가 다가와 수통을 내밀었다. 이름은 천덕이라 했던가. 마침 갈증이 나던 차라 대수롭지 않게 받은 파랑은 뚜껑을 열기도 전에 그 속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꼈다.

술이었다.

“도움이 된다며, 왜 마시면 더 갈증만 나는 걸 주는 거야?”

밖에 나와 보니 최도겸의 집 사정이 생각보다 훨씬 나은 곳임을 알게 됐다. 그의 집에서 쓰던 깨끗한 주전자가 그리워질 정도로 수통의 상태가 더럽기도 했다.

“우리 같은 놈들이 이렇게 산도 타고 물도 건너다보면 물보다는 술이 더 최고지. 아, 아씨가 쓰기엔 수통이 너무 더러운가?”

천덕이 넉살 좋게 허허 웃으며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수통을 벅벅 닦아 댔다. 파랑은 가능하면 주변의 물을 끌어다 마시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혹시 몰라 힘을 아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자, 한 모금 쭉 들이켜 보시게. 이게 보기엔 이래도 아주 귀한 술이라 나도 아껴 먹는 거라고?”

파랑은 잠시 고민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게 사실이었다. 아껴 먹는 걸 낯선 이에게 나눠 주는 인간들은 욕심도 없는 것인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도 들었다.

돌아가면 다신 마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한 모금만 마실까. 파랑이 술을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최도겸의 집에서 마셨던 술보다 훨씬 달았다.

“…술에 당과라도 빠트린 것 같네.”

그냥 순이가 좋아하는 과자를 먹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던 것이, 술에 빠트리니 그 맛이 새로웠다. 달고 쌉싸름한 맛에 뭔가 가려진 것 같기도 한데….

“어떻소? 물보다 훨씬 낫지?”

최도겸의 집에서 먹었던 술보다 뭔가 복잡다단한 맛에 천천히 음미하느라 파랑은 보지 못했다.

천덕의 미소가 묘하게 짙어졌음을.

“어쨌든 술도 근본은 물에서 출발하는 건데 감히 물과 비교를 해?”

파랑은 마시던 술을 천덕에게 대충 넘겨주었다.

“너나 먹어.”

“나는 안 먹지.”

“…방금 아껴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렇게 말했나?”

수통을 가볍게 던졌다 받은 천덕이 씨익 웃었다.

“잘못 말했네. 아껴 먹는 게 아니라 아껴 ‘먹인’ 건데.”

“뭐?”

순간 파랑은 눈앞의 하나의 시야가 둘로 갈라지는, 다소 생경한 이질감을 맛보았다. 이게 뭐지 싶을 즈음엔 셋으로, 넷으로 갈라졌다.

“얼마나 곱게 자라셨으면 이리도 사람을 쉽게 믿나. 응?”

시야를 바로 하려 눈에 힘을 주던 차, 천덕이 파랑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반사적으로 그 팔을 반대로 꺾어 밀치자 주변의 사내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살기 어린 것들이 엄습하니 파랑은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이년이, 겁도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 했더니 보기보다 힘은 있는 모양이구나?”

“…이년?”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뜻이 통하지 않아도 어감의 차이는 전해지는 법이다. 기분이 나빴다.

“이봐 아가씨, 삼각산 대신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는 것이니 잠자코 있으라고.”

“놔.”

직전처럼 꺾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팔을 뽑아내려 했다. 그런데 몸 안에서 무슨 사달이 난 것인지 힘이 쭉 빠져나갔다.

“사람을 해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다신 못 보더라도 최도겸과의 약속은 웬만하면 지키고 싶었다. 지켜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아무래도 너희들의 몸속에 있는 물은 주인을 잘못 만난 것 같구나.”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선 파랑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엄청 독한 거 아니야? 진즉 기절했어야 하는데.”

“뭐 하는 거야? 계집 하나 못 잡고! 재미 보려면 서두르라고!”

바닥에 널브러진 천덕이 소리쳤다. 그러곤 간신히 눈꺼풀을 들고 있는 파랑을 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봐, 철부지 아가씨, 내가 나으리들 보시는 책 속에도 없는 진리 하나 가르쳐 드릴까?”

물을 끌어모으려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파랑은 몸 안의 물을 다스리는 데에 집중했다.

“이년아, 내 말을 잘 들어야지. 그래야 목숨을 붙여 줄까, 말까 고민을 할 것 아니야!”

눈을 감으려던 차,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챈 천덕이 귓가에 속삭였다.

“잘 들어.”

더러운 손가락이 파랑의 뺨을 스쳐 옷고름으로 내려갔다. 매듭 자체가 뜯겨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거야.”

킬킬거리는 사내들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에 머리가 왕왕 울려 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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