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22)화 (188/197)

엄 씨가 막 노인의 몸에 손을 대려던 차, 매섭게 쳐 내는 손길과 함께 쩌렁한 목소리가 무섭게 진동했다. 복작복작하던 저잣거리 주변이 일순 싸하게 가라앉을 정도였다.

물론 소음의 원인이 노파라는 것을 알아차린 주변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제 갈 길을 가면서 금방 분위기가 살아났지만.

“물이라니.”

그러나 엄 씨가 극진히 대하는 아씨는 여전히 노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거 놓고 설명해.”

“어째, 할망구 좀 떼어 드려?”

가녀린 팔목을 붙들린 아씨가 빼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보였다. 그러나 도와주려는 엄 씨의 도움은 날카롭게 거절당했다.

“됐어.”

“쯧쯧, 고작 이 몸의 힘도 이기질 못하다니… 에구머니나!”

혀를 차던 노파가 까무러치듯 물러났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여인이 끼고 있는 반지를 가리켰다.

“그 반지는… 50년 전에 우리 신 엄마가 승천하는 용의 입에 넣어 하늘에 보낸 것인데!”

아무래도 노망이 난 게 분명했다. 용이라니, 임금님 용포의 흉배에나 새겨져 있는 환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여인이 낀 반지도 엄 씨가 보기엔 흔한 은가락지일 뿐이었다. 듣고 볼수록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여인은 아연한 낯으로 더없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하늘? 설마 그 화룡 말하는 건가.”

“그 신물 때문이구나! 신물 때문이야!”

“이게 신물이야?”

대화를 나누는 여인과 노파를 지켜보던 엄 씨는 곧 고개를 내저으며 좌판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을 미인이었건만 노파처럼 반쯤 정신이 나간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파와 저리 대화가 순탄히 될 리가 있나.

“주작의 신물이다. 신물이 전부 모여 균형을 이루지 않는 한 인간의 힘으로는 뜨거운 화기를 다스릴 수 없지. 자칫 아무나 손가락에 끼웠다간…!”

하얗게 질린 노파가 탁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숨넘어갈 듯이 꺽꺽거렸다.

“순식간에 모든 생기를 빨리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시종일관 태연하던 여인의 눈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이걸 빼낼 방법은 없어?”

아무래도 마수걸이는 공 친 것 같았다. 엄 씨는 혀를 끌끌 차곤 허무맹랑한 대화를 흘려들으며 좌판 위에 물건 정리나 마저 해나갔다.

“그 어여쁜 손가락을 잘라내도 소용없을 것이다. 빼앗긴 힘을 되찾기도 전에 버리는 것과 같으니!”

“…그건 알고 있어.”

“물의 힘으로도 신물을 통제할 수 없다면 답은 하나지. 암, 그렇고말고.”

누군가 옆에서 읊어 주는 것을 듣는 이처럼 허공을 보며 낄낄 웃던 노파가 돌연 정색했다.

“강한 불은 물의 힘을 끊임없이 말릴 뿐이니 불을 달래야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사로잡아야 해!”

“불을 무슨 수로 사로잡아? 난 이미 그 녀석의 심장을 깨트렸는데.”

“그 용은 신물이 만족할 만한 이가 아니었던 게지. 신물의 선택을 받았다면 힘을 쓸 수 있었을 게다.”

“그럼 주작이 선택한 이가 누군데?”

노파가 다시금 두 손으로 여인을 붙잡고 늘어졌다.

“메마른 대지에 봄을 불러오는 자여, 약속부터 하여라. 이 마른 땅에 물을 주겠다고!”

점점 알 수 없는 대화뿐이었다. 듣다 듣다 별 희한한 대화에 기가 질린 엄 씨가 두 사람을 막 쫓아내려던 차였다.

“계속 듣자 하니… 거 장사 방해 말고…!”

“끼어들지 마.”

대체 작은 기척을 어찌 알아차렸는지 엄 씨 쪽으로 홱 눈을 돌린 여인이 나직이 명령했다. 엄 씨는 순간 동아줄에 칭칭 감긴 사람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가까스로 고개만 끄덕였다.

엄 씨의 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여인은 다시 노파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능했으면 벌써 이 땅을 수몰시키고도 남았어. 그래서 불의 소원이란 건 어떻게 들어줘야 하는 거야?”

“불은 말이지….”

노인의 하얀 눈이 또다시 해반닥 댔다.

“할머니!”

그때 엄 씨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혼자서는 절대 저자에 나가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노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으러 나온 것인지 손녀가 할머니를 여인에게서 떼어 냈다.

“아이고, 송구합니다. 우리 고모할머니가 매병(치매)을 앓고 계셔요. 아씨, 어디 상한 곳은 없으십니까?”

“안 돼. 계속 말해!”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닌 손녀의 사죄가 이어졌지만 여인은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노파를 붙잡고 캐물었다.

“말해. 약속했으면 지켜!”

“으응? 어머나, 참으로 예쁜 계집이구나. 나와 같이 꽃놀이 가지 않으련?”

그러나 노파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헤실거리며 정신을 놓은 매병 환자로 돌아가 있을 뿐이었다.

“…무슨 소리야. 비 내려 준다고 약속하면 알려 준다고 했잖아!”

“에구머니나! 불은 무서워, 불은 뜨겁다구!”

“병자라고 했잖아요. 이것 놓으셔요!”

기절할 듯이 발작하며 주저앉는 노파를 끌어안으며 손녀가 큰 소리로 여인을 물렸다. 저런 치매 환자는 처음 보는 것인지 여인이 황망한 표정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우리 할머니는 매병 환자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신 분이라니까요?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몰라도 귀담아듣지는 마셔요.”

“안 돼. 난 들어야 돼. 아직 중요한 이야기는 못 들었다고!”

여인이 손을 뻗으려 하자 기겁한 노인이 손녀의 등 뒤에 숨어 벌벌 떨어 댔다.

“무서워! 무서워! 집에 갈래! 무서워! 잡아먹힐 거야! 우리 엄마처럼 잡아먹힐 거야!”

“제정신이 아닌 사람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는다는 거예요!”

결국 노파를 부축한 손녀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아마도 매병이 뭔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는 듯하여 엄 씨가 넌지시 설명했다.

“거 매병이란 게 원래 정신이 잠시 귀가했다가도 냅다 가출해 버리는 병이라 저리 오락가락한답디다. 대체 무슨 대화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쫓아간들 제대로 된 답은 못 들을 거요.”

“…….”

다행히 엄 씨의 말은 이해했는지 여인이 노파를 따라가거나 난장을 부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가만 서서 끼고 있는 은가락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웃기는 소리. 내가 더 강해. 불 따위한테 안 진다고.”

의기라도 다지듯 작게 중얼거린 여인이 이번엔 엄 씨에게 물었다.

“물이 흐르는 산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

“예?”

“백악산(현 북악산) 너머 커다란 산으로 가면 된다고 하던데.”

“아, 삼각산(현 북한산) 말씀하시는 건가?”

“삼각산? 어느 쪽이야?”

“그야 저쪽….”

“이리 고운 아가씨가 삼각산엔 무슨 일로?”

막 방향을 가리키려던 차, 엄 씨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웬 사내가 끼어들었다. 나름대로 기골이 좋다는 엄 씨를 단박에 짓누를 듯한 거구를 가진 왈패였다.

“볼일이 있어. 가장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듣기로는 거기가 삼각산이래. 맞아?”

왈패를 보고 벌써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 노파에게 붙잡혀 휘청하던 가녀린 이가 기백만 좋은 모양이었다. 엄 씨는 어쩔 줄을 모르고 이쪽저쪽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아이고, 아가씨가 제대로 아시는구만!”

엄 씨의 어깨를 부술 듯이 두드린 사내가 누런 이를 보이며 웃었다.

“이 사람아! 아씨가 삼각산을 찾으시면 당장 나를 불렀어야지!”

애써 정리해 놓은 물건 위로 침이 튀어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 귀를 막는 것이 우선일 만큼 우렁찬 육성이었다. 마찬가지였는지 여인의 고운 미간이 설핏 구겨지는 게 보였다.

그러나 여인을 구할 능력이 없는 엄 씨는 잔뜩 주눅이 든 채 겨우 대꾸했다.

“아, 예… 무어, 그렇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요.”

“그래서.”

눈치라도 빨랐다면 도망치기엔 늦지 않았을 텐데도 여인은 우뚝 서서 원하는 정보를 요구했다.

“거기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려? 당장 가고 싶은데.”

이쯤 되니 여인은 기백이 좋다기보다는 많이 모자란 사람인 것 같았다. 엄 씨는 아무래도 삼신할매가 여인을 점지할 적에 황홀한 외모만을 주고 미처 정신머리를 주는 건 잊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고! 이거 운명인가? 마침 우리 상단도 삼각산으로 출발하려던 차였는데 말이지!”

내뱉는 숨결마다 퀴퀴한 냄새를 뿜어 대는 놈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지름길을 알고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실까? 무어, 우리랑 동행하시면 호위도 따로 필요 없을 테니 말이야.”

왈패는 아씨가 운이 좋다며 허풍을 떨어 댔다. 놈이 껄껄 웃으며 어딘가로 눈짓하는 와중에 여인이 엄 씨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 사람 말이 맞아?”

“예?”

여인을 구할 마지막 기회였다. 엄 씨는 부디 여인이 제 입이 아니라 눈을 보고 답을 알아차려 주길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빛을 전달하기엔 눈구멍이 지나치게 작게 뚫린지라.

그리고 등을 쿡 찌르는 것이 뾰족하고 딱딱한, 칼집인지라.

“마, 맞습니다요! 아무래도 저 같은 붙박이 상인보다야 이, 이분이 더 잘 아시겠지요.”

“그래?”

엄 씨는 도망치라 말해 줄 수 없었고, 여인은 엄 씨의 작은 눈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언제 출발해? 난 빨리 가야 하는데.”

“좋소! 서두릅시다. 내 특별히 아씨에게서는 아무 삯도 받지 않으리다.”

“삯? 거기 가려면 삯이라는 게 있어야 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렇지, 아씨는 그냥 편안하게! 빈손으로 가볍게 가도 된다는 거지!”

“아아… 그래?”

그렇게 이름 모를 미호한 여인과 이 근방에서 모르는 이 없다는, 왈패 중 가장 음험하고 잔혹스럽기로 소문난 사내가 함께 자리를 뜨려 했다. 엄 씨는 발을 동동 굴렀다. 가뜩이나 모자란 여인이 화를 입을 게 뻔하다 보니 걱정이 됐다.

“아, 아씨!”

다행히 작게 불렀음에도 용케 여인이 돌아섰다. 깨끗한 물에 씻어 낸 듯 맑은 눈빛이 엄 씨를 보며 용건을 종용했다. 그 투명한 눈을 보는 엄 씨의 가슴은 죄책감으로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저기, 저어….”

말해야 한다. 저 왈패 놈을 따라갔다간 길 삯을 내지 않는 대신에 정절을, 나아가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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