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세자가 주강에 들 시간이었다. 도겸은 알현을 마치면서도 파랑에 대해서는 조금 더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네 충정을 의심하여 낸 말이 아니다. 무리하지는 말거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언의 말이 맞았다. 도겸은 순순히 인정하며 몸을 일으켰다.
“맞습니다. 잊지 않겠나이다.”
예를 갖춰 절을 한 뒤 세자가 공부하던 성정각을 나선 도겸은 어찌 규장각까지 돌아갔는지도 몰랐다.
파랑.
파랑.
그녀가 부디 살던 곳으로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랐던 마음에, 균열이 생긴 탓이었다.
***
“아이고오, 봄엔 얼음 녹아 진창이고, 여름엔 장대비에 이파리 떨어져 꽃 떨어져, 가을엔 낙엽 떨어져, 겨울엔 눈 내려. 한 철이라도 좀 마당 안 쓸면 어디가 덧나남. 이놈의 계절은 네 번이나 피고 지고. 노상 봄이면 을매나 좋아유?”
너른 마당 이곳저곳을 쓸어 내던 순이가 기어이 툴툴댔다. 그것을 들은 남산댁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담뱃대를 든 남산댁이 여지없이 아이를 타박했다.
“쓸데없는 소리. 네년 주둥이로 들어가는 곡식이 가을에나 나는데 매일이 봄이면, 평생 굶겠다는 거냐?”
“아주매도 참,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니겄어유?”
“매일 진창에 살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저것이. 비질이나 제대로 해!”
“치이… 허고 있다니께유.”
대청 기둥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파랑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파랑이 구경을 하든 말든 노동하는 여인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계절이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배워야지. 철마다 나는 채소며 과일이며, 산에 들에 새로이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은 또 어떻고?”
“허긴, 지는 여름 수박이 젤루 좋구먼유. 시원한 샘에 담갔다 꺼낸 것을 쩍 하구 쪼개면 그 소리부터 을매나 달고 맛나게유?”
계절. 이곳의 계절엔 사람의 힘이 닿을 수 없는 모양이지만 그녀가 살던 곳의 계절은 지배하는 자의 것이었다.
수천 년간 파랑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온 세상이 푸른 물빛인 건 당연했다. 날씨조차도 그녀의 기분에 따라 눈이나 비가 내리거나, 내리지 않거나였다.
용족의 특성상 무리 지어 살지 않으니 하늘과 날씨가 뭐 얼마나 대수겠느냐만 지배욕이 강한 용에겐 의미가 남달랐다. 모두가 자신의 색을 하늘에 덧입히고 싶어 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싸움이 빚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곳은 어떻게 되었을까. 왕이 사라진 것을 안 용들이 왕좌를 두고 싸우다 폐허가 된 건 아닐까? 그럼 물은? 성체로 자라나는 순간 폭발처럼 솟아오른 제 바다는….
“…자고 싶어.”
파랑은 살아 숨 쉬며 우울할 때마다 저를 위로해 주던 그 찬란한 물방울들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깊은 잠을 잘 수 있던 곳이라 그리움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힘없는 시선이 문득 앞마당의 샘에 가 닿았다.
“저 물은 그나마 좀 다르긴….”
느낌이 다르다 생각하던 파랑이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상해. 이 샘의 물은 다른 곳과 달라. 약하게나마 정기도 취할 수 있고… 이렇게 운용도 되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기억 외엔 별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 작은 기억 속 파랑은 손바닥에서 솟아나는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
아마도 마치 도려낸 듯 떠오르지 않던 어젯밤 기억의 일부인 것 같았다. 잠시 미간을 구기며 집중하던 파랑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술이란 건 마실 때만 좋은 거였어.”
마시는데 오히려 갈증이 나는 물이라니. 앞으론 적당히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게 문제였다.
독이라면 바로 몸의 수분과 분리해 냈겠지만 술은 마실수록 긴장이 풀리고 예민한 신경이 흐물흐물 녹아드는 정도라 억지로 빼낼 생각을 못 했다.
정확히는 기분이 붕붕 떠올라서 그게 독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상당히 위험한 물이었다. 물이라고 다 순한 게 아님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뭐야.”
무심코 생각하던 파랑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다음이라니.”
다음은 없다. 목표는 하나, 기생충 같은 반지를 빼낼 방법을 찾고 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순이.”
“부르셨어유?”
마침 마당 청소를 마무리한 순이가 빗자루를 들고 다가왔다.
“이곳에도 바다가 있어?”
흐르는 물이 있다면 어디선가는 반드시 모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메마른 곳이라 의심스러웠다.
“바다유? 아씨 무슨 산에서 살다 오셨대유? 당연히 있쥬.”
부용지에 갔던 날 마주친 모든 물에 들어가 봤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물이 흘러 이루는 바다라 하여도 딱히 다를 건 없지 않을까. 파랑은 그나마 운용이 되는 작은 못을 가리켰다.
“그럼 저 물은 어디서 내려오는 거야?”
“어? 아시네유. 이 집을 짓기 전부터 뚫려 있던 샘이라 주변 우물이 마르면 주인 나리께서 대문을 열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헌테도 물을 떠 갈 수 있게 해 주시거든유. 그러믄 하나같이 입 모아서 허는 말이 우리 집 물맛이 아주 그냥….”
“그러니까 어디서 내려오는 거냐고.”
“그야….”
가장 쉬운 방법은 샘으로 직접 들어가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지만 입구가 너무 좁았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정기가 있는 물이라면 아무리 땅속으로 흐른들 땅 위를 걸어도 느껴져야 하는데….
순이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은 파랑이 머릿속에 잘 새겨 넣으며 바람 잡듯 일러두었다.
“나는 방에서 계속 잘 거니까 부르지 마. 식사도, 간식도 필요 없어.”
“아, 어쩐지 어제 광을 탈탈 털어 술을 자셨다더니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 뭐, 그리하셔유.”
새침하게 눈을 흘긴 순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마당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파랑은 아무도 없는 마당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 시선을 하늘로 끌어 올렸다.
“…방법이 없을 리가 없어.”
정기가 많은 물이 있다면 어떻게든 힘을 끌어다 반지를 끊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파랑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
“나리, 벌써 퇴궐하셨습니까?”
요즘 들어 영 불안해하는 말을 돌보느라 오전 내내 마구간에 있던 행랑아범이 깜짝 놀라 하늘을 살폈다. 해는 아직 높이 걸려 한창 기세등등한 시각이었다.
“잠시 들렀네.”
“두고 가신 것이 있었다면 사람을 보내시지 않고요.”
“그 두고 간 게 사람이라.”
“사람이요? …아.”
뒤늦게 알아차린 행랑아범이 왠지 모르게 다 안다는 눈을 하며 씨익 웃었다. 설마 어젯밤 파랑을 안고 있는 것을 들켰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도겸이 물었다.
“안채에 있나?”
“예. 어제 술을 많이 드셔선지 아까 밖에 나와 계시다 주무신다며 도로 들어가셨죠.”
“다시 잔다고?”
믿을 뻔하였던 파랑에게 불신이 짙어진 도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그 뒤로 안채에 들어가 본 사람이 있었나?”
“아니요. 식사도, 간식도 필요 없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다기에….”
“안 돼.”
“예?”
안마당으로 향하는 도겸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행랑아범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도겸의 큰 보폭을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나리, 샘은 왜….”
안채로 가는가 싶던 주인이 느닷없이 몸을 숙여 샘을 살피기에 행여나 도포가 젖을까 행랑아범이 곁에서 옷깃을 잡아 주었다. 도겸은 옷이 젖든 말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없다. 그저 기우이길 바라며 이번엔 거침없이 안채 대청으로 올라가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나리…!”
처자가 머무는 방문을 거침없이 여는 주인의 행동에 행랑아범이 다급히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
“아니, 분명히 주무신다고… 하였는데.”
직감이 맞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
“궁금한 게 있는데.”
“예?”
정신없이 물건을 정리하던 상인 엄 씨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전 바닥에서 구른 지 십수 년 동안 본 여인들 중 가장 수려한 여인이 서 있기 때문이다.
“무어… 말씀이십니까요?”
엊그젠가 운종가 근처에서 상전을 꾸리고 있는 홍 씨가 공주 아기씨를 뵈었네, 어쩌네 호들갑을 떨었던 게 떠올랐다.
그놈은 공주의 옥안이 조선을 뒤흔들었던 황진이보다 나을 것이라 장담했지만 아마 그놈도 이 여인을 보면 생각을 고쳐먹으리라. 엄 씨는 더 확실히 장담할 수 있었다.
“말씀만 하십쇼, 아씨.”
마수걸이를 잘해야 그날 장사의 운이 트인다지만 왠지 이 아기씨에게는 물건을 헐값의 헐값에 넘겨도 충분히 운이 트일 것만 같았다. 엄 씨가 하던 것도 멈추고 손바닥을 탁탁 털며 여인에게 집중했다.
“그러니까….”
여인의 도톰한 입술이 열리고 막 운을 떼려던 차,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왔구나!”
순간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그런 큰 소리를 내리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늙고 추레한 노파였다.
여인에게 홀린 듯 집중하고 있던 엄 씨는 난데없는 노파의 등장에 흠칫 놀랐지만, 엄 씨를 보고 있던 여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왔어, 이 마른 땅을 적셔 줄 구원이!”
“이 할망구가 장사 초장부터 재수 없게스리! 썩 안 꺼져?”
엄 씨가 팔을 휘저으며 화를 냈지만 노파의 탁한 눈은 엄 씨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오히려 여인을 놓지 않고 환희에 찬 얼굴로 재차 소리칠 뿐이었다.
“말라 죽어 가는 이 땅을 구하러 온 것이구나. 물, 물을 다오!”
“…물?”
무서울 법도 한데 여인은 꿈쩍없었다. 오히려 노파에게 조용히 되물을 뿐이었다. 엄 씨는 여인을 구해 주기 위해 좌판에서 돌아 나갔다.
“거 아씨는 신경 쓰지 마시오. 이 할망구야 근방에서 유명하거든. 옛날엔 나라를 위해서도 제사를 지낼 만큼 힘깨나 썼다던 큰 무당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신도 떠나고 정신도 떠나 버린 노인네라.”
“닥쳐라! 어느 안전이라고 뚫린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이 몸은 성수청(星宿廳, 조선 시대에 설치된 국가 공식 무속 전담 관서)의 전대 국무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