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앞줄에 선 다섯 명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큰 소음은 일지 않았다. 부싯돌 대용으로 나무 조각을 끼워둔 탓에 약하게나마 탁 소리가 날 뿐이었다.
“탕!”
격발음 대신 호흡을 맞추기 위한 병사들의 인위적인 외침이 이어졌다.
다섯 명이 먼저, 발사를 마친 이들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몸을 숙여 받침대를 만들면 그 등을 대고 조준 시간을 아낀 다음 줄의 병사들이 다음 신호에 따라 즉각 발사하였다.
마지막 후단에 있는 이들까지 발사를 마치는 동안 한 몸처럼 움직이는 병사들에게 군더더기란 없었다.
“발사!”
“탕!”
만약 실제 화약과 납탄을 넣었다면 가공할만한 굉음이 일었겠지만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잠을 아껴가며 진지하게 임하는 병사들의 높은 사기만 보아서는 이미 열다섯 발의 총알이 아니라 수천 발의 총알을 쏘아 보낸 것과 다름이 없지 않겠나.
물론 이들이 간혹 실전용 총으로 사격 연습을 하는 시기도 있었다. 바로 1년에 한두 차례 도성에서 불꽃놀이를 할 때였다.
도성 안팎의 백성들이 불꽃 소음에 정신이 없을 때를 맞추면 아무리 격발음이 커도 능히 숨길 수 있었다. 아무리 수십 번 연습을 한들 실전 한 번에 비할 바가 되지 않기에,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었다.
“다들 잘하였다. 다음 실전 훈련이 기대될 만큼.”
도겸이 즉각 만족스럽게 호평하자 총을 든 병사들이 뿌듯하게 웃었다.
“바로 다음 사병들에게 총을 넘기도록. 이렇게 한 차례 더 반복하겠다.”
“예!”
수년 동안 훈련만 하고 있음에도 병사들은 지칠 줄 몰랐다. 누구 하나 늘 미공개로만 진행되는 열악한 훈련에 불평할 법도 하건만 집에 초상이 나지 않는 한 늘 참여도 열심이었다.
후미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에게 조심스레 총을 넘긴 이들이 뒤로 물러나고 새로 총을 든 병사들은 다시 청소할 필요가 없는 연습용 총을 닦으며 발사를 준비했다.
“조준, 발사!”
“…탕!”
“다음, 발사!”
“탕!”
이들은 모르겠지만 도겸이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 사병 조직만 총 네 개가 있었다. 혹시 발각될 경우 서로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은밀하고 또 은밀하게 꾸려진 작은 조직들이었다.
각 분대마다 하나씩 있는 훈련대장만 서로의 신원을 알았고, 이렇게 훈련이 있기 전에만 정보를 교류하며 각자 휘하의 사병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훈련에 임하는 모든 사병 하나하나가 각자 비밀을 잘 지켜 주고 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기도 했다.
“잘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그리 강한 힘을 주어 화약을 다지다간 삭장이 부러지고 말 테니 유의하거라.”
“예, 나리!”
그럼에도 도겸은 심혈을 기울여 이들을 가르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양지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비단 마음속은 검은 화약처럼 새카맣게 타들어간지 오래였다. 그런 그의 어둑한 마음을 비추려는 듯 저 멀리서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자, 반복 한다. 사격 준비!”
“준비!”
새삼 병사들의 면면에 활기가 차올랐다. 마치 여기 모인 이들이 함께 밤을 쫓아내고 맞이한 아침인 양, 괜스레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
“연 이틀을 쉬었으면 그 얼굴에 기름칠이라도 하고 올 것이지, 어찌 그리 안색이 흙빛인 것이냐?”
“염려케 해 드려 송구하옵니다, 저하.”
“그런 치레를 듣자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그러는구나.”
탐탁지 않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언이 다음 순간 눈빛을 달리했다.
“…옳지! 전하께서 행궁 나가신 틈에 이번에야말로 함께 밤이슬을”
“저하.”
불경하게도 말허리를 자르고 들었으나 세자는 가볍게 웃기만 했다.
“농일세. 내 안 그래도 이제 무서워서 밤이슬은커녕 혼자 낮 이슬도 못 맞겠는걸.”
“예?”
“그… 아니야. 식기 전에 차부터 들게.”
도겸에게 차를 들라 권하며 함께 마시던 언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그렇지’ 하는 말과 함께 운을 뗐다.
“듣자 하니 규장각 부용지가 꽁꽁 얼었다지?”
“아… 예. 오늘 입궐하여 보니….”
며칠 만에 규장각으로 출근한 도겸은 부용지 앞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상한 일이지. 날이 차긴 했어도 물이 얼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게다가 쉽사리 녹지도 않는다면서?”
다른 때 같았다면 기이한 현상을 두고 놀라는 사람들과 함께 신기해하며 구경했을 것이다. 혹시 선례가 있나 책을 찾아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이 일의 인과를 알 것 같았다.
연못이 꽁꽁 언 것은 그가 조퇴한 날 밤의 일이라고 했다.
그날 밤늦게까지 초계문신들의 필답고사 문제를 출제하던 두 직제학은 부용지 근처를 산책하다 뭔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못 들은 것 같기도 하다며 아리송해 했다.
“여기 손을 담그면 다 얼려 버리는 것도 금방일 텐데. 보여 줄까?”
무엇보다 이미 샘을 얼린 전적이 있지 않나. 파랑을 만난 첫날 꼬박 밤을 지새운 탓에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깊이 잠든 게 문제였다. 혼자 두어도 얌전히 있는 줄 알았건만, 기어이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발칙하게도 이미 부용지에 다녀와 놓고 저를 떠본 것이었나.
“뿐만 아니라 후원의 다른 연못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는데 봤는가? 애련지도, 반도지도 얼어 있었지. 그나마 애련지와 반도지는 금방 녹았고 반월지는 별다른 징후가 없다고 하였는데…. 왜일까?”
아마도 부용지에서 힘을 과하게 쓴 나머지 후원 뒤쪽 출구로 향하는 동안 나머지 연못들까지 얼리기엔 기력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찻물을 내려다보는 도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엊그제 밤엔 별순라들 몇몇이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을 보았다며 보고했다더군. 오늘 수원 행차에 변고가 생길 징조라며 떠드는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던지.”
다행히 왕은 행차를 강행했다. 그리고 홀로 궁에 잠입했을 파랑은 왕을 해치지 않았다. 가장 큰 불안을 떨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저와의 약속은 깨진 탓일까, 입 안이 썼다.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마시옵고 예학에 정진하셔야 합니다.”
“쯧, 내 자네 그 소리 할 줄 알았지.”
언이 가볍게 투덜댔다. 경단을 하나 입에 넣고 씹어 삼킨 그가 다과상을 슬쩍 물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나저나 어제 해주에 다녀오겠노라 내게 연통하였잖나. 그 일은 어찌 되었나?”
“아, 그것이….”
한 가지 일에서 불안감을 살짝 낮출라치면 여지없이 다른 일이 꼬였다. 언제나 모든 상황은 제 손을 모래처럼 빠져나가 멋대로 쏟아져 내렸다.
“괜찮으니 말해 보게.”
도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함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 언이 차분하게 기다렸다. 마냥 세자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는 도겸이 별수 없이 사정을 실토했다.
“실은, 단자를 넣으려던 제 사촌 누이가 사라졌다 합니다.”
“…뭐?”
아마도 각오한 것보다 더 난감한 내용일 것이라 언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기껏해야 숙부가 거절할 것을 생각했을 터.
“사라지다니.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던가?”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저하. 지난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곧장 해주에 연통을 넣었사온데 제 누이에게 정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데 금혼령이 떨어져… 함께 야반도주를 하였다 합니다.”
면목 없는 도겸이 엎드려 사죄했다. 바닥을 짚은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송구합니다. 제대로 앞뒤 사정을 세워 놓지도 아니하고 성급히 저하께 아뢰어 혼란케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설령 정인이 있는데도 사주단자를 넣는다 하였다면… 마찬가지로 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니.”
“반드시 차선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누이를 되찾아오든, 우리 쪽에서 들일 새로운 처자를 구하든….”
거기까지 말하던 도겸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옷이라믄 뭐든 잘 어울리시는데 성질머리가 그 옷 다 찢을 것처럼 사나우니 어쩐데유.”
술에 취한 파랑을 계속 자게 내버려 두고 입궐을 준비할 때였다. 늘 파랑의 머리가 정신없이 풀려 있는 것에 대해 순이에게 정리를 부탁하니 아이가 신랄하게 파랑을 욕했었다.
“곱게 땋아 주믄 뭐 한데유? 그놈의 머리칼이 어찌나 비단결인지 암만 틀어 묶어 놔도 금방 풀어진다니께유? 꽉 묶어 주면 답답하다고 풀어 버리고… 그걸로 또 을매나 싸웠는지 몰라유.”
“고생이 많았구나. 하지만 금방 헤어지게 될지도 모르니 나중에 마음 쓰이지 않게 잘 대해 주거라.”
그때는 단순히 곧 돌아가게 될 파랑과 깊게 정이 들어 후에 순이가 마음 쓸 것만 걱정했었다.
“그래도 무어, 하나 시켜 놓으믄 기가 똥이 차게 해 놓으니께유. 처음 시킬 때 말고는 고생할 것도 없다니께유? 설거지만 안 시키면 그럭저럭 괜찮아유.”
무엇보다 순이가 그 다음에 한 말이 결정적이었다.
“참, 근디 아씨 말이어유. 글이고 뭣이고 암것두 모른다 하지 않았어유? 그러기엔 지난번 저자에 방 붙은 걸 잠깐 보고 와서는 땅바닥에 죄 그걸 쓰고 계시던데유. 지는 그게 뭔지도 몰랐는데 아자씨가 보고는 방에 나붙은 금혼령이 왜 여기 쓰여 있냐고….”
그리고 도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저하.”
“아니다.”
“예?”
운을 떼기도 전에 고개를 젓는 세자 때문에 도겸이 의아해했다.
“너의 누이를 억지로 데려온들 나는 백성들의 인연을 갈라 불행하게 만든 세자가 될 뿐이지 않느냐. 되었다. 그만두어라.”
“저하, 그것이 아니오라”
“명이니라. 너마저 나를 허수아비 세자로 볼 참이냐?”
“…송구합니다.”
아차 싶었다. 도겸은 또다시 상대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불길처럼 타오르려던 자신을 자책했다. 아무리 그것이 충성에 비롯되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앞서나간 처사일 수도 있지 않나.
“하나 소신, 저하를 지키기 위해 방법을 강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