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강해도 낯선 세상에 혼자 떨어졌다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 여인에게 너무 이 세상의 법도를 강요한 게 아닐까. 스스로 위선자라 욕했으면서도 아직 위선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겠어. 그냥 웃음이 나.”
수면에서 첨벙첨벙 뛰어 대자 물방울들이 높이 튀어 올랐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떨어졌다. 파랑은 그 가운데서 빙글빙글 돌며 또 한 번 어여쁘게도 웃었다.
그 광경이 도겸의 눈에 마치 찰나의 시간을 잡아 늘인 듯 느릿하게 스며들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도겸이 퍼뜩 깨어난 것은 물방울이 그의 뺨에 튀어 차가운 감각을 남겼을 때였다.
“춥진 않느냐?”
“전혀.”
도겸은 혹시나 싶어 파랑이 노니는 물가에 가 손을 넣어 보았다. 역시나 물은 그의 손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꿀꺽 삼켰다. 어찌나 찬지, 오래 담그지 못하고 바로 빼야 했다.
“이리 물이 차면 고뿔이 들지도 모르는데.”
저도 모르게 중얼댄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파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 것이냐?”
“이 집 사람들 죄다 칭찬하던데. 조선에 너처럼 똑똑한 이도 없을 거라고. 근데 내가 보기엔 네가 제일 모자라 보여서.”
“모, 모자라다 하였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아직도 못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난 사람이 아니라고.”
“…….”
“당연히 사람이 걸리는 병에 걸릴 리도 없지.”
“그럼 내가 널 무어라 여겨야 하는 것이냐? 구미호도 도깨비도 아니면 대관절 무엇이기에.”
직접 변하여 보여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웬만하면 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도겸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답을 졸랐다.
아까 행랑아범이 그랬던 것처럼.
“나?”
도겸이 있는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온 파랑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멈춰 섰다.
“나는 물이나 다름없지.”
조금 전 한바탕 웃고 나니 기분이 좋아지기라도 했는지 파랑은 지체 없이 도겸에게 답을 알려 주었다.
“…내가 왜 물이나 다름없냐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수평으로 둔 파랑이 눈을 감고 집중했다.
“한 번만 보여 줄 테니 잘 봐.”
도겸은 잠자코 파랑의 손바닥에 시선을 올려 두었다. 곧 혼자 보기 아까운 진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땀이 맺히듯 동글동글하게 생겨난 물방울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상해. 이 샘의 물은 다른 곳과 달라. 적지만 나름대로 정기도 취할 수 있고… 이렇게 운용도 되고.”
기묘한 장면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도겸이 조심스레 파랑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신기하구나. 정말 물이야.”
“처음 만났을 때 너 죽이려고 만들어 냈던 거, 그건 얼음이었는데. 보여 줄까?”
“아니. 괜찮다.”
“여기 손을 담그면 다 얼려 버리는 것도 금방일 텐데. 보여 줄까?”
“…아니, 그것 역시 괜찮다.”
파랑이 지나치게 가볍게 말했기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뿐 실상 역시 그날, 도겸은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었다.
“넌 뭐 다 괜찮아?”
섬뜩한 생각에 잠시 얼이 빠진 틈에 이번엔 파랑의 손에서 하얀 수증기가 일며 물이 사라져 갔다.
“이건 또 무엇이냐?”
“반대로 물을 아주 잘게 쪼개서 날려 보내는 거야.”
“물을 이리 자유자재로….”
그럼 혹시 비를 내릴 수도 있느냐 묻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손바닥에서지. 크게 다루긴 힘들어.”
웃던 얼굴이 금세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도겸은 이 땅에 비를 내려 달라 부탁하려던 마음을 곱게 접어야 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힘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럼 물과 다름없는 너는, 대체 무엇이냐?”
“나?”
마침내 손 안의 물을 모두 날리고 마른 손으로 달을 쥘 듯이 뻗던 파랑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말이지. 너 같은 인간 하나쯤은 한입에 꿀꺽할 수 있는 요….”
“나리!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직 여기 계십니까?”
피부가 워낙 희어 더 도드라지게 붉은 입술에서 나올 답을 고대하던 차, 멀리서 행랑아범이 도겸을 찾았다. 도겸은 반사적으로 허공에 뻗은 파랑을 잡아 못 밖으로 끌어당겼다.
무방비하게 서 있다 기습을 당한 여인의 눈이 커졌다.
“뭐야?”
“가만.”
파랑의 작은 두 발이 도겸의 발등 위를 딛고 섰다. 그럼에도 무게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 또한 신기했다.
처음 만난 날에도 지나치게 가벼워서 도겸은 몰래 그녀를 업고 궁을 빠져나오는 중에도 혹 여인의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닌지 바닥을 살펴야만 했다.
“아… 송구합니다, 나리.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어쩐지, 품에 안은 여인에게서 강한 술 내음이 풍겼다. 그제야 못 주변에 널린 술병도 보였다. 눈으로 대충 개수를 헤아리는데 벌써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도겸은 큰 손으로 파랑의 뒷머리를 감싸 더 깊이 안으며 행랑아범을 물렸다.
“…알겠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들어가 쉬게.”
“예, 나리. 쉬십시오.”
문간에 서 있던 행랑아범의 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뒤에서 보았으니 아마 품에 파랑이 있는 것까진 못 보았지 싶었다.
“놀라게 하여 미안하구나.”
남산댁이 어쩐 일로 칭찬을 다 했나 했더니, 아마도 옆에서 주는 술을 잘 받아먹어 그런 것일까.
파랑은 그걸로 부족해 광을 뒤져 술을 더 훔쳐냈을 것이고, 결국 취한 상태로 그동안 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술술 털어놓았다는 사실까지 충분히 납득이 됐다.
“파랑아.”
갑자기 끌어안았다 하여 화를 낼까 조심히 어깨를 잡고 제 몸에서 떼어 내려 했다.
“어쩔 수 없어 그리한 것이니 노여워 말고…!”
그런데 작은 몸이 그대로 늘어져 샘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황급히 도로 끌어안은 도겸은 이내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그리도 사람이 아니라더니, 여지없이 사람처럼 취하지 않았느냐.”
파랑이 조선에 떨어진 이튿날 밤이,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한들, 달에 한 번 있는 훈련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온 도겸은 고요히 목멱산의 중턱으로 향했다.
평소 외출할 때면 도포를 걸치는 것과 달리 오늘은 철릭 차림이었다. 혹시나 따라오는 인기척은 없는지까지 살피는 눈빛이 매섭기만 했다.
저하께선 아시려나. 밤새 책만 보고 사는 줄 아는 제가 이리 밤이슬을 맞고 다닌다는 것을. 잠시 동궐 쪽을 바라본 도겸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한 시도 지체할 수 없는지라 사색은 길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나리!”
약속 장소에 다다를 무렵 어귀에 나와 있던 한 사람이 재빨리 뛰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아는 얼굴이라 따로 암호를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도겸은 목례로 답하며 물었다.
“정찰인가?”
“예, 그렇습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졸음기가 섞여 게슴츠레할 법도 했지만 바짝 군기가 들어간 어린 정찰병의 눈빛은 또렷하고 말똥말똥했다.
“나무에 오르고 내릴 때 조심하게.”
“유의하겠습니다.”
전시 상황엔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배치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절대 발각되어선 안 되는 기밀훈련이 아닌가.
게다가 심지어는 도성 안이었다. 어쩌면 전쟁터에서 적진으로 잠입할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지도 몰랐다.
달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이 훈련은 매번 장소도 바뀌었다. 한 번은 목멱산, 그 다음은 인왕산이나 백악산, 혹은 낙산 중 한 곳의 깊은 안쪽에서 진행되었다.
도겸은 띄엄띄엄 놓여 길을 알리는 제등을 하나씩 입김을 불어 끄면서 들어갔다.
“나리!”
정찰병을 지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자 모인 병사들을 데리고 기초 체력을 연마하고 있던 훈련대장이 뛰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이제 오십니까?”
“병사들은 다 나온 것인가?”
“예.”
정찰병만 보고도 느낀 것이지만, 횃불이 벌겋게 비추는 사람들의 의욕이 굉장해 보였다. 눈대중으로 숫자를 헤아려보니 족히 서른 명은 되는 듯했다.
비밀리에 훈련을 진행한 지도 벌써 3년은 되었건만 모두가 처음 모이던 날과도 같았으니 말이다.
“늦어도 한 시진 안으로 끝내야 하니 서두르게.”
“예. 다들 본 훈련준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병사들은 미리 파묻어둔 무기 상자를 꺼내어 왔고 각 조장은 직접 상자에서 훈련용 총기를 한 자루씩 꺼내며 분실된 것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연습용 조총은 총 열다섯 자루, 그리고 한 번 사격에 다섯 자루씩 썼다. 아무리 총기를 개량하여도 아직은 장전에 제법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일제 사격보다는 전단, 중단, 후단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사격하는 것이 효율이었다.
“이상 없습니다!”
“좋다. 다섯 명씩 앞에 나와 선 뒤 직접 총을 장전하며 부족한 곳은 없는지 점검을 받도록 하겠다.”
도겸의 지시에 훈련대장이 눈을 빛내며 명령했다.
“세총!”
대장의 명령에 총을 든 이들이 일제히 총기를 청소했다. 연습용 총엔 직접 화약을 넣지 않음에도 실전처럼 임하는 면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도겸은 직접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각자가 총기 청소에 열중하는 동안 서툰 손짓은 없는지를 살폈다.
“화약!”
실전 사격은 거친 격발음 때문에 평상시엔 할 수 없는지라 화약 접시에 화약을 붓고, 공이치기를 당기는 등의 과정 또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손에 충분히 익도록 했다. 모두 진지하게 차근차근 임했다.
“실전에서는 이리 느려선 안 되네. 장전하는 동안 목이 날아갈 수 있으니 말이야.”
“예!”
약간 손이 느린 사람이 있을지언정 우왕좌왕하며 단계를 잊은 이는 결코 한 사람도 없었다. 도겸은 그 부분을 뿌듯하게 여기며 한 사람씩 차분히 지도했다.
“조준!”
조준부터는 도겸이 직접 명령했다. 길이가 길고 무거운 총이 수평으로 잘 들렸는지, 얼굴을 대고 쏘는 면착식인 만큼 자세가 안정적인지를 재차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병사들 하나하나를 돌아보며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병사들은 결연한 눈빛으로 열다섯 보 바깥에 설치해둔 과녁을 노려보며 총을 단단히 잡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