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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8)화 (184/197)

투덜대면서도 파랑은 투명한 물에서 느껴지는 기운이나 향을 먼저 음미했다. 생긴 건 늘 파랑이 가까이 하는 물과 같은데 나머지가 전부 달랐다.

“물어보고 안 주는 게 더 나쁜 거 몰라?”

다른 바가지에 마찬가지로 술을 조금 따라 낸 남산댁이 파랑이 들고 있는 바가지에 갖다 부딪힌 뒤 시원하게 들이켰다.

“아, 좋네. 좋아.”

의심할 여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파랑은 남산댁을 따라 술을 조금 마셔 보았다.

“…뭐야?”

눈이 번쩍 뜨였다. 술은 그 적은 양으로도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자마자 존재감을 과시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혀를 적시는 동시에 알싸하게 쓴 맛에 입 안이 저릿해졌다. 마신 건 물인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불 같았다. 불쾌하면서도….

“잘 내려진 것 같으냐? 밑술부터 잘 나와서 당연히 괜찮을 테지만.”

“모르겠어.”

상쾌했다.

“무어?”

증기로 한 방울, 두 방울 모은 소주를 입구가 좁은 병에 조심스레 옮겨 담던 남산댁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파랑을 보았다. 쭉 찢어진 주름진 눈은 금방이라도 병을 뒤집어 들 기세였다. 파랑은 굴하지 않고 빈 바가지를 내밀었다.

“아직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조금 더 내놔 봐.”

“…허?”

기가 찼는지 헛웃음을 지은 남산댁이 바가지를 받아 가더니 처음보다 그 양을 넉넉히 담아 주었다.

“여기에 눈 뜨면 큰일인데. 홧홧하고 어지러운 것 같으면 그만 마셔야 돼.”

파랑은 남산댁의 경고를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새 바가지도 깨끗하게 비워 냈다. 보통 사람보다 수분의 흡수가 빠르고 훨씬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탓일까. 온몸의 감각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느껴졌다.

돌아갈 길을 잃고 조금은 우울하던 마음이 가신 게 가장 컸다. 예민하고 날카롭던 신경이 흐물흐물 녹아들었다.

“모르겠다니까. 고작 이걸로 어떻게 맛을 알아?”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 느낀 만족감이었다.

***

어둑한 밤을 가르고 내달리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랴!”

조금만 더 가면 한양이다. 힘을 내다오.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에 들리지 않을 게 뻔했음에도 나직이 부탁하자 어찌 알았는지 쳐졌던 속도가 다시 붙었다.

“청이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도련님. 야밤에… 야밤에 정을 통한 사내와 도주를 한 것이에요!”

꼭두새벽부터 철봉이 가져온 소식에 놀라 도겸은 득달같이 해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통탄할 상황과 마주했다. 철봉의 말대로 초상이 한창이었으나 기이하게도 관이 비어 있던 것이다.

황당해하는 도겸을 한적한 곳으로 이끈 숙모가 일러 주었다. 이미 눈물에 절은 얼굴로 숙모는 또다시 눈물을 와락 쏟아 냈다. 남편을 말릴 수가 없었다며 통탄해하기에 도겸은 대신 숙부에게 읍소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찌 멀쩡히 살아 있을 아이를 죽었다 상을 치르실 수가 있습니까!”

“금혼령에 덜컥 겁이나 먹고 종놈과 도망가는 딸년은 없느니만 못하다! 두어라, 죽었다 여기고 살 것이니.”

“숙부님, 청이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잖습니까.”

“돌아온들 다시 내 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허가부가 확인되었다. 문을 열어라!”

수문장이 소리치자 굳게 닫혀 있던 창의문이 열리고 도겸에게 길이 뚫렸다. 한양의 북서쪽 성문을 지난 말은 북촌을 조금 더 달렸다.

“오늘부로 내 딸은, 네 사촌 누이 심청은 죽었다. 그리 알고 너도 그만 돌아가거라.”

텅 빈 거리를 터덜터덜 나아가는데, 피로한 몸을 누일 집으로 향하는데도 도겸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머릿속은 친우를 구할 다른 방법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셨습니까, 나리!”

말발굽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듣고 쫓아 나온 행랑아범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쯤 오실 줄 알았는데 어찌 이리 서둘러 오셨습니까요.”

“궐에 사흘씩이나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는가.”

“많이 피곤하실 텐데.”

워낙 지치거나 힘들어도 내색해 본 적 없었다. 도겸은 늘 그렇듯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찮네.”

엄살이 없는 도겸인지라 말이 대신하여 억울함을 콧김으로 뿜어 댔다.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도겸이 희미하게 웃으며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자 말이 두어 번 발을 구르며 칭얼댔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저녁은 드셨습니까? 드셨다 하여도 시장하실 터인데 누룽지라도 올릴까요, 더운 물부터 받을까요?”

행랑아범은 눈치 좋게 도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른 이였다면 대체 해주 아가씨가 어찌 된 것이냐며 궁금해 죽겠는 심정을 숨기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행랑아범은 도겸의 착잡한 속을 읽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저녁은 됐고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목욕부터 해야… 아.”

대문간을 지나려던 도겸이 멈춰 섰다.

“예. 무어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나리?”

해주에 일이 생긴들 제 집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안채 손님은?”

변고가 생겼다면 도겸이 도착하자마자 고했을진대, 아무래도 별말이 없으니 괜찮았겠다 싶으면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은 해야 마음이 놓였다.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물었지만 행랑아범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아, 안채 아씨라면 별일 없었습니다요.”

“순이랑도 별일 없었나?”

아무리 믿음이 생긴들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도겸의 걱정과 달리 행랑아범은 차분했다.

“순이가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좀 시킨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딱히 큰 소리 나는 것도 전혀 못 들었고… 아, 아까는 남산댁 일도 도왔는지 남산댁이 아주, 칭찬 일색이었습죠.”

“…그리 열심히 했다고?”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물에 들어가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걸레질을 하다 그 질긴 천 쪼가리를 종이 찢듯 찢어 버리는 여자였기에 먼저 순이의 소일이 아닌 남산댁의 일까지 도왔다는 말에 도겸은 실로 놀라웠다.

“예. 무어, 아직 사기 안 쓰고 놋그릇 쓰는 계절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루 종일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던지요.”

행랑아범이 탐탁지 않은 듯이 토를 달았다. 그러나 도겸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행랑아범에게 집을 부순 게 아닌데 그릇 몇 개가 대수냐 말해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지금 어디에 있나?”

“저녁 일 마치고 들어갔으니 아마 방에 있겠지요.”

“준비되면 안채로 와 알리게.”

“예. 근데 저, 나리.”

행랑 마당에서 안마당으로 향하는 도겸에게 행랑아범이 어렵사리 운을 뗐다.

“저어, 아랫것들이 몹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씨를 안채에 머물게 하면서도 왜 일을 시키시는 것인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다른 때는 이유조차 묻지 않던 행랑아범이 오죽 납득이 되지 않으면 궁금해할까. 도겸은 잠시 뒷짐을 지고 선 채 적당한 이유를 골랐다.

“약자는 강자에게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일수록 더 약해지는 법이니까.”

“예?”

“물고기는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기도 하고.”

“…예?”

답을 알고자 참다 참다 물은 것일 텐데 행랑아범의 표정은 어째 더 오리무중이었다. 늘 또렷하던 시선이 이리저리 굴렀다. 도겸은 그저 웃어 보였다.

“때가 되면 궁금해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해갈되도록 해 주겠네.”

자신조차 아직은 파랑이 어떤 존재인지 저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칫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얼음 창을 꺼낼까 싶은 걱정이 더 컸다.

“…아닙니다. 소인이 괜히 여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다만 이 집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려 주려는 것일 뿐이니 처음 당부한 대로 너무 과한 일만 시키지 말아 주게. 손님이지 않나.”

“그럼요. 순이는 제가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요.”

걱정 말라는 듯 행랑아범의 대답은 아주 단단했다. 도겸은 조만간 고기라도 넉넉히 사다 가솔들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이번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지체하지 않았다.

“파랑아, 방에….”

“겁도 없이.”

방에 있을까 싶어 곧장 안채로 올라서던 중이었다. 웬 여자 목소리에 도겸이 무심코 돌아섰다.

“너…!”

우스꽝스럽게도 그는 신을 벗던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대청에 주저앉고 말았다.

“날 혼자 두고 잘도 돌아다니네.”

“너, 너 지금….”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기 어려운 광경이라 도겸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말도 못 하면서 입은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내가 돌아갈 길을 마련해 주겠다 약속해 놓고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고.”

파랑은 잊을 만하면 능력을 보여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설마하니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눈앞의 광경은 처음 목격한 그대로였다.

“너 지금, 물 위에 서 있는 것이냐?”

파란 머리칼을 풀어헤친 파랑은 보란 듯이 발끝으로 가볍게 물을 차올렸다. 달빛 아래 투명한 물방울들이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도겸의 도포를 적셨다.

“당장 내려오, 아니 나오거라. 누가 보면 어찌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처음 부용지에서 보았을 때는 보고도 믿기지 않아 잘못 보았노라, 그리 여기고 말았던 광경이눈앞에서 생생히 재현되고 있었다.

“제발 그 걱정이란 것 좀 그만해. 내가 얼마나 소리에 예민한데 설마 누가 오는 것도 모를까. 둔하디둔한 인간들은 아무도 모를 거라고.”

“내가 봤지 않느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도겸이 괜스레 헛기침하며 옷자락을 탁탁 털었다. 그가 마당으로 내려가는 중에도 파랑은 기분 좋은 듯 첨벙거리고 있었다.

결 좋은 머리칼들이 파랑(波浪)을 따라 너울거렸다. 치맛단을 잡아 올려 하얗고 작은 발과 종아리가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망측한 모습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던 도겸이 천천히, 훔쳐보듯 파랑을 바라보았다. 푸른 머리칼 위로 내려앉은 달빛이 그녀의 머리 색과 어우러져 마치 고아한 은관을 쓴 듯했다.

“…웃을 줄도 아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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