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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7)화 (183/197)

군사를 동원해 파랑을 가둬 두었다면 아마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파랑이 이곳을 잘 모른다는 건 확실해 보였으니까.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갇혀 있기까지 했다면 아마 숱한 사람이 저 여인이 불러낸 얼음 창에 꿰뚫리거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목이 꺾였을지도 모른다.

“홀로 두었음에도 이렇게 내 곁에 와 있는 너를 보니 알겠구나. 내 선택이 옳았음을.”

잠자코 듣던 파랑이 입술을 비죽였다. 뭔가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도겸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말해 보거라. 어찌 와 있는 것이냐?”

“…이거 말이야.”

파랑이 만지작대던 머리칼을 도겸에게 내보였다. 아직 환하지 않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도겸은 조심스레 비단결 같은 파랑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침음했다.

“다시… 색이 변한 것이냐?”

“사실 왜 변했었는지도 몰라.”

그즈음 창호로 선명한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파루는 언제 친 것인가. 늘 파루가 치기 한참 전에 깨어나던 도겸은 오늘은 평소와 달리 파루가 치고도 신각(해가 뜨기 직전)이 지나서야 일어났음을 새로이 깨달았다.

“아마도….”

오래가지 않아 도겸과 파랑은 머리 색이 변하는 주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 뽀얗게 쏟아져 들어오는 볕이 도겸의 방을 채우자 자연히 파랑의 머리 색도 검게 물든 것이었다.

“해가 뜨면 검게 변하고, 해가 지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두 번을 봐도 기이하고 새로웠다. 한숨을 내쉬는 파랑은 눈에 띄게 풀이 죽었지만 기실 도겸은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었다.

“하얗게 변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구나. 그랬다면 꼼짝없이 노인 취급을 받았을 텐데.”

“…마음에 안 들어.”

머리카락의 주인은 질색했지만 도겸은 저이가 진정 신묘한 존재임을 또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제 머리카락의 색을 잃고 우울해하는 모습은 꼭 날개옷을 잃은 선녀 같았다. 실의에 빠진 선녀에게, 나무꾼은 아니었지만 도겸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건넸다.

“내일이 사흘째이지 않느냐. 내일 밤엔 부용지에 데려다줄 테니 조금만 더 참거라.”

파랑은 차분히 달래는 도겸을 빤히 응시했다.

“내가 거기서 못 돌아가면 어떡해?”

“뭐?”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순간 도겸의 눈에 파랑이 굉장히 여린 존재로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해져 있는 것 같다 느끼긴 했지만 정말로 침울해 보이는 것이, 하룻밤을 보내고도 바뀌는 것 없이 여전히 낯선 상황에 겁이 난 것 같았다.

“어떡하긴, 예상보다 유랑이 조금 더 길어지는 것이겠지.”

도겸은 보는 것만큼이나 결이 좋은 파랑의 머리칼 끝을 매만졌다.

“이곳에 갑자기 떨어졌다지만 하루 동안에도 너는 잘 적응하여 순이와 청소도 하고, 장도 보지 않았더냐. 비록 네가 살던 곳의 물보다 정기는 부족해도 그렇다고 썩 못 지낼 곳도 아니니 천천히 구경도 하면서 방법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

“네가 가지 못한다고 하여 내가 너를 내버려 둘 것 같으냐? 그런 것쯤은 너를 내 집에 데려올 때에 이미 결정된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너를 돌려보내 주겠다 약조하였고 나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편이니까.”

기실 위로의 의미보다는 그러니 화를 내지 말라는 뜻이 더 강했다. 분노하여 얼음 창을 만들어 사람을 공격하거나 살림을 부순다면 큰일이지 않나.

그러나 구태여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에 올릴 필요는 없었다. 다만 다른 방향으로 재차 확언했다.

“네가 약속을 훌륭히 잘 지켜 주고 있으니 그 다음은 내 차례겠지.”

가만 도겸을 꿰뚫을 듯이 바라보던 파랑이 모양 좋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면… 저기.”

“나리! 기침하셨습니까?”

한참을 머뭇거리던 파랑이 드디어 무언가를 털어놓으려던 찰나, 하필 밖에서 행랑아범이 도겸을 급히 찾았다. 아무래도 도겸이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탓이리라.

“일어났네만.”

일단 대화의 물꼬는 트였으니 파랑에게 이야기는 차차 들어도 좋았다. 도겸은 이부자리 옆에 잘 개어 놓은 저고리부터 찾아 입었다.

“무슨 일인가?”

“빨리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철봉이가 돌아왔습니다요.”

“…철봉이가 벌써?”

철봉은 도겸이 믿고 이곳저곳으로 서신을 보내는 전팽(專伻)이었다. 이번엔 편지를 전하고 답장을 받아 오라 일러두었기에 최소 사흘에서 나흘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옷고름을 묶는 손길이 바빠졌다. 그러는 동안 겨우 트려던 입을 어느새 조가비처럼 꾹 다물고 가만 앉아 있는 파랑에게 시선이 갔다.

“직전에 뭔가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느냐?”

“…아니야.”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언제든 이야기 하거라.”

“응.”

고분고분 구는 여인이 기특해 조금 웃음이 났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심각한 얼굴을 한 철봉을 보자마자 도겸의 낯빛도 단단히 굳어졌다.

“어찌 이리 서둘러 온 것이냐. 해주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나리, 그것이… 제가 어제저녁 늦게 해주에 당도하여 영감마님께 서신을 전하기는 하였는데 말입죠.”

“어서 말하래도.”

“그것이, 그것이….”

기어이 행랑아범이 우물쭈물하는 철봉의 등짝을 후려쳤다.

“어서 나리께 고하지 않고!”

“그게!”

어수룩한 생김새의 철봉이 어렵사리 아픈 등을 쓸어내리며 황급히 고했다.

“제가 도착해 보니 영감마님 댁에서 한바탕 초상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초상이라니. 아까 전까지 꾸던 꿈이 불길한 징조였던 건가 싶어 도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숙부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셨단 말이냐?”

“예? 아, 아니요. 그것은 아니옵고.”

더 질질 끌었다간 행랑아범에게 한 대 더 맞을 것 같았는지 철봉이 서둘러 설명했다.

“청이 아씨의 상이라 하였습니다!”

“…뭐?”

미처 신발을 챙겨 신지도 못한 도겸의 흰 버선발이 주춤주춤 마루 밑으로 내려섰다.

아니 된다. 세자 저하를 지킬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나. 충격에 휩싸인 도겸에게 철봉이 덧붙였다.

“송구합니다, 나리. 영감께서… 나리께 청이 아가씨가 죽었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

“여기다 놓으면 돼?”

파랑은 여자 혼자 들기엔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대야를 든 채였다. 물론 팔의 길이가 짧아 불편한 것만 빼면 전혀 무겁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는 이가 다 무거워 보이는지라, 파랑을 본 초로의 여인이 혀를 끌끌 찼다.

“순이 고것이 나리의 손님께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시킨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녀는 순이를 욕하면서도 파랑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주름진 손으로는 그저 아궁이에 장작을 하나 더 쑤셔 넣을 뿐이었다.

바짝 마른 먹이를 삼킨 아궁이 안에선 벌건 불길이 치솟았다. 솟구친 열기는 아궁이 위에 놓인 커다란 항아리를 데우고 있었다. 겹겹이 쌓여 있는 모양이 특이했다.

“물 쓰는 일은 내가 하겠다고 한 거야.”

파랑은 얼른 대야를 내려놓고 나갈 생각이었다. 살던 세상에서나 여기서나 뜨거운 건 질색이기에.

“막 다뤄지는 걸 보느니 내 손으로 쓰는 게 나으니까.”

도겸이 아침나절 급하게 집을 비운 사이 파랑은 샘에 들어가 있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순이가 눈앞에서 한 번 쓴 물을 함부로 바닥에 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홧김에 물을 그따위로 쓸 거면 제가 하겠노라 한 것인데,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슬슬 짜증이 났다.

아마 살던 곳의 동물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늘 물속에 틀어박혀 정기를 마시고 유유히 노니는 것을 좋아하던 용족의 왕이 인간이 쓰고 난 그릇이나 닦다니 말이다.

“가뭄이 길어 물이 귀하긴 하다만 그렇게 사서 고생하는 것을 보니 아씨가 물정 모른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닌가 보구나.”

가만 앉아 장작이나 쑤셔 대던 노인이 그걸로 부족했는지 파랑의 심기도 쑤셔 댔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물을 쓰는 일이 어떻게 고생이야?”

이대로 돌아가면 순이가 또 귀찮은 일을 시킬 것 같았다. 파랑은 열기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부엌 근처에 주저앉아 농땡이를 피우기로 마음 먹었다.

“그 희고 고운 손이 곧 갈라지고 부르틀 것인데 당연히 고생이지, 그럼.”

남산댁이 혀를 찼지만 파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닌데. 난 물이 없어야 마르는데.”

“나 원 참. 살다 살다 물이 좋아 설거지까지 도맡아 하는 아씨는 또 처음 보네. 물 없어 말라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어?”

순이나 행랑아범은 파랑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시늉은 했는데, 남산댁은 스스럼이 없는 사람이었다. 별생각 없이 몰래 샘에 들어갈 궁리나 하던 파랑은 문득 코를 킁킁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그건 뭐야? 냄새가 이상한데.”

“뭐긴 뭐야, 술이지. 설마 술 빚는 거 처음 보나?”

“…술?”

남산댁은 다시 한번 잘 타는 불을 괴롭혀 댔다.

“우리 나리는 잘 안 자시지만 가끔 세자 저하께서 오시면 내놔야 한다고 조금씩 빚어 놓는 것이지. 이렇게 비가 안 오면 금방 금주령이 떨어지는 터라 얼른 빚어 놔야 된다니까?”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될 리 없었다. 술이 뭐냐고 물은 것이었는데 남산댁은 술을 빚는 이유나 대고 있으니. 아마도 파랑이 당연히 ‘술’이 무엇인지 아는 것을 전제로 한 듯했다.

“어디 한번 맛 좀 볼텨?”

바가지에 투명한 액체를 조금 담아 낸 남산댁이 부엌 밖 파랑에게 내밀었다.

“아, 뭐 해? 팔 아프고만.”

맛을 보겠느냐 묻는 말에 답하기도 전에 파랑은 강제로 바가지를 받아 들었다. 눈앞에 나이든 인간은 도겸과 순이와는 또 다른, 정말이지 희한한 인간이었다.

“이렇게 억지로 줄 거면 왜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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