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뻑 젖은 여인의 옷과 머리는 어느새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물론 언은 어둑한 사위에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미안하오.”
“…왜?”
여전히 버릇없는 언행이었으나 언은 이런 하극상쯤은 너그러이 넘기기로 했다. 사람의 일생에 가장 중할 관혼상제의 사례 중에서도 가장 크게 벌이는 혼인이 어그러진 마당에 낯선 사내에게 말을 놓은 게 무어 대수랴.
죽을 생각까지 하고 실행에 옮기던 차였으니 눈에 뵈는 것도 없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그 까닭이 다름 아니라 국본인 세자, 바로 이언 자신이 아니던가. 언은 죄책감과 비통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내 그대와 그대 부모의 충심에 진심으로 탄복하였소. 아무리 금혼령을 내린들 몰래 자식을 혼인시키거나 단자 올리기를 기피하는 백성들이 많다 들었는데….”
차마 이미 내정된 세자빈이 있다는 말은 해 줄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턱 아래에서 흔들리는 화려한 갓끈을 뜯어내 장식을 조금 빼내고 끄트머리를 묶어 고정했다. 그러곤 여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부디 죽지 마시오. 그리고 혼인을 유보하시오. 이것이 그대와 그대의 정인을 지켜 줄 것이니.”
청금석과 금을 꿰어 만든 갓끈이 하얀 손바닥 위에서 반짝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날 지켜? 이렇게 쓰라는 거야?”
여인이 갑자기 갓끈의 끄트머리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려 했다. 언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정상이라면 갓끈만 보고도 신분을 짐작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인은 언의 정체는 물론 그 신분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증표요. 세자빈 간택에 들었을 때 이것을 보이시오. 그럼 내가 간택에서 무조건 떨어지게 해 주겠소.”
설령 증표가 없다 한들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긴 했으나, 언은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맞춰 볼 제 몫의 장식은 소매에 잘 갈무리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이런 건 필요….”
언에게 도로 내미나 싶던 여인이 돌연 입을 닫고 갓끈을 꼭 품었다.
“…있어. 이 물빛 보석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언은 더 첨언하지 않았다. 내친김에 도포까지 벗어 여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러니 함부로 귀한 목숨을 버릴 생각은 마시오. 한밤중에 이런 차림으로 나다니지도 말고.”
“그게 아니라 나는….”
뭔가를 말하려던 여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인간들은 직접 보여 줘도 본인들 마음대로 믿는 것 같으니.”
다소 기운 없이 중얼거린 여인이 언을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오늘 밤 안으로 약속을 어기게 될 줄 알았는데, 네가 살렸어.”
“어떤 약속 말이오? 살리다니.”
“해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여인은 도통 언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했다.
“네가 나를 숨겨 준 일로 고맙다 인사를 받아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 아까 너와 나의 머리 위로 지나간 그 인간들이란 뜻이야.”
“…뭐요?”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묘하게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언이 무어라 더 물으려던 차, 여인이 별안간 언이 덮어 준 옷을 높이 던져 언의 시야를 방해했다.
“아니, 이게 무슨!”
난데없이 눈앞이 가려진 언이 바로 옷을 잡아 내렸지만.
“…대체.”
여인은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얼이 빠진 얼굴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직전까지 대화를 나눈 게 마치 꿈인 양 주변엔 저 혼자였다. 혹시 잠깐 사이에 물에 몸을 내던진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천변은 투신할 수위가 안 됐다.
생각할수록 오소소 소름이 일기만 했다. 하얀 적삼 차림인 데다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또 다리 밑에 몸을 숨기며 입을 막았을 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전혀 없던 것까지….
“아니 어쩌면… 내가 참으로 귀신을 본 것일지도…!”
절로 오금이 저린 언은 결국 예상 보다 서둘러 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밤이슬을 맞을 적이면 반드시 익위사들을 대동했다.
그리고 다리 밑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
“영감, 아까 웬 거렁뱅이가 밥을 얻어먹으러 왔었는데요.”
“쫓아내었소? 그래도 밥은 한 끼 먹여 보내지.”
“영감도 참, 제가 그리 매정해 보이십니까? 따뜻하게 한 상 차려 주었어요. 그랬더니 보답이라고 우리 겸이 사주를 봐 주지 뭐예요? 근데 겸이한테 화가 많다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그럼 낚시를 더 데리고 다닐 걸 그랬군. 물을 가까이하면 좋았을 텐데 말이오.”
“지금 농하실 때가 아니에요, 영감. 그 거지가 도움이 될 거라면서 이걸….”
그날이었다. 어느 정월 대보름, 도겸이 세자 저하와 쥐불놀이를 가기 위해 허락을 받으러 사랑채에 갔을 때 부모님이 꼭 저런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불이라면 또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들을 장차 열정적으로 주상 전하를 보필하며 나랏일을 보살피는 훌륭한 신하로 키우면 되지.”
“배필 될 처자가 물과 가까우면 좋겠는데…. 아, 조 참의의 여식과 미리 궁합을 보면 어때요?”
“어허, 그 아이는 몸이 약해 지금은 비접을 갔다 안 하였소. 안 그래도 귀한 딸을 멀리 보내 놓아 조 참의의 심정이 말이 아닐 터인데 호들갑을 떨어 부채질을 해야겠냐는 말이지.”
“…제가 모자랐어요. 우리 아들 귀한 만큼 남의 딸도 귀한 법인데.”
“그럴 땐 아이 몸에 좋다는 약재나 과일을 구해 보내는 게 어떤가?”
“어머, 그거 좋은 방법이에요. 뭐가 좋을까?”
불을 걱정하는 어머니께 ‘불’놀이를 간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불을 가까이하지 말라 당부에 당부를 하시는 분이셨으니까.
한참 고민하던 도겸은 꼭 쥐불놀이를 하고 싶다는 벗을 위해 결국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 입궐하옵니다.”
“그래. 석강에 가는 것이냐?”
문 밖에 선 어린 도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예.”
잠시 우물쭈물했을 뿐인데 어찌 눈치채셨을까. 돌연 아버지 최은학이 사랑방 문을 열고 나왔다.
“저하의 곁에서 훌륭한 스승의 수업을 함께 들을 수 있는 다시 없을 좋은 기회이다. 절대 허투루 임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든든한 기둥 같은 아버지의 뒤에서 여전히 소녀 같은 어머니도 나타났다.
“어제 새로 만든 과자들을 싸 놓았으니 챙겨 가렴. 저하께서도 즐겨 하셨으면 좋겠구나.”
“…제 몫으로 나온 과자도 늘 빼앗아 드시는 분인걸요.”
“어허, 사내가 되어 그깟 과자 하나도 친우에게 나눠 주지 못하면 쓰나.”
“송구합니다.”
말로는 엄히 하면서도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도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비 말고 스스로에게 송구하여라. 마음을 좁히지 말고 늘 넓게 쓰라,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네에….”
“나누는 것도 좋지만 너무 헤픈 것보단 적당히 욕심도 있어야지요.”
소중한 아들의 마음이 다칠까 싶었는지 어머니가 나름의 주장을 펼치며 싸고돌았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이 허허 웃으며 웬일로 수긍했다.
“그래. 앞으로는 정히 먹고 싶은 것인들 솔직히 말하여라. 저하께서는 철부지가 아니시니 능히 들어주실 게다.”
“…네.”
“네 몫은 어미가 따로 챙겨 두었으니 걱정 말고 저하께 전부 올려드려도 좋단다.”
도겸의 편을 든 어머니가 아들을 손수 대문까지 배웅했다. 둘째를 가져 배가 남산만 한 채로도 어머니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것이 도겸이 기억하는 부모님의 마지막이었다. 약속과 달리 밤늦게까지 신나게 쥐불놀이를 구경하며 놀다 서촌으로 돌아왔을 때, 소년은 조금 전까지 실컷 구경하던 빨간 불꽃이 화마가 되어 제 집을 활활 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아야 했으니까.
“아… 아버지, 어머니!”
황망하게 눈이 커진 도겸에게 치솟은 화마가 파도처럼 달려든 건 그즈음이었다.
***
“어머니, 어머니… 흐억!”
화염에 휩싸이기 직전, 도겸이 눈을 떴다. 바짝 굳어 긴장하고 있던 사지가 맥없이 늘어졌다.
“하….”
또 꿈이었다. 다만 평소 꾸던 양상과는 조금 달랐다. 늘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작열통에 괴로워하다 숨이 끊어질 즈음 깨어났는데 오늘은 그 전에 눈을 뜨지 않았나.
“…언제 온 것이냐?”
거기다 곁에 속적삼 차림의 여인이 앉아 있는 것도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내심 놀랐으나 도겸은 차분히 일어나 앉았다. 와중에도 파랑은 도겸을 무심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차림으로 사내의 방에 들어와서야 되겠느냐.”
“왜 안 되는데?”
“그야….”
타는 갈증에 물을 마시려 주전자를 든 도겸은 허탕을 치고 내려두었다. 행랑아범이 가득 채워 가져다준 주전자가 어느새 비어 있었다.
“여인은 정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몸을 함부로 해서는….”
잠자코 설명하려던 도겸은 이내 손을 작게 내저었다. 생각해 보니 파랑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내가 이 땅에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다. 그보다 어찌 온 것이냐. 네 방의 이부자리는 순이에게 봐 달라 하였는데.”
다시 보니 잠자코 잠을 자다 나왔다기엔 파랑의 행색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했다. 순이가 묶어 주었다던 머리는 언제 풀어헤쳤는지 바닥으로 쏟아져 내릴 듯 찰랑거리고 있었고 옷도 정갈하지 못했다.
“혹, 또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냐?”
“어? …어.”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만지작대던 파랑이 도겸에게 불쑥 물었다.
“넌 내가 도망가면 어쩌려고 날 혼자 둬?”
“내가 기를 쓰고 가둬 두려 해도 네가 원했다면 언제든 도망쳤을 것 아니냐.”
“…….”
“내가 직접 겪은 너의 힘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지. 그래서 최대한 화를 돋우지 않는 선에서 지켜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