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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5)화 (15/197)

“후회할… 날이… 끄아악!”

어쩌면 그 화룡은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파랑에게서 힘을 빼앗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 이렇게 아예 다른 세상에 떨어질 것도 알고 있었을까. 겨우 자그마한 반지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파랑의 손 주변으로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물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영생이라니.

끔찍했다.

***

언에게 있어 궁은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넓고도 숨 막히게 좁은, 그런 곳이었다.

“밤공기 한번 시원하니 좋네.”

같은 하늘 아래 있음에도 궁에서 들이켜는 숨과 궁 밖에서 마시는 숨은 엄연히 달랐다. 궁에서는 기이하게도 항상 젖은 창호지로 코와 입을 틀어막힌 것만 같았다.

내의원에서는 이런 언의 상태를 두고 화병이라 하여 탕약을 지어 올렸지만 시원찮았다. 이렇게 궁문을 나서서 길게 호흡할 때나 잠시나마 해갈이 됐다.

언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걸었다. 야금에 별순라들이 패를 나누어 순찰하고 교대하는 시간이야 훤히 꿰고 있으니 그들과 마주칠 우려도 없었다.

“아차, 곧 어영청 군사들이 지나가겠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서두르는 언의 걸음이 가벼웠다. 어쩌면 궐에서 내내 제 코와 입을 막고 있던 창호지는 바로 곤룡포일지도 모른다. 벗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곤룡포에 새겨진 사조룡은 양 어깨를 짓누르고 가슴팍을 조였으며 또한 등을 떠밀었다. 세손 시절에도 삼조룡은 언에게 체통을 지켜야 한다며 걸음걸이부터 함부로 울지도, 크게 웃지도 못하게 했다. 그만큼 무거웠고 무겁고 무거울 것이었다.

그 무게에 처음 짓눌린다고 느꼈던 것이 아마, 세자빈을 맞이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려 맞이하자마자 보내줘야 했던 그날이 아닐까. 순라군을 만나지 않을 법한 좁은 길만 골라 걷던 언이 어느 담벼락에 기대어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밤공기 참… 숨 막히게 좋네.”

아무리 찬 공기로 씻어 낸들 머릿속은 오후에 있던 일로 뜨겁기만 했다.

“전하, 어찌 소자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시고 세자빈을 정하셨나이까?”

“좌상이 이번에도 친모가 없다는 이유로 여식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내 이번엔 부모 조실한 처녀만 사주단자를 내라 명할 참이었다.”

“전하.”

“이번 간택은 실상 삼간택까지 든 처자들을 차차 네 후궁으로 들이기 위함이니 그리 알거라.”

“아바마마!”

“언제까지 세자빈을 잃을 참이냐!”

살을 내어주고 뼈를 지키라는 뜻이었다. 편전을 쩌렁하게 울리던 아바마마의 음성이 다시금 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처럼 번졌다.

“이 나라는 나의 나라고, 곧 너의 나라다. 한데 벌써부터 이리 민심을 잃어서야 되겠느냐?”

“하나 전하께서도 좌상이 기실 면종복배고 구밀복검인 자임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내 확실한 증좌도 없이 그런 소리를 떠들지 말라, 그리 말했거늘! 아직도 좌상이 전 대사헌을 죽인 범인이라, 그리 여기는 것이냐? 정녕 그랬다면 좌상이 대사헌의 아들인 최 직각이 장원 급제하도록 그냥 두었겠느냔 말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설령 적인들, 도리어 적일수록 가까이 두어야 하는 법임을 모르느냐?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 세자는 과인의 결정을 따르라.”

“아바마마.”

“더는! 내 더 이상은! 세자를 폐위하라는 상소를 받고 싶지 않다!”

속수무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곤룡포를 벗어 두고 산이든 바다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기도 했다.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한다면 포기가 가장 쉬운 길이 아닐까.

“흐르는 물에 몸을 내맡길까, 연어처럼 강을 거슬러 오를까.”

취하지 않아도 이리저리 흔들려 휘청하니 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은 점차 깊어지는 어둠 속을 거닐다 갈림길을 만났다.

동쪽으로 가면 동궁 사람들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궁이요, 서쪽으로 틀면….

“이럴 때 필요한 게 또한 벗이지. 그럼 꾀병이 났다는 최 직각 집으로 가 술 한잔 얻어 마실까.”

궁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조금 더 야행을 즐기기로 했다. 서촌으로 이어지는 청계천 모전교를 건너던 언은 별안간 다리 위에 멈춰 섰다.

잘못 보았나. 눈이 침침한가 하여 손등으로 벅벅 비벼 보기도 했다.

“…귀신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웬 여인이 야밤에 개천가에 서 있을 리가 있을까. 머뭇거리던 차에 여인이 물로 직행했다.

설마 수위가 낮을 대로 낮아진 개천에 빠져 죽기야 하겠냐만, 하고 별걱정 없이 지켜보던 언이 곧 경악했다.

“아니 왜, 어찌!”

그 얕은 물에 대뜸 머리를 담그더니 한참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짧은 숨을 들이켠 언이 즉각 주변의 익위사를 찾았으나 아차, 하필 오늘따라 익위사들마저 모두 따돌리고 나온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제 꾀에 제가 발등을 찍힌 격이었다.

“차라리 귀신이면 좋겠는데….”

적어도 귀신이라면 산 사람을 어찌하진 못할 테니까. 언은 세자의 체면이고 뭐고 부랴부랴 천변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곤 미동도 없이 물에 얼굴을 넣고 있는 여자를 잡아끌었다.

“이보시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체구가 상당히 작은 처자라 언은 당연히 여인을 거뜬히 일으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여기서 대체 뭐 하는…!”

사람을 일으키긴커녕 저까지 물에 빠져 엉덩방아를 찧기 전까지는 말이다.

“넌 또 뭐야?”

도리어 언을 넘어뜨린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하얀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 내며 짜증을 냈다. 언은 엉거주춤 일어나 돌부리에 부딪힌 엉덩이를 문질렀다.

“지… 지나가던 객이오만?”

“그럼 계속 지나갔어야지. 이 땅의 인간들은 원래 참견하길 좋아해?”

“참견이 아니라…!”

죽으려는 이를 그냥 지나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도와주려다 물벼락을 맞은 언이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차, 저만치 한 무리의 횃불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언은 반사적으로 장신부터 수그렸다.

“낭자. 잠시 몸을 숨겨야겠소만.”

“뭐?”

“지금 내 말 안 들으면 내일 아침에 나란히 관아에 엎드려 볼기를 맞아야 할 거요. 잠시 실례하겠소.”

여인의 팔목을 덥석 붙든 언이 다리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뭐냐니….”

의아한 여인이 무어라 입을 열기에 언은 반사적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자진하려는 여자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다리를 건넜다면 마주치지 않았을 순라군 한 무리가 아슬아슬하게 두 남녀의 머리 위를 지났다.

“들었나? 아까 돈의문 쪽 금위영 별순라들이 귀신을 보았다던데.”

“뭐?”

“그것도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담벼락을 넘어 슉슉! 바람처럼 스쳐 갔다더라고.”

급한 나머지 여인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이던 차, 언의 눈이 드르륵 굴렀다. 그의 눈에 여인의 밝은 색 옷차림이 비쳤다.

“어떤 놈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지?”

“쯧쯧, 금위영엔 간이 쓸개만 한 놈들밖에 없나 보군.”

“그러는 네놈은 아까 고양이만 보고도 소리를 내지르지 않았나?”

이 구역의 별순라인 좌포청 포졸들이 킥킥 웃으며 다리를 마저 건너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언은 품 안의 작은 여인을 놓아주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특히나 야금에 걸려선 안 되는 긴한 사정이 있는지라.”

다행히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여자도 언과 거리를 두며 물러났다. 마찬가지로 들켜 봤자 좋을 게 없을 터라 협조가 원활했다.

“한데, 정녕 이 얕은 물에 코라도 박고 죽으려던 거요?”

젖은 옷자락을 대충 짜내던 언이 문득 의아해져 따졌더니 여인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아니, 살려고 박은 건데?”

“그게… 무슨 소리요?”

물에 코를 박는데 그게 살려고 박는 거라니. 해괴한 것을 보듯 휘둥그레진 언의 눈을 보았는지 여인이 조금 더 길게 설명했다.

“쉬고 싶어서 누울 자리 찾는 중이었다고.”

“근데 듣자 하니, 낭자는 어찌 초면인 내게 함부로 말을 놓는 것이오?”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생각하는 언이었지만 앳된 처자가 지나치게 위아래가 없는지라 도저히 짚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피차 사정이 있긴 하오만 야금에 걸릴 뻔한 것도 구해 줬는데, 너무 무례한 것 아니냔 말이오.”

“청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구한 너는 친절하다, 이건가?”

“아니, 내 말은!”

“나는 너에게 구해지기보다 저기다 코를 박는 게 훨씬 간절했는데.”

“대체 왜 그런 짓을….”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는 여인을 질책하려던 언은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 금혼령 때문에 그런 거요?”

“금혼령?”

“혼인하려던 차에 하필 금혼령이 내려져 파혼이라도 했느냔 말이오.”

진지한 언의 물음에 여자는 무슨 생각인지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 물거품 됐거든. 지쳐서 쉬려고 했는데.”

여인이 길게 풀린 제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긴 머리칼과 언을 번갈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언은 이미 여인의 대답을 제 식대로 곡해하느라 한껏 심각해진 채였다.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소.”

여인에게 파혼이 얼마나 큰 수치인가. 사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터. 게다가 금혼령 때문에 정인과의 혼약이 깨져 얼마나 상심했을까.

어디 혼인을 준비하며 들인 비용은 한두 푼이겠는가? 이런저런 부담이 쌓였을 게 분명하다.

이제는 쉬고 싶어 누울 자리를 찾는다는 건 필히 비극적인 선택을 하려 함이리라. 한 번 매몰되어 버리자 다른 근거를 찾을 틈도 없이 오해에 토실토실 살이 붙었다.

“…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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