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4)화 (14/197)

과연 이번엔 예상대로 마치 파랑을 위하여 만들어진 장신구인 양 잘 어울렸다. 도겸은 파랑이 기뻐하지 않아도 주는 자의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파랑은 또다시 도겸의 예상을 빗나갔다.

“나를 조금이라도 믿어서 이런 선물을 주는 거라면.”

도겸이 애써 머리에 꽂아준 것을 빼낸 그녀가 장신구를 내려다보며 시큰둥하게 굴었다.

“쌀 반 섬짜리를 사 주기보단 나를 당장 부용지에 데려다주는 게 서로 간에 더 좋았을 텐데.”

그러곤 장신구와 간식 보퉁이까지 모조리 도겸의 품에 넘겨주었다. 얼결에 받아 든 그에게 파랑이 덧붙였다.

“여기서 가져갈 좋은 기억이라면 그거 하나로 충분하거든.”

“…….”

“조그만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내게 전부 양보해 준 것.”

입 안의 것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골똘히 음미한 파랑이 쩝 소리를 냈다.

“왜 이게 가장 좋다는 건지는 이해가 안 되지만 말이야.”

달고 끈적한 입술을 붉은 혀로 훑어 낸 파랑이 안채 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물 흐르듯 사라진 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도겸은 멋쩍게 뒷목을 쓸어 냈다.

“이거 제대로 위선자가 돼 버렸군.”

간밤의 무력을 봐 버렸기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물속에서의 무력함을 목도하고 나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도겸은 파랑이 오래도록 들고 있었음에도 전혀 녹지 않은 과자와 거절당한 값비싼 선물들을 든 채 그 자리에 덩그러니 고여 있었다.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

까만 하늘이 검은 기와를 물들인 것인지, 하늘이 기와를 비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밤이었다.

야밤에 통행하는 자들을 단속하는 별순라들의 횃불 말고는 소리도 빛도 모두 자취를 감춘 시간이기도 했다. 대낮의 그 시끌벅적한 활기가 거짓말 같았다.

“흐음.”

파랑은 궁궐 어느 전각의 높은 용마루 끝에 서 있었다. 바람이 그녀를 흔들어도 끄떡없었다. 해가 뜨자 검게 물들었던 머리칼은 어느새 본래 색으로 차갑게 돌아와 물결처럼 출렁였다.

푸른 시선은 저만치 먼 곳을 향한 채였다.

“궐이요?”

메마른 세상에서 가뜩이나 기력이 쭉쭉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 구태여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을 보러 나가는 순이를 따라나선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래, 궐. 후원이 있는 궐 말이야.”

순이가 물건을 사는 데 정신이 팔린 틈에 궐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거기야 바로 저기 저 파자교 건너 쭉 올라가면 돈화문 있지 않소? 거기가 궐로 들어가는 정문인데, 혹 타지에서 오셨소?”

최도겸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사흘을 기다리라 했지만 파랑은 처음부터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서로 위험해질 게 문제라면 위험한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나. 주변의 기척을 예민하게 읽어 내 전부 피할 수 있는 파랑에겐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궐을 코앞에 두고 궐을 찾다니.”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사는 곳인데 최도겸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제 집으로 저를 옮겨 두었다면 당연히 가까운 곳일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파랑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곳의 왕을 해칠 귀찮은 짓 따위엔 관심도 없으니 남은 일은 최도겸의 감시가 허술해지는 틈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디 근처 중촌에 일이 있으신 거요? 그렇다면 더 정확하게 알려 줄 수도 있을 텐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반짝거리는 장신구를 구경하며 파랑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냈을 때, 그녀의 묘한 분위기와 하대하는 말투를 의아하게 여긴 상전 주인이 물었었다.

“그럼 혹시, 동궐에 일이 있는….”

“집에 가려고.”

“지, 집이요?”

그즈음 순이가 곁이 허전한 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흙빛으로 질린 얼굴을 하고는 인파를 헤치며 돌아오는 아이를 등진 파랑은 상전 주인의 입단속을 잊지 않았다.

“그래. 내가 물어본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절대로.”

“예? 아, 알겠습니다. 마, 마마님? 이거, 제가 상것이라 궁중의 법도를 몰라서….”

“아씨!”

“아이쿠!”

상전 주인이 파랑을 무어라 부른 것 같긴 한데, 순이가 버럭 내지른 소리에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파랑은 예쁘기만 하고 용도조차 모르는 비녀를 든 채 곁눈질로 상전 주인이 가리킨 길을 기억에 새겨 두는 데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흠… 저기쯤인가.”

어두운 사위에도 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낮에 만난 상인이 알려 준 방향대로 찾아오자 같은 기와집이라도 규모부터 다른 문이며 건물들이 보였다.

“뭐야. 지키는 인간들 많다며.”

최도겸이 하도 겁을 주어 숨을 틈도 없을 줄 알고 긴장한 게 무색했다. 기척을 숨기고 이동하니 딱히 무력을 행사할 일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낮에 위치를 확인했을 때 쳐들어올 걸 그랬다.

아무래도 힘을 잃은 것에 놀라 지나치게 위축돼 있던 게 아닐까. 기죽을 때가 있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무심코 잡고 있던 기왓장 한 장이 퍼석하니 깨지고 말았다. 파랑은 모른 척 반대편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졸음을 참으며 보초를 서고 있던 금군이 소리를 듣고 재빨리 살폈으나 유유히 담장 그림자에 숨어드는 이까지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반듯하게 지은 건물들을 지나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 닿지 않은 것처럼 관리된 후원에 다다랐다. 타 넘을 담이나 건물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대신 숲이 넓어 몸을 숨길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최도겸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주합루와 부용지를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쯤 되니 너무 쉬워서 실망할 지경이었다.

사각 바르게 만들어 놓은 연못을 발견한 파랑의 다음 행동은 하나였다.

“드디어 돌아가는구나. 내 물이 있는 곳으로.”

주저 없이 넘실대는 물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

“음?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건물이 있는 쪽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물이지 않나. 파랑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뭔가 물에 빠지는 소리 같았네만.”

가까운 곳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파랑은 연못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물은 언제 파랑을 꿀꺽 삼켰냐는 듯 금세 파문을 지우고 고요히 넘실댔다.

“…아무것도 없는데?”

“잘못 들었나.”

마침 부용지 근처로 산책을 나와 있던 늙은 각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 세월에 감각이 무뎌진 그들은 금방 의심을 거두고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역시 달구경은 이곳이 최고야. 안 그런가?”

“이 맛에 야직도 서는 것 아니겠나. 다음 날 쉬는 동안 손주 녀석 재롱도 더 보고 말이야.”

“그래도 나이가 들어 그런가, 젊은 최 직각이 대신 번을 서 주는 것이 썩 좋았지.”

“예끼, 이 사람아. 그 혈기 믿고 연달아 밤을 새우더니 결국 아까 피죽도 못 먹은 꼴로 조퇴하겠다고 하는 걸 자네가 봤어야 해.”

사각 바른 연못 터를 채운 물은 얌전히 각신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수면에 닿는 모든 것을 잘 삼켰지만 도통 내놓는 법이 없는, 아주 욕심 많은 물이었다.

“간혹 최 직각이 야직일 때 세자 저하께서 들르셔서 강론을 나누신다더니, 어제도 오신 모양이지?”

“그런가 보이. 그전엔 워낙 저하께서 두문불출하게 잠행을 나가셔서 전하께서도 금족령을 고민하실 정도였다잖나.”

“이거 최 직각이 저하의 예동을 지내어 다행이군그래.”

“저하를 붙들어 둘 최 직각이 오늘 조퇴해 버렸으니 또 동궁이 발칵 뒤집어진 건 아닌가 모르겠네.”

“몰랐나? 아까 자네 서고 들어간 참에 벌써 동궁 내관이 다녀갔다네. 말은 홀로 산책을 나가셔서 이곳으로 오셨나 싶어 와 봤다고 했지만 뭐 뻔하지 않겠나.”

“이거, 오늘도 동궁에 불 꺼지긴 힘들겠군.”

“그만 들어가세나. 아직 밤공기가 제법 차서 자칫하다간 내일 우리 둘 중 누가 병가를 낼지 모르니.”

“들어가서 차 한잔 어떤가. 유람에서 돌아온 내 사촌이 좋은 찻잎을 선물해 주어 내 자네를 위해 특별히 나눠 왔거든.”

“아니, 이렇게 고마운 일이 있나?”

자작한 발걸음 소리며 허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들도 느긋하게 멀어져 갔다. 적요해진 후원은 다시금 바람의 천국이 되었다.

짓궂은 살바람이 부용지 위 작은 섬의 소나무를 스쳐 갔지만 세한삼우답게 구부러진 가지로도 굳건히 버텨 냈다. 바람에 솔향만 실어 보낼 뿐이었다.

“하….”

그 평화로운 정경 속 섬 한편에 머리를 내민 파랑만이 홀로 평화롭지 못했다.

“…대체 뭐야.”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돌아갈 수가 없었다.

역시 반지를 빼는 게 답인가? 달빛을 머금어 은은하게 빛나는 반지를 바라보던 파랑은 다시금 손가락을 잡았다.

손가락 하나쯤이야 없어도 그만, 날카로운 손톱이 제 살을 파고들었다.

“…아윽!”

심장에 또다시 격통이 인 것은 그때였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뼈를 부러트려 손가락을 잘라 내고 반지를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심장이 깨질 듯 요동치는 바람에 파랑은 한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물속에 잠겨 처음 겪어 보는 낯선 통증과 싸워야 했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가라앉은 것은 반쯤 절단한 손가락이 미약한 물의 정기를 먹고 회복된 뒤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파랑은 서서히 숨을 내쉬며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반지를 빼내면 심장이 깨진다.

“그 힘이 언제까지 갈, 크흑, 영원할 것 같으냐? 절대….”

둘이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를테면 반지는 기생충처럼 파랑에게 들러붙어 힘을 끌어모으는 족족 빨아먹고 있는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