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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3)화 (13/197)

“먼 타지에서 와 세상 물정에 대해서는 도통 알지 못할 게다. 답답하더라도 네가 이해하고 천천히 설명해다오.”

“무식이?”

되묻는 아씨를 바라보며 순이는 황급히 제 말을 다시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곤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무… 무! 랑 시래기도 사야 허는 걸 깜빡혔지 뭐여유?”

얼렁뚱땅 파랑이 들고 있는 것을 빼앗아 다시 상전 위에 곱게 올려놓은 순이가 파랑을 잡아끌었다.

“비녀는 안 돼유. 가진 돈도 한참 부족허구, 뭣보담 아씨는 아직 저걸 쓰실 때도 안 되셨구먼유.”

“저걸 쓸 때라는 게 따로 있어?”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파랑이 순순히 포기하며 돌아섰다.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예쁜 건 알아 가지고. 순이는 속으로나마 씨근덕댈 뿐이었다.

“혼인을 올린 여자나 써야쥬. 아씨는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우째 저런 걸 갖고 싶어 하신대유?”

“뭐, 보기에 나쁘지 않던데.”

순이는 평생을 살아도 가져볼까 말까 한 귀한 장신구를 두고 파랑의 평가가 지나치게 박했다.

게다가 ‘내 바다 밑엔 저것보다 훨씬 화려한 보물들이 널려 있다.’는 둥, ‘그다지 가치 있어 보이지 않는데 왜 가진 동전과 바꿀 수 없냐.’는 둥 오히려 순이가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해 댔다.

사실 워낙 사위가 시끄러워 제가 들은 게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순이는 한 귀로 듣고 흘리기로 했다.

“다 사고 나면 떡이든 당과든 좀 살 수 있을 것이어유. 당장 쓰지도 못헐 그림의 떡 같은 비녀보담 훨씬 낫지 않아유?”

다시 어물전으로 가는 동안 파랑이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느라 순이는 내일 일어나면 목이 안 돌아갈 것 같았다.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자칫 부딪쳐 시비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컸다. 그런데 아씨는 그 누구와 살짝도 부딪치지 않고 요요한 걸음으로 사뿐사뿐 순이를 잘 쫓아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주매! 북어 좀 보러 왔슈.”

“순이 왔어? 마리당 엿 푼이야.”

그리고 어물전에 당도할 때까지 파랑은 입을 꾹 다물고 순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저였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신기하고 즐거워 물어보기 바빴을 텐데, 아씨의 관심사는 예쁜 장신구뿐인 걸까. 그렇다면 순이는 혼자 아씨를 까마귀라 부를 셈이었다.

“네 마리 두 전으로 하셔유. 차피 곧 떨이하실 거잖아유.”

앳된 얼굴로 똑 부러지게 흥정까지 하는 양이 밉지 않은 탓에 결국 어물전 주인이 웃으면서 북어를 싸기 시작했다.

“근데 옆엔 누구셔? 때깔이 고운 것을 보니 귀하신 분 같은데 설마, 서촌 각신 나리께서 혼인이라도 하신 거야?”

“아녀유!”

값을 치르려던 순이는 격렬히 손사래를 치다 하마터면 든 것을 떨어트릴 뻔했다.

“집에 오신 손님이어유. 나리께서 운종가 구경이나 시켜 드리라고 하셨구먼유.”

“그래? 근데….”

“물러나시오! 어명이오!”

어물전 주인이 뭔가 더 말하려던 차, 관아에서 나온 포졸들이 우르르 지나가느라 운종가의 인산인해가 일시에 정리가 되는 듯했다.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이 길을 트는 사이에 순이는 재빨리 아씨를 끌어다 제 옆에 딱 붙여 놓았다.

“무슨 일이래?”

“그러게유.”

어물전 주인도, 순이도 의아하게 기다리는 틈에 게판에 방이 붙었다. 까마귀처럼 반짝이고 귀한 것에만 관심을 두는가 싶던 아씨의 시선도 게판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그래 봤자 글을 모를 터라 순이는 얌전히 누군가가 먼저 읽고 소식을 전해 주길 기다렸다.

“아이고, 당장 혼례 준비하던 집들은 어쩌란 말이여.”

역시나 벌써 글자를 알아본 사람들 사이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을 꼼꼼하게 붙인 포졸이 돌아서 삼삼오오 모인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금혼령이오!”

***

순이 혼자였다면 좁은 보폭으로도 한 시진이면 충분했겠지만 살필 사람을 붙여 보낸 터라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지체되었다. 앞마당에서 서성이던 도겸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이와 파랑을 누구보다 먼저 반겼다.

“다녀왔느냐?”

“나리! 우째 나와 계신대유? 아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래유?”

순이가 주인을 보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반색했다. 도겸은 웃으며 아이가 들고 있는 보따리를 살폈다.

“나도 바깥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다. 장은 다 본 것이냐?”

“야무지게 봐 왔구먼유. 얼른 부엌에 가져다 둘게유!”

“그래. 수고했다.”

순이를 보낸 도겸은 뒤따라온 파랑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느냐?”

느긋하게 들어온 파랑의 손엔 아마도 순이가 사 주었을 당과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하얀 뺨이 불룩 튀어나온 것을 보니 달달한 과자를 입에 물고 있는 듯했다.

“밥은 먹지 않는다더니 단것은 입에 맞는 모양이구나.”

나름대로 다정한 인사였으나 파랑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툭 땅에 내뱉어 버렸다.

“내내 따라다닐 거면 그냥 같이 다니든가.”

설마 했지만 역시나였다. 담벼락 뒤에 숨어 있는 기척을 알아차리기에 몰래 시험해 본 것인데, 그리 사람이 많은 운종가에서까지 통할 줄이야.

“어찌 안 것이냐?”

파랑이 감흥 없는 얼굴로 대뜸 도겸의 술띠를 잡아당겼다. 매듭이 풀려 당혹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삽시간에 좁혀진 거리에 도겸의 눈이 커졌다.

“너 자꾸 이리 갑자기…!”

불쑥 다가온 파랑은 도겸의 품에 안기다시피 가슴팍 언저리까지 다가와 코를 킁킁댔다. 도겸은 숨 한 자락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 무엇 하는 건지 묻지 않느냐.”

“어찌 알았냐며. 이 냄새로 알았다고.”

청렴과 더불어 청결해야 하는 선비의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난단 말인가. 무안해진 도겸은 제 옷소매를 코에 대고 냄새를 확인했다.

“내가 다른 이와 특별히 다른 게 있더냐?”

“무기가 없어도 살기가 배어 있으니까.”

“…….”

“너한테는 아주 복잡하게 기분 나쁜 냄새가 나.”

상대방의 기분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난이고 모욕이었다.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처음이라 도겸은 순간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기분이 나쁘다니. 무슨 말을 그리하느냐? 복잡하게 기분 나쁜 건 또 무엇이고?”

“난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야. 처음엔 날붙이들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처음 맡아 보는 냄새인데….”

골똘히 생각하던 파랑은 금방 포기하고 다시금 보퉁이에서 엿을 하나 꺼냈다.

“그러게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될 걸, 넌 뭘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 해?”

그제야 깨달았다. 제 호기심을 채우고자 먼저 이기적으로 굴어 파랑을 불편하게 했음을. 면목 없는 도겸은 즉각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내가 뒤를 밟아 언짢은 게로구나.”

“아니, 언짢을 건 없어.”

파랑의 발음이 약간 어눌해진다 싶더니 하얀 볼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나한테 나쁠 건 없고, 알게 된 것도 있고.”

“알게 되다니, 무엇을?”

궁금해하는 도겸을 빤히 올려다보던 파랑이 갑자기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돌렸다.

“…인간은 정말 나약하다는 거. 진짜 물고기 떼랑 다를 게 하나도 없던데.”

“또 그 소리군.”

분했지만 파랑이 어떤 능력들을 가졌는지 알게 될수록 도겸에겐 반박할 여지가 사라져 갔다.

“너를 알게 될수록 계속 가둬 두는 게 미안해져서 내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안전을 모른 척 내버려 둘 수도 없기에 따라나섰던 것이고.”

“네가 없을 때도 내가 믿을 만한지 보고 싶었던 거잖아?”

마침 이런 상황을 짧게 표현하는 말이 있어 도겸은 즉각 활용했다.

“그런 걸 두고 겸사겸사한다고 하지. 너도 얻은 게 있지 않느냐?”

“뭐, 이거?”

파랑이 달짝지근한 과자들을 들어 보였다.

“안 먹어도 그만이긴 한데, 하도 맛있다기에.”

무심한 눈빛이었으나 부지런히 혀를 굴려 과자를 먹는 모습은 영락없이 작은 소녀에 불과했다. 도겸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소매에서 비녀 하나를 꺼냈다.

아까 파랑이 상전에서 유심히 보기에 뒤따라가 사 둔 것이었다.

“유일하게 관심을 갖기에.”

파랑은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순이에게 들었을 잔소리만 되새길 뿐이었다.

“어차피 나는 못 쓰는 거라던데.”

그야 당연히 순이의 생각일 뿐. 도겸이 다시 확인했다.

“혹 돌아갈 곳에 반려가 있느냐?”

“아니.”

“그래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돌아가서도 이곳에서의 시간이 짧은 유랑이었다, 그리 생각하였으면 싶어 기념품으로 삼으라 산 것이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던데.”

파랑이 비녀를 면밀히 살피며 물었다.

“반려자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찌르는 용도야?”

“…뭐?”

“그러기엔 끝이 뭉툭한데… 아니지, 살갗을 찌르는 게 아니라 찢고 들어가서 더 아프긴 하겠다.”

감동하리라 기대하진 않았다만 파랑은 또 한 번 도겸이 예상하는 범주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아니, 아니다! 이건 그저 여인들이 머리를 장식할 때 쓰는 것이다. 뭐, 간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로 쓸 수도 있긴 하다만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야.”

“아아….”

단순한 의문을 해결한 순수한 눈망울이 지나치게 투명해서, 도겸은 왠지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왜 용도를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살던 곳이 수라도라도 되는가.

혹시 몰라 도겸은 내친김에 함께 산 것도 꺼내 보였다.

“그리고 이건 지금처럼 댕기를 내리고도 쓸 수 있고.”

푸른 비취에 진주와 은으로 장식한 머리 꽂이였다. 비녀만 사려다 눈에 띈 것이기도 했다. 푸른 빛깔이 파랑과 닮지 않았나.

도겸은 파랑의 손에 쥐여 주기보다 직접 꽂아 주는 쪽을 택했다.

“이렇게 쓰는 것이다.”

옆머리에 꽂아 장식하는 건 알았지만 기실 직접 꽂는 것은 처음이기에 도겸의 손길이 약간 떨렸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머리에 꽂은 것이 신경 쓰이는지 파랑이 제 손으로 더듬어 만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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