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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12)화 (12/197)

“지금 입은 것도 답답해서 다 찢어 버리고 싶은데 뭘 더 입으라는 거야?”

“하지만 이리 날이 추운데….”

“왜 자꾸 날 이 땅의 기준에 끼워 맞추려 하냐고.”

불퉁하게 따져 묻자 눈앞의 남자가 허를 찔린 듯이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생김새가 영락없는 사람이니 그렇지 않느냐.”

“아니라고. 나 원래는 이 모습 아니라니까?”

파랑이 또 코피를 쏟아가며 무리할까 싶었는지 최도겸이 더 따지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알았다면서도 파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 때문에 결국 파랑이 먼저 돌아서야했다.

“갈 데 있다면서. 언제까지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을 거야?”

“바로 가도 되겠느냐?”

“안 가면, 발톱만 한 애한테 시달리기밖에 더 해?”

시달리다 못해 자칫 죽이기라도 했다간 시간 낭비는 물론 최도겸도 잃는다. 퉁명스럽게 되묻는 파랑을 바라보던 그가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아니, 아니다. 그냥 좀….”

참으려 하였으나 그럴수록 참기 힘들었는지 그의 웃음이 점차 전신으로 크게 번졌다. 파랑이 보기엔 마치 작은 너울이 큰 파도가 되어 물가에 다다르는 모양이었다.

그때 파랑은 후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처음 듣고 바로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정도로 최도겸의 미소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왜 웃냐니까?”

“아니, 너처럼 작은 여인이 마찬가지로 작은 아이를 두고 발톱만 하다 표현하기에.”

“발톱만 한 걸 발톱만 하다고 하지 그럼.”

제 성체를 보았다면 아마 지금처럼 웃지 못했겠지. 파랑이 뚱해지는 틈에 최도겸이 다른 이유를 하나 더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보자마자 죽이려 하더니 순이는 귀찮아하면서도 막상 죽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말이다.”

“그야 당연히 너는 내 바다를 건드린 침입자인 줄 알았으니까.”

파랑은 역시 길게 고민하지 않고 막힘없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 아이는… 글쎄.”

그러나 의외로 파랑은 순이를 생각할 때 조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비교 대상을 찾던 파랑이 별안간 흙바닥의 어디쯤을 가리켰다.

“너는 개미가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어?”

“뭐?”

키가 큰 최도겸은 파랑이 가리키는 쪽을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약간 숙이기까지 해야 했다.

“아니. 그 정도로 청력이 좋지는 않은데.”

“난 들을 수 있거든. 근데 무시하면 그만이라 걸러 듣고, 의식하지 않으니 굳이 죽일 필요도 못 느낄 뿐이야.”

“…….”

최도겸의 웃음이 멎은 것은 그즈음이었다.

***

“어여 좀!”

치맛단 아래로 드러난 순이의 작은 두 발이 바지런히 땅을 박차며 나아가다가도 멈추기를 반복했다. 가뜩이나 복잡한 장터에 오늘은 딸린 사람까지 있어 보통 번잡스러운 게 아니었다.

빽 소리치고 싶었지만 파랑의 시린 눈빛과 마주하자마자 순이는 그 기세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오시라니께유?”

“뭐가 그렇게 급해?”

춥지도 않은지 아씨는 배자나 아얌도 없이, 마치 봄에 꽃놀이라도 나온 규수처럼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순이의 말간 눈에 비친 안채의 객은 닭장에 잘못 들어온 고고한 학 같았다. 눈을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움찔 겁이 나다가도 이렇게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걸 보면, 정말로 아름다운 이였다.

무서울 정도로 어여뻤다. 오죽하면 호객하느라 입이 두 개라도 모자랄 여리꾼들까지 넋을 놓고 그 눈으로 아씨를 좇을까. 웬 왈짜라도 들러붙을까 걱정이 되어 순이는 한 시도 아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원래 주인 나리와 함께 해주에 간다고 했는데, 평소엔 고분고분 말만 잘 듣던 말이 오늘따라 지랄발광을 해 대다 고꾸라져 기절을 했다나 뭐라나. 덕분에 해주행은 무산되고 주인 나리는 해주에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하셨단다.

“서둘러야쥬. 시방 이 시간이믄 장에 있는 채소들은 벌써 시들시들 해진다니께유? 성한 놈들 구하려믄 배오개(현 동대문 인근)까정은 가야돼유.”

그런데 외출하기로 했다가 취소된 게 마음 쓰이셨는지 다정다감하신 주인 나리께서 괜찮으면 안채의 객에게도 장터를 구경시켜줄 수 있냐 부탁을 하시는 바람에, 순이에게 짐이 하나 달린 것이었다.

주인이 집을 비워야 편한 아랫것인지라 순이는 눈이 호강하고 몸이 고달픈 이 상황이 맞는 건지 긴가민가했다.

“배오개?”

문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아씨가 아는 게 정녕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정말, 하나도.

“아침저녁으로만 선다고 혀서 조석 장이라고, 여기보다 반찬거리가 훨씬 싸고 싱싱한 장터 있어유. 멀진 않은데 남산댁 아주매가 빨리 오라고 성화시니 오늘은 여기서 적당히 사 가야 할 것 같네유.”

“…소리가 너무 많아.”

아씨는 작게 투덜대면서도 고분고분 순이의 뒤를 따랐다. 저 가느다란 손이 했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센 힘으로 저를 메치며 겁을 줄 땐 언제고 뭔가를 하라 시키면 말은 또 잘 들었다.

“심기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네 말을 잘 듣기야 하겠지만, 괜찮겠느냐?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그럼유! 계시는 동안 지가 꼭 잘 모시고 싶구먼유.”

주인 나리는 겁먹은 순이에게 손님을 맡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나리께서 맡겨 주신 일이었다.

나리께 거둬진 후 밥버러지로 산 것이나 다름없어 아이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아 순이가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정신이 하나도 없는 델 어떻게 다니는 거야?”

한편으로는 수려한 미모로 나리를 잔뜩 홀려 놓은 아씨를 제 눈으로 감시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껏 나리께 시집갈 생각만 하며 살아온 순이에게 파랑이라는 여인의 등장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그 어떤 처자라도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허투루 보시던 주인 나리께서 홀랑 마음을 준 여자이기에,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감시하고 나리께 허점을 고해 바쳐야 했다.

그럼 외양에 홀린 콩깍지도 조금은 벗겨지지 않을까.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든다고 혀서 운종가라 불린다니께유. 한눈일랑 팔지 말고 지 옆에 딱 붙으셔유.”

어떻게 보면 아씨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하얀 고양이 같기도 했다. 잡으려 하면 발톱을 드러내고 내버려 두면 옆에 와 치댔다.

“네 기척쯤이야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얄미웠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흰소리를 할 적엔 어디 가서 화라도 입을까 걱정이 되어 또 마냥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순이는 고양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어쩌면 무서워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 중엔 아씨의 아리따움을 계속 보고 싶은 이유도 있지 않을까.

먼저 묻지는 않았지만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광경을 신기하게 보기에 설명해 줬더니 고개를 갸웃거릴 땐 정말이지, 한 마리의 고양이나 다름없었다.

머릿속까지 새하얀 고양이 말이다.

“보자, 저녁엔 북엇국을 끓일 거라 하셨으니께….”

작은 키에 까치발을 들고 사람들 너머로 부지런히 가게들을 살핀 순이가 돌아서 파랑을 찾았다.

“아씨, 저기 보이셔유? 저기 있는 어물전이 지가 허구한 날 가는 가가(假家, 조선 시대의 가게 가운데 하나)여유. 후딱 들렀다 집으로 가면 될 것 같은… 아씨?”

내내 옆에 있던 아씨가 없었다. 명치가 철렁 내려앉았다. 이를 어쩌나. 아무것도 모르는 파랑이 길을 잃었을까 싶어 혼비백산한 순이가 온 길을 급히 되짚어갔다.

“뭐여. 왈짜 놈들이 우리 아씨 잡아가 부린겨, 뭐여?”

파랑을 보고 겁을 먹었을 때마다 더 식겁한 순이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벌써 눈시울이 붉어진 채였다. 아씨는 아마 집으로 가는 길도 모를 터라, 그리고 그 아씨가 바로 주인 나리의 손님이라 순이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순이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드디어 한 잡화 상전 앞에 서 있는 파랑을 찾을 수 있었다.

“아씨!”

“어이쿠!”

안도감과 속상함에 버럭 소리치며 쫓아가자 상전 주인이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이건 엽전 몇 개를 주면 가질 수 있어?”

당연히 순이의 고함을 들었을 파랑은 딴청을 피우며 뒤꽂이며 비녀를 만지작대기만 했다. 잔뜩 뿔이 난 순이가 씩씩거리며 곁에 서도 부질없었다.

“얼마냐니까?”

“예? 아, 그것은… 넉 냥입니다요.”

순이는 울음을 참으며 화를 내기 바빠 순간 알아차리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비녀를 보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뒤꽂이도 권하고, 뒤꽂이를 보는 사람에게 노리개까지 얼렁뚱땅 권할 상전 주인이 어딘가 모르게 얼이 빠져 있다는 것을. 그저 아씨의 입이 떡 벌어질 미모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씨, 지가 잘 따라오라고 혔어유, 안 혔어유?”

“말했잖아. 네 기척은 눈 감고도 찾는다고.”

“그게 말이 돼유?”

“…너도 그렇네.”

“지가 뭐유!”

“내가 못 하면 남도 못 한다 생각하고 고집스레 안 믿는 거. 인간들은 다 그래?”

“그게 무슨 신소리래유?”

“뭐, 됐어. 난 이게 마음에 들어.”

화려한 장식이 달린 비녀를 든 파랑이 턱짓했다. 무슨 뜻인가 싶어 눈을 끔벅인 순이는 곧 버럭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시방 이걸 사라는 거여유?”

“넉 냥이라는 건 너한테 있으니까.”

“…뭐, 뭐시여?”

순이는 누가 뒤통수라도 때린 듯 눈앞이 빙글 도는 기분을 느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이런 심정이 든다고 했는데, 이 나이에 경험할 줄이야.

“네가 가진 동전을 주면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며.”

“말이 되는 소릴 하셔유!”

“말이 안 돼? 왜?”

하얀 낯에 떠오른 투명한 의문은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는, 나아가 ‘염치’라는 게 뭔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싶었다.

작금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요령이 없는 순이는 그저 차오르는 화를 삭이기 바빴다.

“넉 냥이면 쌀이 반 섬인 건 알고 계신대유?”

“아니? 내가 그런 걸 알아야 해?”

“이, 이런 철면피 무식이가 다 있나…!”

기어이 터지려던 차, 혹시 모른다며 주인 나리가 당부해 주신 말씀이 순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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