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리. 잠깐 괜찮은 녀석이다 생각하다가도 여지없이 울화가 치밀었다. 늘 파랑의 앞에 납작 엎드리는 녀석들만 봐 오다 약하디약한 주제에 맹랑하게 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도무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냥 벌벌 떨기보단 목숨을 담보로 우위를 노리는 그 교활함이.
“함께 일을 도모하려는 이가 그래도 최소한의 줏대는 있다, 그리 여겨 주면 안 되겠느냐? 너 또한 나를 완전히 믿고 있지 않은 건 마찬가지일 텐데.”
더 나아가 마냥 복종했다면 오히려 의지하지 않았을 파랑의 흉중을 꿰뚫어본 통찰력까지.
“그냥 죽일까….”
“왜유. 아까처럼 때리기라도 허시게유? 오늘 밤엔 병풍 뒤에 누워서 향냄새 맡아 보는 거여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파랑은 그제야 순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까부터 일부러 더 시비를 걸어 대는데, 쫑알쫑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동안 절대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아마도 최도겸을 믿고 날뛰는 것이겠지. 괘씸했지만 당장은 최도겸의 말대로 하는 게 나아 보였다. 만약 처음 온 곳에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 이후엔 답이 없지 않나.
적어도 여기서 탈출하기 전까지는 그가 필요했다.
“아직도 꾸물대고 있대유?”
순이가 더러워진 걸레를 대야에 넣고 벅벅 빨아댔다. 물소리 덕분에 잡념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곧 파랑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너…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다 괜찮다. 다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물이 더러워지는 꼴만큼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눈이 두 개나 있는데 어따 쓴대유? 걸레 빨고 있잖아유!”
기어이 짜증이 용천수처럼 분출하기 시작했다. 파랑의 눈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네 약해빠진 주인 나리인지 뭔지를 지나치게 믿는 모양인데… 내가 언제까지 놀아나 줄 것 같아? 궐인지 뭔지는 내가 찾으면 되고 돌아갈 길이야 뚫으면 그만인데.”
내도록 느긋하게 참고 버티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이다 여기던 마음이 느닷없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졌다. 파랑은 그냥 여기서 물을 험하게 쓰는 사람들을 하나씩 죽이다 보면 어떻게든 길이 보이지 않을까, 잠시 흉흉한 생각에 잠겨 들었다.
“…나를 막는 것들은 그냥 다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미엔 차라리 이쪽이 훨씬 잘 맞기도 했다.
“어디, 닦은 것 좀 봐유. 파리가 앉았다가도 미끄러져 자빠지게 닦으라고 했쥬?”
“이곳의 인간들이라면 무리하지 않아도 죽이긴 충분할 텐데.”
“시상에, 마룻바닥이 왜 그런 거래유? 긁히고 파이고! 광 내라고 혔더니 괭이질을 해놨구먼유?”
“성체로 변할 수만 있다면 이 땅을 전부 갈아엎는 건 일도 아니겠지.”
답답한 마음에 젖은 걸레를 들고 가까이 왔다가 마침내 파랑이 살벌하게 중얼거리는 내용을 들은 순이가 눈을 끔벅였다.
“아씨, 지금 뭐라고….”
순이의 걸레를 빼앗아 든 파랑의 손 주변에 느닷없이 희뿌연 안개가 생겨났다. 젖은 걸레의 물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생긴 수증기였다.
이윽고 바짝 마른 걸레 조각을 종잇장 찢듯이 부욱 찢는 아씨를 본 순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주 질긴 천으로다가 만든 것인디 그게 우째 종잇장마냥 찢어진대유?”
순이의 둥그런 눈에 순수한 감탄이 가득 차올랐다. 마른 건 걸레였지만 기실 파랑이 말라 죽을 것 같았다. 걸레를 힘주어 짜듯 심장이 뒤틀리는 고통에 숨쉬기조차 어려운 탓이었다.
겨우 작은 천 조각 말리는 데 이토록 힘을 쓸 일인가. 잘게 흩어져 있는 물을 끌어모으는 것보다야 대상이 확실하니 차라리 쉬운 일인데도 심장에 가는 부담이 컸다.
그리고 최도겸의 말대로 반지가 정말 스스로 빛을 냈다.
“…설마.”
“그 힘이 언제까지 갈, 크흑, 영원할 것 같으냐? 절대….”
반지에 힘을 빼앗기기라도 한단 말인가?
“대체 그 버러지는 이런 걸 어디서 얻은 거지?”
힘을 흡수하는 물건이라면 어떻게든 연결을 끊어내는 게 맞았다. 파랑은 주저 없이 반지가 끼워진 검지를 잡았다. 반지가 빠지지 않으니 손가락을 뽑아내면 그만이었다.
“아까부터 혼자 중얼거리기만 하고 대체 이게 뭐래유!”
막 손끝에 힘을 주려던 찰나, 순이가 버럭 화를 내는 통에 파랑은 하마터면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을 뽑아낼 뻔했다.
“사람이 말을 허면 듣는 시늉은 좀 해야쥬! 바닥 이거 어떻게 할 거냐니께유!”
목청이 어찌나 큰지, 살기가 없다고 더 내버려뒀다간 이젠 귀에서까지 피가 날 지경이었다. 참을 만큼 참은 파랑이 결국 냉기 어린 눈빛으로 순이를 응시했다.
비록 검은 눈을 하고 있을지라도 형형하게 번득이는 기운은 여전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넌 조금 자는 게 좋겠다.”
“예? 아직 해도 안 떨어졌구먼 잠은 갑자기 왜…?”
이쯤 되면 아무리 순진무구한 아이일지라도 살벌한 눈빛으로 다가서는 파랑의 위압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순이가 머리로 깨닫기도 전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아까도 잘 잤잖아?”
“…예?”
하얀 손이 무자비하게 어린아이에게 뻗어갈 즈음이었다.
“객을 가르치는 일은 잘되어가느냐?”
때마침 중문을 넘어온 도겸이 사랑채 쪽으로 다가왔다. 안도한 순이가 홀랑 곁으로 뛰어가 그의 뒤에 숨었다.
“나아리! 글쎄 저 아씨가…!”
곧 저 작은 주둥이에서 파랑이 마룻바닥을 망가트린 일부터 제 말을 무시하고 또 겁박한 일까지 쫑알쫑알 나올 게 뻔했다. 귀찮아지고 싶지 않은 파랑은 잔꾀를 부렸다.
“아아, 어지러워라!”
당장 밉보일 일을 만들어서는 좋을 게 없었다. 파랑은 언제 마룻바닥을 부수고 걸레를 찢었냐는 듯 힘없이 주저앉았다.
“…파랑아!”
그리고 예상대로 한달음에 다가온 최도겸이 파랑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어디 불편한 것이냐?”
최도겸만을 믿고 매달리는 순이에게 제 귀를 괴롭게 한 벌을 주고 싶었다. 파랑은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자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손이 이리 얼음장인데 어찌!”
파랑의 차가운 두 손을 꽉 잡은 도겸이 순이를 점잖게 질책했다.
“순이야. 내 분명 처음이니 쉬엄쉬엄 가르치라 하지 않았더냐.”
“나, 나리. 그것이 아니어유! 지는 그저 걸레로 한 번 마루를 닦아내라고만…!”
“되었다. 오늘은 그만 하거라.”
도겸의 냉담한 반응에 순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입술을 씰룩였다.
“…쉬셔유.”
못내 서운했는지 고개만 까딱 숙인 아이가 대야를 챙겨 중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순이가 사라지자마자 파랑은 최도겸의 손을 매정하게 쳐냈다.
“음흉하게 숨어서 지켜보면 내가 모를 줄 알아?”
조금 전부터 중문 너머에서 몰래 기척을 숨기고 있던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멋쩍게 뒷짐을 진 도겸이 아닌 척 굴하지 않고 파랑을 나무랐다.
“아이를 또 기절시키기라도 하려던 참이냐?”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잠깐 재우려던 것뿐이야.”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서는 아니된다 약조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는 것이냐. 응?”
그의 눈이 이미 험상궂게 찢어져 대청 위를 나뒹구는 걸레 조각을 담은 뒤였다.
“꼭 피를 봐야만, 죽여야만 해가 되는 게 아니야. 겁박하여 사람의 혼백을 혼란하게 하여도 아니 된단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상처는 상처가 아니더냐?”
“그럼 저 조그만 애가 긁은 내 화는 화도 아니야?”
“그래서 내 저 아이 먼저 나무라지 않았느냐.”
“웃기지 마.”
아이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하고 있던 것도 모를까 봐? 최도겸의 계산속이야 훤히 들여다보였다.
주인이 파랑을 감싸는 모습을 보여 주면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라 일부러 그랬을 테지. 파랑이 눈을 흘기는 와중에도 최도겸은 뻔뻔스레 굴었다.
“내가 네 편을 들도록 먼저 눈치를 주기에 그리한 것뿐인데.”
말꼬리 잡기도 이쯤이면 충분했다. 의미 없는 자존심 싸움이 지루해진 파랑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근데 넌 왕을 모시는 관리라며. 일은 안 하고 내 꽁무니나 쫓아다닐 참이야?”
“그것도 그렇지만 다른 일도 있어 일찍 온 것이다. 이참에 너와 함께 잠깐 해주에 다녀올까 해.”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해주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 리 없었다. 파랑은 제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짚었다.
“거기가 어딘데. 부용지라는 물에서 먼 곳이야?”
“해주는 서북쪽 황해도에 있는 지역인데 내 숙부님이 계신 곳이고 부용지로부터는….”
막힘없이 줄줄 설명하던 최도겸이 뭔가를 깨달았는지 말을 멈추고 파랑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를 터인데.”
“어차피 돌아갈 건데 알 필요 있어?”
가뜩이나 머릿속이 시끄러운지라 더 복잡해지는 건 사양이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최도겸은 떨떠름한 듯 주억거렸다.
“그래. 알 필요는 없지.”
파랑은 단순히 최도겸이 이 땅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크다고 여겼다.
“그 해주라는 곳이 멀어?”
“말을 타고 다녀오면 그리 먼 길은 아니다. 사흘 안이면 두 번은 다녀올 수 있지.”
그러니까 자신의 할 일에 더해 파랑을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동행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선택지도 안 줄 거였으면서. 마뜩잖았지만 파랑은 더 묻지 않고 승낙했다.
“빨리 가, 그럼.”
당장 출발하려는데 정작 가자던 도겸이 앞을 막아섰다.
“이대로는 아니 된다. 아직 바람이 차서 먼 길을 가려면 배자며 겨울 장옷이라든지, 아얌도 있어야지. 당장 사람을 시켜 준비하게 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배자? 아얌? 그게 다 뭐야?”
“방한복이다. 배자는 지금 입은 옷에 덧대어 입는 털옷이고, 아얌은 머리에 써서 찬기를 막는 것이지. 장옷은 부녀자가 외출을 할 적에 정수리부터 내리 써서 가리는 것이고.”
최도겸은 겨우 옷을 갖춰 입은 파랑에게 뭔가를 더 입히려 했다. 이미 겹겹이 입은 것도 불편한 파랑은 질색하며 도리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