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라도 내어 도와줄 것처럼 굴어놓고 이제와 뒤통수를 치는 모양새였다. 도겸은 파랑이 제 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그대로 숨통을 끊어놓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든 이 부분을 짚지 않고는 안 됐다.
“하나 바로 어제 만난 너의 말 몇 마디만을 무턱대고 믿었다가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긴다면, 그만한 불충이 또 없지 않겠느냐.”
“…멍청한 건지, 충성심이 과한 것인지.”
당장 대로하며 문짝이 아니라 건물을 부술 줄 알았건만, 의외로 파랑은 팔짱을 끼며 혀를 찰 뿐이었다. 단순히 가벼운 타박만 이어졌다.
“죽는 게 두렵지 않은가 본데. 그래서 이런 만용을 부리나 봐?”
“함께 일을 도모하려는 이가 그래도 최소한의 줏대는 있다, 그리 여겨주면 안 되겠느냐? 너 또한 나를 완전히 믿고 있지 않은 건 마찬가지일 텐데.”
“…….”
눈이 마르지 않는지 깜박이지도 않고 도겸을 뚫을 듯이 응시하던 파랑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콧방귀를 뀌며 들으라는 듯이 도겸의 주군을 욕했다.
“이 땅의 왕은 제 한 몸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왕 노릇을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야? 너처럼 나약한 사람이 걱정할 만큼 약해빠진 왕일 게 뻔한데.”
“무엄하다!”
버럭 화를 내긴 했지만 파랑의 언행은 도겸을 도발해 싸움을 붙이려는 것 같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데 무엇이 잘못된 거냐는 표정으로 보아 그저 인간의 한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도겸은 실로 저 신령한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누누이 말한다만 이 땅의 기준으로는 네가 지나친 것이지 결코 주상전하나 내가 약한 게 아니다. 그러니 그런 언행은 삼가는 게 좋겠구나.”
“어쨌든, 결국 네 말은 나 하는 거 봐서 도와주겠다 뭐 그런 거잖아?”
“어린아이를 혼절시키지만 않았어도 며칠은 더 빨리 데려가 주었을 텐데 말이지.”
“안 죽였으니 된 거 아니야?”
“행여 넘어지며 머리라도 크게 다쳤다면 아이는 평생 불구로 살 수도 있었다.”
잘 넘어가나 싶더니 또 한 번 불씨가 튀었다. 둘의 대화는 굽이굽이 거친 길을 낭떠러지를 끼고 걷는 모양새나 다름없었다.
“설마 날 시험한 거야?”
“그건 아니다. 앞서 살기를 느끼고 괴로워하기에 이 집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순수한 아이로 하여금 널 돕게 한 것뿐이야. 무릇 사람은 이치를 깨닫거나 도를 닦지 않는 한 사는 동안 마음에 화가 쌓이고 또한 그것이, 증오와 살기가 되기 마련이니까.”
“핑계일수록 꼬리가 길던데.”
“뭐?”
점잖게 설명 했지만 상대는 이미 비뚤어진 채였다.
“너 지금 쓸데없이 말이 길다고.”
파랑은 등 뒤에서 달랑거리는 댕기 머리를 앞으로 가지고 와 만지작대며 빈정거렸다.
“방금까지 이 땅의 왕은 내가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까 걱정하더니 왜, 그 어린애는 걱정이 안 됐나 봐?”
반신반의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굉장히 줏대 없어진다. 직전까지 줏대 있는 사람이라 열심히 천명한 게 무색하게 몰염치한 파렴치한이 되고 말았다.
“그건 솔직히 말해 나도 기이하다 여기고 자책하던 중이다.”
“기이해? 어째서?”
“그야.”
물과 가까운 존재인 탓일까. 차갑고 자비 없는 모습만 보았음에도 악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파랑을 믿을 명확한 근거는 아닌지라 시간을 두고 더 지켜볼 참이지 않나.
도겸은 모호한 생각을 최대한 간결하게 표출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하여.”
자칫 파랑의 외양에 이끌려 온갖 합리화를 다 해내는 가벼운 사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아직 충분히 저를 믿지 못할 파랑에게 그나마 쌓은 신뢰도 모두 잃을 수 있기에. 돌연 디딤돌 위에 벗어 둔 신을 신고 내려선 그가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을 파랑에게 일러주었다.
“사흘 뒤, 너를 다시 부용지에 데리고 가주마.”
“사흘 뒤? 그때까지 있어야 신뢰가 생긴다는 거야?”
자연스레 버선발로 따라 내려오려 하기에 도겸은 파랑을 마루 끝에 앉힌 뒤 저도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치맛단 밖으로 비죽이 튀어나온 하얀 버선발에 가 닿았다. 디딤돌 위엔 작은 꽃신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신뢰가 생길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때는 화성 행차가 있어 전하께서 궐에 계시지 않으니까.”
어림짐작으로 급히 사온 것이라 불안했는데 다행히 운혜가 파랑의 발에 퍽 잘 맞았다.
“맨발로 다니지 말거라. 살갗이 돌처럼 단단하지 않은 이상 아무리 강한 너라 하여도 피를 흘리며 다칠 수 있지 않느냐.”
벌떡 일어난 파랑이 신은 것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어색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인가 신발 바닥으로 디딤돌을 탁탁 쳐보기도 했다.
“만약 그때까지 기다리느라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러곤 눈을 치켜뜨며 도겸에게 경고했다.
“난 너부터 죽일 거야.”
따지고 보면 도겸의 입장에서만 고려한 조건이긴 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 파랑을 일찍이 궐에 데리고 들어갔다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또한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것은 같았다. 도겸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그럼 부용지의 정기는 얼마나 달랐는지, 기억하느냐?”
“그건 왜?”
“적어도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 정도의 신묘한 물이라면 이 집의 작은 샘과는 확실히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야….”
도겸을 마냥 노려보던 파랑이 큰 눈을 깜박였다. 초점이 약간 흐려지는 것이, 아마 어젯밤의 감각을 되살리는 듯 했다.
“기억 안 나. 네가 날 건드려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느라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무작정 공격하던 이가 누구였던가. 도겸은 굉장히 억울했지만 그 부분은 차치하기로 했다.
“그럼 코피를 쏟고 가슴을 답답해하며 아파했던 것은, 의원을 불러 살펴보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의원? 그게 뭔데.”
“이곳에는 아픈 사람의 몸을 진맥하고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해 주는 의원이 있다. 그를 불러야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걱정스레 물은 말에 파랑이 대뜸 도겸의 가슴팍을 짚었다. 깜짝 놀라 물러나려 했지만 다른 손으로는 술띠까지 잡아당기는 통에 그녀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무, 무엇하는 것이냐?”
“확인하는 거야. 너와 내가 겉모습은 대충 비슷해도 속까지 같을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걸 이리 손을 댄다고 알 수 있는 것이냐?”
“찔러보면 더 확실하긴 하겠지.”
“…….”
뭔가를 가늠하던 파랑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달라. 넌 그게 없어.”
“그것?”
“구슬 말이야. 나는 여기 있는 구슬에 힘을 모아서 쓰는데….”
손끝을 세운 파랑이 도겸의 심장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없다고.”
“구슬? 그, 그럼 너는 설마….”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복부를 가린 도겸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구슬과 정기 따위의 단어들이 모이자 어떤 신묘한 존재 하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설마, 뭐?”
파랑은 멀뚱히 서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입을 달싹이던 도겸은 제가 낸 결론을 되도록 믿고 싶지 않았으나 확인은 필요하기에, 어렵사리 물었다.
“네 정체가… 정말 구미호라는 것이냐?”
***
“그렇게 느려서야, 나무패다가 마루를 새로 짜는 게 더 빠르겄구먼유!”
“닦고 있다고.”
느릿느릿 대청을 닦던 파랑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할 수만 있다면 마루를 전부 부수어서 닦을 필요가 없게 만들고 싶었다. 아까부터 관리 감독이랍시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감시하며 잔소리를 해대는 순이 때문이다.
“다시 부용지에 가 보기 전까진 이 집에 있어야 하겠지. 한데 내 집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고, 입을 수도 없으니 너도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누가 필요하대? 안 먹고 안 입는다는데도 강제로 입혔으면서.”
도겸이 한 말이 떠오르자마자 절로 이가 갈렸다. 곱씹을수록 일찍이 죽이지 않은 것에 매우 후회가 됐다.
말을 섞을수록 얄팍한 녀석은 아니다 싶어 두고 부려볼까 했더니, 영락없이 부려지고 있지 않나. 화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파랑은 손톱으로 마룻바닥을 죽 그어 흠을 냈다.
“이 땅에서는 이름에 본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혹 누가 묻거든 최가 파랑이라 답하면 된다.”
거기다 이곳에서 쓰기에 적절치 않은 이름이라며 멋대로 흠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맑은 물이 오염되는 것만 같았다.
구미호냐 묻기에 겨우 그런 하등한 생물로 보냐며 바로 본래 모습을 보여 주려던 파랑은 또 한 번 코피를 터트리고 말았다.
말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실패한 셈이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최도겸 그자는 이미 파랑이 구미호라고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
“그럼 그 반지는 무엇이냐? 네가 피를 흘리거나 아파하기 전에 꼭 그것이 반짝이던데.”
그렇다고 아주 체면을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약하지만 눈썰미는 좋은 남자 덕에 파랑은 잊고 있던 반지의 존재를 상기하고, 동시에 이 사태의 주범이 바로 반지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으니까.
파랑은 끼고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최도겸의 말을 듣자마자 즉각 빼려고 했었지만 무슨 일인지 빠지지 않았다. 꼭 손가락에 깊은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지금 보니 처음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씨, 나무는 결대로 닦어야 잘 닦인다니께유!”
자유자재로 힘을 쓰지 못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파랑은 냅다 들고 있던 걸레를 패대기쳤다.
“안 해!”
걸레를 대청에 내던진 소리 치고는 다소 우렁찬 소리가 난다 싶더니, 이번엔 마룻바닥이 움푹 파이고 말았다. 소리만 듣고 놀란 순이가 잠깐 기가 죽나 싶더니 돌연 언성을 더 높였다.
“나리께서 하신 말씀 잊었어유? 지 말 잘 들어야 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