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노기가 솟구칠수록 왠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정말로 샘의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도겸은 하얀 입김을 내쉬며 화를 달래려 시도했다.
“내 거기까지 미처 알지 못하여 과한 관심을 기울인 듯싶구나. 너와 내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이니 진정하거라. 응?”
“…어떻게 진정해.”
더없이 낮아진 어조는 마치 칼날처럼 매서웠다. 한겨울 황소바람도, 이른 봄의 소소리바람도 이보다 사납지는 않을 것이었다.
“일단은 화부터 좀 다스린 후에 천천히….”
“뭐가 괜찮아. 이곳의 물에선 정기도 충분히 모이질 않는데. 돌아갈 방법도 모르겠는데!”
여자가 악을 쓰며 분노를 터트리자마자 얕게 언 샘의 얼음도 유리 깨지듯 와장창 깨졌다. 튀어 오른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도겸의 뺨을 스쳐 생채기를 낼 정도였다.
“…괜찮다.”
그러나 도겸은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놀라 나자빠지지 않았다. 흡사 꺾일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처럼 곧게 선 채였다.
지난밤 창에 찢긴 팔이며 얼음에 스친 뺨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고 쓰라렸지만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한결같았다.
“괜찮아지도록, 반드시 그리 되도록 내 너를 도와 함께 방법을 강구할 테니.”
“…….”
“일찍이 말하지 않았더냐. 나보다 널 더 제대로 도울 이는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전히 씩씩대며 도겸을 노려보는 여인은, 꼭 고양이와도 같았다. 조금 더 살을 붙여 표현하자면 어미를 잃고 마음 붙일 곳 없이 하악질만 하며 세상을 두려워하는 갓 태어난 고양이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연일 찬물에 빠지다 보니 정신도 빠진 모양이었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저를 저승 문턱까지 내민 일만 생각하면 그런 약한 생물에 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않나.
“그러니 정기도 제대로 모이지 않는 샘은 더 괴롭히지 말고 이리 나오너라.”
도겸은 여인을 막기 위해 내내 위로 치켜들기만 했던 손을 이번엔 앞으로 뻗어 내밀었다.
“벌써부터 화를 내며 낙담하기엔 아직 이르지 않느냐.”
성을 내며 씩씩대던 여자의 눈길이 냇물처럼 도겸의 눈에서 손끝으로 흘러내렸다.
“…넌 뭔데.”
못내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문 여자가 드디어 도겸이라는 사람에게 흥미를 보였다.
“그렇게 여유로워? 뭘 믿고?”
“논어에 이르기를 욕속부달(欲速不達)이라 하였고 맹자께서도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 하여 경계의 말씀을 남기신데다 또한 손자병법에서는 우직지계(迂直之計)라고도 하였지. 여러 성현들이 같은 당부를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보고 나도 그 뜻을 품어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슬슬 선 채로 얼게 생겼다. 도겸은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뜻이다.”
기껏 좋은 말씀들을 인용하여 알려 줬건만 여인은 가차 없이 냉정했다.
“그냥 짧게 말하면 되는 것을…. 약하디약한 주제에 말이 그렇게 길어서야 급할 때 제대로 도망은 치겠어?”
논어까지 끌고 왔건만 본전도 못 찾은 도겸은 못 들은 척 여인의 손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그런 의미에서 돌아가는 첫 걸음은 통성명이 좋겠구나.”
“…뭐?”
무방비하게 서 있다 얼결에 가볍게 이끌린 여자의 옷고름을 꽉 매어준 도겸이 먼저 제 이름을 밝혔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어 주었다.
“나는 최가 도겸, 최도겸이다.”
샘 앞에 벗어 두었던 가죽신도 여인의 발에 신겨 주었다. 작은 발에 그의 신발은 터무니없이 컸지만 그럭저럭 맨발이 가려지니 다행이었다. 내내 답답했던 것을 해소하고 한결 후련해진 도겸이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파랑과 마주 앉아 서로의 세상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도겸의 심중을 어지럽히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파랑.”
바다에 인 파도가 절벽을 치듯 강하게 트이며 시작되나 부드럽게 흘러 사라지는 발음이었다.
뜻도 발음도 모두 존재 자체까지도 모두 물과 관련된 여인. 도겸은 안채 앞마당을 서성이며 어렵사리 얻어낸 이름을 입에 품고 여러 번 되뇌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어떤 무의식이 빚어낸 행동이었다.
“나리! 와 계셨네유?”
상념에 젖어 있는 도겸을 깨운 이는 안채에서 나온 순이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돌아섰다.
“그래. 좀 어떻더냐?”
“뭐 어떻고 자시고 할 게 있나유. 지는 옷 입는 거나 챙겨 줬구먼유. 첨엔 영락없는 백치여서 저 아씨가 험한 세상 우째 사나 싶었는데, 그래두 한번 말을 허면 찰떡 같이 알아 듣더래니께유.”
파랑은 알까. 겨우 여덟 살 난 아이가 제 세상살이를 걱정해 준다는 걸.
“…잘했구나.”
도겸이 이야기를 들어주며 칭찬하자 우쭐해진 모양이었다. 신이 난 순이가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상에 수저를 몰라 밥을 한 술 뜨지도 못허고, 속곳을 모르질 않나 가슴 싸개도 모르… 에그머니나, 입이 방정이네유.”
굳게 닫힌 문 쪽으로 눈을 한 번 흘기는 것이 아무래도 아까 전 기절시킨 것에 앙금이 남은 듯 했다.
도겸은 너그러이 미소 지으며 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데 당장 입힐 옷은 있었더냐?”
급하게 부탁하여 옷을 지을 겨를도 없었을 텐데. 걱정하며 묻자 대답하기도 전에 순이의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왔다.
“무어, 몸씨 만들면 입으려고 한푼 두푼 모아 지어놓은 옷이 있었구먼유.”
급하게 부탁하다 아이의 소중한 물건을 대책 없이 빼앗은 꼴이었다. 도겸은 소매에서 돈이 든 주머니를 꺼내어 건넸다.
“아끼던 옷을 내어주어 고맙구나. 당장 나가 새 옷 한 벌 지어 입거라.”
“예? 아니어유. 그러지 않으셔도 돼유!”
순이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토실한 손을 휘저어 댔다. 그 손을 잡아 염낭을 올려둔 도겸이 비밀을 나누듯 은밀히 어조를 낮추었다.
“전부 써도 좋다. 몸을 가꾸어 새 옷이 필요해지면 그때 또 지어줄 테니 걱정 말고.”
“예에?”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염낭의 무게감이 상당해 눈알이 튀어나오려는 순이에게 도겸은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어딜 가든 안채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에 대해 입을 열어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눈치 좋은 행랑아범이 어련히 알아서 입단속을 하겠지만 주인이 직접 말하는 것과는 그 효험의 격이 다를 것이다. 아직 사리 분별에 어두운 순이에게는 더더욱.
“그럼유! 걱정일랑 딱 붙들어 매셔유.”
“그래. 고생했다.”
꾸벅 인사한 순이가 종종걸음으로 안채 뜰을 나선 뒤 도겸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마루로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아닌 척하여도 저 신령한 존재를 마주할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그것이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포가 학습된 탓인지, 은연중에 파랑의 위압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나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잠이 들었을까. 도겸은 짐짓 뒤로 물러났다.
“혼자 있고 싶다면 기다려줄 수 있다만 마음이 급하지 않느냐? 서둘러 의논을 하고 싶을 줄 알았는데 무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쉬고 있거라. 나는 급히 다녀올 곳이 있으니….”
쾅!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가 났다. 물러나 있지 않았다면 문짝에 얻어맞았을지도 모르겠다. 깜짝 놀라 반대편 벽에 바짝 들러붙은 도겸이 멋쩍게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문은 열라고 있는 것이지 그리 뜯어내라고 있는 것이….”
완전히 부서져 나뒹구는 문짝을 바라보다 무심코 고개를 든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껏 사람이 아니라 믿으려 애쓴 게 무색할 만큼 영락없이 귀하게 자란 반가의 규수가 그를 보며 서 있었기에. 비록 불퉁한 표정을 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결코 네 방의 문을 잠가 가두는 일은 없을 테니 앞으로는 언제든 가볍게 밀어 열면 된다.”
“내가 처음 나타났다던 그곳이 어디야?”
외양만 지독히 아름다운 규수가 조심성 없이 치맛자락을 홱 잡아 들고 나왔다. 당장 그 품행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무엇이 이 땅의 기준인지도 모를 이에게 무슨 소용일까. 도겸은 잠자코 물음에 답하였다.
“설마 그곳으로 다시 가려는 것이라면 아니 된다. 왕이 계신 궐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니까.”
“넌 거기에 있었잖아.”
“나는 그곳의 관리이기에 가능하지.”
“관리?”
“왕을 모시며 나랏일을 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럼 내가 다시 못 갈 이유가 있어? 네가 거기까지만 같이 가주면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설령 너를 내 친인척이라 불러들인들 그곳은 금원(禁苑)이다. 궐 안에서도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부쩍 낮아진 음성으로 꾹꾹 눌러 말하는 것이, 안 된다고 하면 아마 당장 도겸을 쓰러트리고 궁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도겸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합의를 유도했다.
“말했잖느냐. 내가 그곳의 관리라고. 불가하다 해도 될 수밖에 없는 명분을 만들면 그만. 너도 무리하지 않고 편하게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네가 싫어하는 역겨운 무기를 차고 지키는 군사들이 한둘도 아니라 아무리 너라도 무사히 그곳까지 당도하긴 어려울 것이다.”
줄 듯 말 듯 줄다리기를 하는 도겸 때문에 기어이 파랑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래서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도와준다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왜 자꾸 말이 바뀌지?”
“너를 돕겠다, 돌려보내 주겠다 약조하긴 했지만.”
본분을 잊을 수 없는 도겸은 부디 파랑이 노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차분히 설명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주상전하와 세자 저하의 안위 또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어.”
“그 말은.”
금세 파랑의 눈빛에 서리라도 내린 듯 한기가 차올랐다.
“나를 믿지 못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내가 한 말 잊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