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잠시 잠깐 혼절했던 것이라 사지육신은 멀쩡했습니다. 지금은 아씨 찾겠다고 돌아다니는 중이고요. 아씨 옷 입는 것을 도와드리려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누워 있었고 대체 어찌 된 것인지는 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데, 그저 혼쭐날까 싶어 거짓을 고하는 것이겠지요.”
행랑아범은 모르겠지만 도겸은 어린아이의 말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순이보다 한 척은 더 큰 저부터도 손쉽게 내던진 여인 아니었던가. 순이는 그녀의 기민한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으리라.
“근데 아씨가 어딜 가셨는지 통 찾질 못했는데 어찌합니까?”
불필요한 살생은 귀찮을 뿐이라던 여인이라 함부로 사람을 해하진 않겠지만, 돌아가기 전에 살생이 필요해진다면 문제가 커진다.
도겸은 부디 그 기묘한 여인이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기를 바랐다.
“…다친 사람이 없다면 되었네.”
갈 땐 가더라도 옷가지는 제대로 챙겨 입었어야 할 텐데. 헐벗은 꼴로 돌아다녔다간 시정잡배놈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놈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괜찮은 것입니까? 다들 흩어져 서촌을 전부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는데요.”
“혹 아직 집 안에 있는 것은 아닌가?”
“쓰지 않는 광까지 전부 살폈다만 없었습니다.”
솔직히 의외였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곳에 떨어지자마자 마주친 도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그게 궐 안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든, 돌아가기 위함이든 혼자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무엇보다….
“어매, 어매야, 아아악!”
그때였다.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도겸과 행랑아범이 동시에 소리 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무슨 일이냐!”
“아자씨!”
안채 앞마당에 선 순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작고 통통한 손으로는 이미 눈물이 터진 두 눈을 가린 채였다.
“아자씨, 아자씨. 이를 우짠대유. 우짠대유우….”
“순이야.”
보폭이 큰 도겸이 한달음에 다다라 순이의 어깨를 짚자 아이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했다.
“나, 나리!”
아이를 따라 앉은 도겸에게 순이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한 손으로 작은 샘을 가리켰다.
“여, 여기. 여기 좀 보세유.”
부용지보다야 훨씬 작지만 자연히 물이 솟는 천연 샘이라 도겸의 집에서는 우물을 대신해 쓰고 있기도 했다. 워낙 깨끗한 물인지라 순이가 가리킨 물 안이 훤히 비쳤다.
“못은 왜….”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도겸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기함은 행랑아범이 대신했다.
“아니, 어찌 아씨가 저기에!”
“한참 찾아다니다가 물 마시려구 샘에 왔는데….”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거품도 없었다. 다만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여자의 긴 머리카락만 해초처럼 너울거렸다.
“남의 집 앞마당에서 죽으려고! 아니, 식수로 쓰는 샘에 몸을 던지면 어쩐답니까?”
“…죽은 게 아니라.”
도겸은 주섬주섬 겉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려 하는 행랑아범에게 멈추라 손짓했다.
“살려고 들어간 듯싶네.”
“예?”
“이렇게 증명할 줄은 몰랐는데.”
사람이 아님을, 그리고 흉계를 꾸미고 있는 자객이 아님을 이렇게까지 증명하다니. 경악하기도 지친 도겸은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행랑아범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수 없는 그는 대신 사모를 벗어 넘겼다. 신도 젖지 않게 벗어 물가에 두었다.
“내가 들어가겠네.”
“아유, 암만 볕이 좋아도 물은 얼음장입니다, 나리!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행랑아범이 뜯어 말렸지만 도겸은 벌써 단령까지 벗어 곱게 접고 있었다.
“저 여인이 언제까지 이 집에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때까지 아무도 손대선 안 되네.”
“예?”
“나도 손대도 된다 허락 받은 건 아니지만….”
위험은 혼자 감수하겠다는 뜻이었지만 벌써 찬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들어간 도겸은 구태여 부연하지 않았다. 보기보다 깊은 못이라 금세 턱 밑까지 물이 훅 차올랐다.
몸이 묵직하게 눌리는 감각과 함께 팔다리는 모래주머니라도 매달아 놓은 듯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완전히 물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여인에게 닿을 수 없어 깊은 숨을 들이쉰 채 물 아래로 들어가야만 했다. 눈을 뜨고 흐릿하게나마 시야를 확보한 도겸은 천천히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인은 작은 몸을 아기처럼 웅크린 채였다. 물을 각별히 여기는 기묘한 존재인지라 당연히 익사했으리라 생각진 않았다.
그럼에도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물의 일부인 듯, 혹은 전부인 듯 보여 신묘했다. 감히 손을 대는 게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시각각 숨이 차오르는 와중이었으나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도겸이 막 한 뼘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갈 즈음이었다.
“…….”
“…….”
미처 닿기도 전에 눈을 뜬 여인이 도겸을 마주 보았다. 일렁이는 물결에 흩어질 것 같은 푸른 눈빛은 내내 울고 있던 것처럼 서글퍼 보였다.
이윽고 여인이 입을 달싹였다. 뭔가 말한다면 기포가 쏟아져야할 진데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무슨 말이냐며 입을 연 도겸은 기껏 참고 있던 숨을 쏟아 내고 말았다. 대번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를 본 여인의 눈이 가늘어지나 싶더니 대뜸 도겸의 목을 움켜쥐었다.
기어이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것인가 생각하던 찰나, 작은 손이 강한 힘으로 도겸을 위로 밀어 올렸다. 저항할 수 없이 무력하게 물 밖까지 밀려난 도겸은 본능적으로 한 움큼 숨부터 들이켰다.
“나리!”
“아씨, 아씨는유!”
행랑아범이 도겸을 아예 샘 밖으로 꺼내고자 팔을 잡았지만 도겸이 거절했다.
“순이 너는 가서 안채에 이부자리를 준비하고 아범은 어서 불을 지펴 방을 데우게.”
“예? 아니, 어찌 사람이 아직까지 물속에서 살아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서!”
“예, 예!”
행랑아범과 순이가 안채 쪽으로 넘어가자마자 주변을 확인한 도겸은 다시 큰 숨을 들이켠 뒤 샘으로 들어갔다. 있는 힘껏 숨을 참았으나 폐부까지 찬물이 들어차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여자는 이제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두 귀를 꽉 막고 있었다. 조금 전 도겸을 내쫓을 때의 강한 기세와는 달리, 왠지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 모습에서 어렴풋이 양친을 잃고 밤마다 홀로 숨죽여 울던 과거의 제 모습이 보여 또 한 번 도겸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직 참을만한데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는 애써 머릿속을 비우며 천천히 여인의 하얀 두 손을 조심스레 덮었다. 번쩍 뜨인 눈은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전처럼 목을 조르거나 밀어내진 않았다.
감상에 젖은 이 순간이 지나면 또다시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으며 의심하겠지. 행동 한 자락 말 한마디마다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고 따지고 재고 가늠해 볼 테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낯선 세상에 뚝 떨어져 지독히 외로워 보이는 이에게 저마저 박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
점차 숨이 닳아 폐부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연히 얼굴에 괴로움이 묻어났으나 어째선지 이번엔 여인이 도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 도겸의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도겸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가 싶더니 닿은 손을 밀어내고는 대뜸 위를 가리켰다.
방해받기 싫으니 밖으로 꺼지라는 뜻인가? 또 한 번 내쫓길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여자가 먼저 샘 바닥을 박차고 위로 올랐다.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있던 도겸도 더는 물속에 있을 이유가 없어 뒤따랐다.
“푸하!”
거친 기침을 해가며 숨을 몰아쉬는 도겸에게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정말이지 약하구나. 물고기가 하등하다 할 땐 언제고 물속에서 숨도 못 쉬고 쩔쩔매는 꼴이라니.”
“이 땅에서는 물에서 숨을 쉬는 네가 이상한 쪽이다!”
억울함에 따져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샘터에 걸터앉아 긴 머리를 매만지는 여자는 코웃음 치기만 했다.
“그러게 왜 따라 들어와? 내가 잘 때 방해하면 죽인다고 했을 텐데.”
“자는 건지 죽은 건지 확인은 해 보아야 하지 않느냐.”
“그럼 살아 있다 확인시켜 줬는데도 다시 들어온 건, 이번에야말로 죽고 싶어서 그런 거지?”
못 밖으로 나간 도겸이 술띠를 풀고 답호를 벗는 동안 여자는 춥지도 않은지 하얀 다리를 물에 담그고 첨벙거렸다. 부녀자가 사사로이 맨발을 드러내다니, 도겸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 옷의 물기를 털었다.
“…물에서 꺼내려 했던 것이다. 물이 얼음장 같기에.”
“얼음으로 만든 창을 쓰는 걸 봤으면서 아직도 네 기준을 고집하는구나.”
뚱한 대꾸와 함께 다시 물에 들어가려는 여인의 어깨에 도겸이 제 옷을 덮었다.
“부지런히 납득하고 믿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너도 새벽 나절에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무턱대고 기다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럼 가만히 기다릴 것이지 왜 자꾸 거추장스러운 걸 입히려는 거지? 너도 그렇고 아까 그 발톱만 한 아이도 그렇고!”
도겸의 고집을 모두 감수할 정도로 도량이 넓고 깊지는 못한지라, 여인이 금방 짜증을 터트렸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당장 먹고 입는 것 정도는 해야 하니까.”
“귀찮게 하지 좀 마. 몇 번 봐줬다고 어디까지 기어오르려는 거야?”
“네가 사는 곳에선 모두가 헐벗고 다니는지 몰라도 이곳의 법도는 다르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은”
“갈 거야. 갈 거라고!”
빽 소리친 여인이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 듯 처연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긴 속눈썹 끝에 걸린 자그마한 물방울이 하얀 얼굴 위로 똑 떨어져 미끄러졌다.
“숟가락이니 젓가락이니 그딴 거 써서 뭔가를 먹을 필요 없어. 난 그냥 물의 정기만 마셔도 충분하다고. 속곳 같은 거, 저고리 따위 입지 않아도 전혀 춥지 않아. 내가 옷 좀 안 입는다고 여기서 날 제지할 수 있는 인간이 있기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