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7)화 (7/197)

“사정이 있어 그러니 그 여인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특히 심기 거스르게끔 하지도 말고 원하는 게 있다고 하면 다 내어 주거라. 네가 혼자서 어려운 게 있다면 아범을 즉시 내게 보내어 연통을 넣어도 좋다.”

대체 왜 주인 나리께서는 저렇게 근본도 모를 아씨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주라 하시는 걸까?

설마, 그동안 여인 보기를 돌 같이 하시더니 미처 저 미모에 가린 무지몽매함도 못 보신 게 아닐까?

“아직 그래도 날이 차서 옷을 안 입으면 금세 고뿔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어째 그냥 두고 나간대유? 얼른 입으셔유, 자!”

“난 경고 했다. 너처럼 작은 미물일수록….”

“나리께서 꼭 아씨의 몸을 따뜻하게 해 드리라고 했단 말이에유. 일단 다리속곳부터 차고 속속곳이랑… 어디 보자, 속속곳 입고 가슴가리개도 해야 하고 이 고쟁이, 그 위엔 단속곳이랑 요 바지도 입어야 돼유. 속적삼은… 옳거니. 요걸로 입으면 될 것 같네유.”

나리께선 미룰 수 없이 중한 일만 처리하면 바로 퇴궐한다고 하셨다. 단장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래저래 바쁜 순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낯선 아씨는 굼뜨기만 했다.

“혹 지금껏 저범질 한 번을 안 해 보고 다리속곳 한 번 안 입어본 것 아니어유? 그렇지 않고서야!”

“…작은 미물일수록.”

주인 나리의 당부는 까맣게 잊고 칭찬을 받고 싶은 욕심에 아씨를 들볶던 순이는 다음 순간 허공에 붕 떠 있었다.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리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아씨의 음성이 들릴 즈음, 눈앞이 까맣게 암전됐다.

***

“안색을 보니 기어이 밤새 책을 읽은 것 같은데.”

할 일이 많았지만 도겸은 잠시 동궁전에 들렀다. 비록 세자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지청구가 날아들긴 했지만 말이다. 도겸은 우선 차분하게 예부터 갖춘 뒤 정좌하며 대꾸했다.

“저하께서 독한 술을 하사하여주신 덕분에 책은 그리 읽지 못했습니다.”

제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필시 그 묘령의 여인 탓이었지만 성급하게 밝혀서 좋을 것 같진 않았다. 가뜩이나 양 어깨가 무거운 언에게 근심거리를 더해 주고 싶지도 않기도 했다.

“술이라도 못하니 자네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겠지.”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언은 바깥에 대고 피로 회복에 좋은 차를 내어오라 명했다. 도겸을 만날 때 비로소 편안해지는지 서안에 비스듬히 기대기도 했다.

“그래. 예까지는 어인 일인가? 평소엔 괜한 의심을 산다며 걸음조차 하지 않더니.”

슬슬 용건을 꺼내보라는 명령에 도겸은 잠시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각오는 이미 중희당까지 오는 동안 모두 마쳐둔 뒤였다.

“간밤에 나눈 이야기 말입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화두인지 언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국혼 문제 말인가?”

“훙서(薨逝)하신 빈궁마마 두 분 모두, 그 사인이며 상황이 분명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어허.”

일단 말을 멈추게 한 언이 바깥쪽을 살핀 뒤 자세를 바로 하며 도겸에게 더욱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둘은 언의 서안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자네답지 않아. 백주 대낮부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연유가 뭔가?”

“이번 간택에 좌상의 여식이 이미 내정되어있다 들었습니다.”

언의 낯빛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러나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궁 안엔 비밀이 없다더니 역시 소식이 빠르군. 자네는 어찌 알았나.”

“우연히 후원에서 좌상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사주단자를 넣는다는 말이 아니라 세자빈으로 들이려 한다, 분명 그리 말했고요.”

“나는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릴 적에 들었다네. 번갯불에 콩이라도 볶으려 하시는지 당장 금혼령부터 내리신다더군.”

도겸은 한층 더 어조를 낮추어 단언했다.

“막아야 합니다.”

“막는다?”

언이 말이 되냐는 듯 낙담한 눈으로 되물었다.

“기어코, 이번 국혼으로 저들이 터를 다지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정쟁은 서로에게 좋은 성장의 발판이 될뿐더러 나아가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곪기 마련이다.

상권을 바탕으로 몇 년 새 몸집을 키운 중신들의 권세는 외척세력과 결합해 이제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를 피하고자 그들과 상관없는 가문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들였지만 연달아 둘이나 요절하고 나니 남는 것은, 두 번의 국혼에 아까운 국고를 낭비했다는 백성들의 원망뿐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연이어 흉년이 들자 세자인 언에게 갈수록 더 큰 비난을 쏟아 냈다. 심지어는 세자빈을 들여 세자의 액을 막아낸 것이라는 소문까지 저자에 나돌 정도였다.

“다 세자빈을 지키지 못한 내 탓이다.”

그 소문은 언을 구중궁궐의 겹겹이 둘러 선 높다란 담장이 되어 언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옭아맸다.

“저하의 탓이 아닙니다. 두 분이 그리되신 건 저들이 저하께서 아직 어리신 그 찰나의 사이를 간악하게 이용한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심증일 뿐이지. 내 덕이 부족해 빈들을 잃었다 봄이 지금으로썬 더 설득력이 있지 않겠나?”

“적어도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도겸이 핏발 선 눈으로 꾹꾹 눌러 말했다.

“더 이상 빈궁의 횡사는 없다는 겁니다. 저하께서 장성하셨고 궐 안엔 이제 저도 있지 않습니까.”

세자가 어떤 사람인가. 모든 것을 잃고 혼자가 된 도겸의 곁에 있어 준 유일무이한 벗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도겸이 벗의 곁을 지킬 때였다.

“적어도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궁의 지밀나인이 다과상을 들여와 놓아주는 동안 둘은 도겸의 말을 끝으로 침묵을 지켰다. 두 사내는 나인이 천천히 나가 문을 닫기 전까지 점잖게 고운 찻물을 음미했다.

그러다 잔을 내려놓은 도겸이 불시에 다시 끊긴 맥을 이었다.

“…그런데도 이리 무력하게 저들이 원하는 대로, 저들이 원하는 세자빈을 들이실 참이십니까?”

언의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언뜻 눈에 띄지 않았지만 본디 작은 자극에도 그 안에 전해지는 충격은 더 큰 법이었다. 잔에 담긴 찻물이 찰랑였다.

“방도가 없질 않느냐. 두 번이나 대신들의 권고를 꺾으셨던 터라 이번만큼은 아바마마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슬슬 도겸은 동궁의 방문 목적을 분명히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좌상의 여식을 이미 내정해두었다면 금혼령이 내려지는 범위도 좁아지겠지요.”

“어제까지는 가례도감에 전보다 많은 관리를 배정하여 전국으로 파견을 보내겠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었지.”

“그 말씀만큼은 쭉 이어져야 합니다.”

“어째서?”

“해주에 계신 제 외숙께 방년 열일곱이 되는 여식이 있습니다.”

“…그 말인 즉!”

대번에 뜻을 이해한 언이 거센 힘으로 잔을 내려두었다.

“네 혈육을 이 간택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이냐?”

“전국으로 세자빈 후보를 물색할 범위를 넓히면 초간택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세자빈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리 말했거늘!”

부지불식간에 눈을 뜨고 코를 베인 왕족이 꼭두각시가 되어 휘둘리고 있는 형국이었기에, 어떻게든 수를 써야 했다. 국혼이 결정되어 식을 치르고 있지 않는 이상 아직 늦지 않았음이다.

“간택을 지체시키려 합니다.”

“…무어라?”

“우연이 반복된다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닌 법입니다. 빈들이 급사하고 이로 인해 이득을 얻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주상전하와 저하께서 백성들로부터 충을 잃고 의를 잃는 동안 곳간을 채우고 명분과 권력을 얻은 자들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

“이제 세 번째 빈은 그저 오래 살기만 해도 명망을 얻게 될 겁니다. 기다리면 언젠가 비는 내리게 되어있고, 그 하늘의 은혜조차 또한 자연히 세자의 액을 막아낸 세자빈과 그 외척 덕분이라 하겠지요.”

그렇다고 세자나 제가 손에 피를 묻혀가며 새로운 세자빈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같은 우를 범한다면 결코 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두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그 전에 막아야 한다.

“이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다소 급작스럽게 동궁에 들르느라 서둘러 서촌으로 돌아왔음에도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는 시각이었다.

“나리!”

그리고 드디어 집에 막 다다를 무렵, 단령 자락을 휘날리며 걷던 도겸은 대문 앞에 나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행랑아범과 마주쳤다.

“아범이 왜 예까지 나와 있나.”

“어찌 규장각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일이 생기면 언제든 규장각에 연통을 넣으라 하셔놓고요!”

“아, 급히 동궁에 갈 일이 있어….”

무심히 답하던 도겸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큰일 났습니다. 나리께서 데려오신 아씨가 사라졌지 뭡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노라 약조를 하였는데 어찌. 거기까지 생각하던 도겸은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라지다니.”

애초에 어떻게 아무런 계산 없이 그 여인을 함부로 믿은 것인가. 돌이켜볼수록 도저히 스스로를 납득 할 수가 없었다. 궐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은들 백성의 안위를 내팽개쳐서는 안 될 일인데 어찌 홀린 듯이 그 말을 덥석 믿어서는.

…정녕 그 여자가 구미호라도 된단 말인가?

“다친 이는 없는가?”

“저, 그… 순이가.”

“순이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색이 된 도겸이 바람처럼 대문간을 지나고 중문 너머 안채로 향했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순이 그것이 이 나리의 말씀을 까맣게 잊고 아씨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인데, 옷가지 보따리를 들고 들어가 놓고 웬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 급히 가보니 말이지요.”

종종걸음으로 허둥지둥 도겸을 뒤따라온 행랑아범이 주절주절 상황을 설명했다.

“애는 안채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있고, 아씨가 뵈질 않더란 말입니다.”

“아이는, 아이는 어디에 있나. 크게 상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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