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친자식 같다며 꺼내는 말엔 좋은 소리가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진짜 부모 자식 간에도 조심스러울 일이 아닌가.
여러모로 도겸을 건드리는 이야기뿐인지라 기어이 숨기고 있던 날이 비죽 튀어나오고 말았다. 움찔 놀란 송현익이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아니, 그, 그렇지 않네! 다른 이도 아니고 내 셋째 딸과의 혼담을 권하려고 한 것인데 어찌!”
“감사한 제안이오나 한낱 제 혼사보다는….”
도겸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소신을 밝혔다.
“세자 저하를 보필할 건실한 빈궁마마를 모시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직제학 영감.”
입바른 소리에 겸연쩍어진 송현익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매만졌다.
“무어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 있나. 자네가 저하와 예동 시절부터 절친하여 각별한 것은 나도 안다만 자네도 가문이 있고 이어야 할 유지가 있을 터인데?”
송현익이 왜 이렇게 혼인을 서두르는지, 도겸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칫 딸이 세자빈이라도 됐다가 개죽음을 당할까 싶은 노파심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도 철없는 아들이 대책 없이 덥석 부인을 맞이하여 고생시키길 원하진 않으실 겁니다.”
아마 그 댁의 딸은 간택에 참여해도 절대 세자빈이 되지 못할 것이라며 불편한 진실을 새겨주는 것보다야 분위기라도 가볍게 만드는 게 나았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 뒤로 늘 부모 없이 자라 근본도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놈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는 것을.”
“그 무슨 소린가. 자네가 그런 작자가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지 않겠나!”
“그 말씀만 감사히 받아두겠습니다. 다만 제 혼례는 저하의 국혼 뒤에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허리 숙여 인사한 도겸은 평소보다 큰 보폭으로 빠르게 규장각을 나섰다.
***
임금이 지나는 어수문 옆 작은 협문으로 나서며 또 한 번 상체를 굽힌 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보인 것은 사각형의 연못이었다.
지난밤 본 것이 아주 많을 텐데도 물살은 가느다란 바람에 요요히 몸을 맡기고 살랑이기만 할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미치고 펄쩍 뛸 만큼 정신 사납고 괴로운 것은 오롯이 도겸의 몫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날 죽이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고 싶었던 건가?”
현장을 다시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운 와중에 머릿속 깊이 가라앉았던 기억 조각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당시엔 이해 못 할 말들뿐이라 들어도 들은 것 같지 않았는데, 그 여인의 차원이 다른 힘을 생각해 보면 하나는 납득은 됐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것 같은 그 오만함과 방자함이.
“후….”
언제나 원리 원칙대로 처리하던 그가 직감에 따라 파랑을 금군에 넘기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아니, 못 한 것이라 보는 게 더 옳았다.
처음엔 감옥에 가둬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 궐에서 멀리 떨어트려 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숨긴 꼴이 되니 골치가 아파왔다.
“이거 도통 보기 힘든 사람을 예서 만나는군.”
집에 가 그 대단한 여인을 상대하기에 앞서 이런저런 궁리와 준비를 해두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차, 누군가 도겸의 앞길을 막아섰다.
“…좌상께서 이곳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라니. 이곳 정경이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기에 제격이지 않나.”
아마 짐승이었다면 털을 바짝 세우거나 발톱을 드러냈을지도 모르겠다. 도겸이 긴장하는 사이 좌의정 조익환은 뒷짐을 진 채 여유로이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내 저 어수문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나 가끔 이렇게 후원을 찾는다네.”
“그럼 방해 않겠습니다.”
다른 누군가라면 실세나 다름없는 좌의정에게 줄을 대기 위해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려 기를 썼겠지만 도겸은 아니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고개를 숙인 뒤 돌아서는 그의 등에 조익환이 한마디를 더했다.
“많이 닮았구먼.”
그대로 멀어지려 했다. 조익환의 다음 말을 듣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자네 아비와 말이지.”
표정을 굳힌 도겸이 천천히 돌아섰을 때 조익환은 이미 부용지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늘 웃는 사람인데 왜 경계심이 앞설까.
어릴 적 조익환을 처음 봤을 때 뜻 모를 한기를 느끼고 아버지의 도포 자락 뒤에 숨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낚시는 좀 하나?”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몇 번 해 본 게 전부입니다.”
“그래. 기억이 나네. 어린데도 썩 감이 좋았지 자넨.”
흐뭇하게 웃은 조익환이 도겸에게 넌지시 권했다.
“언제 한 번 나와 낚시 하러 가지 않겠나?”
“대감과 낚시 하려는 이들이라면 지금도 북촌에 줄을 서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원이 다 풀리고 나야 제 차례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또한 둘러 거절하자 어렵지 않게 뜻을 읽어 낸 조익환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대쪽 같은 성정까지 대사헌 영감을 쏙 빼닮았군. 그 어린 나이에 뒤를 봐주겠다는 내 제안을 당차게 거절할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지 모르겠다만.”
“그때 대감께서 제 후견인이 되셨다면 저는 지금 온전히 세자 저하의 사람이 되진 못했을 것이 아닙니까.”
다소 도전적인 말이었다. 조익환의 수면에 호기롭게 돌을 던진 도겸은 찰나의 순간 온유하던 물결에 파문이 이는 것을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물론 잠깐이라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조익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세자 저하와 대적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역시 한양의 호랑이답게 수염을 약간 잡아당기는 패기 정도로는 쉽사리 깨어나지 않았다.
“진정 그랬다면 내 하나뿐인 여식을 세자빈으로 들이려 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말이야.”
“…예?”
“오래전에 자네 선친과 자식들의 혼인을 약속한 적도 있네만, 세록지신(世祿之臣)된 도리로서 마땅히 여식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나.”
슬슬 세도가의 여식이 간택에 참여할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조익환의 딸일 줄이야. 간택을 위해 양녀라도 들였다는 뜻인가.
“대감댁 따님이라면… 오래전 병환이 있다 들은 적 있습니다만.”
“하긴 자네는 오래전에 보고 못 봤을 테니.”
도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조익환이 전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어려서는 영 몸이 약해 이 애비의 속을 어찌나 태웠는지. 그래서 물 좋은 곳으로 오랫동안 비접을 보내놓았더니 이제는 쾌차하다 못해 또래 규수들보다 지나치게 활개를 쳐서 속을 태운다네.”
“…….”
“어떤가. 이 정도면 앞서 허망하게 가 버린 세자빈들보다야 훨씬 장수하지 않겠나?”
옷소매 속 꽉 쥔 주먹 위로 하얀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은 부글부글 타들어가는 속을 들여다보고 풀무질이라도 하는 것인지 조익환은 도겸의 도발에 잊지 않고 반격을 해 주었다. 도겸은 억지로나마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어쨌든 쾌복되었다니 감축드릴 일이 아닙니까.”
“걱정해 주어 고맙네. 그럼 나는 슬슬 윤대가 있어 이만.”
이미 말끔한 홍포를 보란 듯이 다시 한번 가다듬은 조익환이 유유히 도겸을 지나쳐갔다. 가뜩이나 아픈 골치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를 어찌한다. 도겸의 시름이 깊어졌다.
***
“시상에, 다리속곳조차 입지 않은 것이어유?”
대충 묶여 있던 도포를 열자마자 드러난 뽀얀 알몸을 본 순이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보따리를 풀어 자그마한 천 조각을 꺼내는 포동포동한 손가락들이 분주했다.
옷부터 꼼꼼하게 입히고 미친년처럼 풀어헤친 머리도 곱게 땋아 댕기까지 드려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었다.
주인 나리께서 이른 아침부터 긴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제게 시키신 일이었다. 꼭꼭 잘해 내고픈 순이의 의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다리속곳?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저 곱디고운 아씨가 영 순순히 움직여주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매야, 그게 뭔 소리래유. 자고로 여자는 아래가 차면 안 된다니께유. 쓸데없는 고집일랑 말고 얼른….”
“손대지 말라니까?”
“에그머니나!”
분명 아씨는 가볍게 쳐낸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 방바닥에 벌러덩 넘어진 순이는 볼기짝을 문지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렇게 밀어서야 볼기짝이 깨지것슈?”
마음 같아선 대거리라도 하고 싶었으나 순이는 꾹 참았다. 주인 나리께서 각별히 조심하라며, 말을 좀 듣지 않을 순 있지만 절대 심기를 거스르게 해선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주의를 주신 탓이었다.
그래도 절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하지만 그다지 조심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을, 순이는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 깨벗고 돌아다녔다간 제 명에 못 산다니께유! 얼른 입으셔유.”
아범의 말로는 야간근무를 서고 오신다던 나리께서 느닷없이 해가 뜨기도 전에 저 아씨를 업고 들어오셨다고 했다. 궐에 계셨을 나리께서 어찌 저런 아씨를 만났는지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점들이 속속 드러났다.
기껏 식사를 준비해 왔더니 숟가락이며 젓가락도 쓸 줄 모른다고 하면서 맹물만 들이켜질 않나, 이제는 속곳조차 필요 없다니 말이다.
“됐어. 시끄러우니까 그 입 좀 다물고 나가.”
생긴 건 이슬만 먹고 사는 선녀의 미색을 하고서는 모양 좋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마디마디 바늘이 돋쳐 있었다. 순이는 눈을 도르르 굴려 가며 아씨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조선 제일간다는 기생들 뺨을 여지없이 후려칠 만큼 어여쁜 여인이다. 험한 일 한번 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희고 여린 수족은 도무지 못 배워먹은 천출로 보기도 어려운데 대체 왜, 숟가락조차도 처음 보는 눈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