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갓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지라 겁이 나기야 하겠지. 파랑은 한 수 물러 주기로 했다.
“어차피 그런 걸론 날 죽일 수 없어. 근데….”
다만 머리가 아플 정도로 불쾌한 냄새를 더는 참아 주기 어려웠다.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그 쇠붙이들은 빨리 치워. 역겨우니까.”
“…네 앞에서는 숨겨 봤자 소용이 없겠군.”
녀석이 헛기침을 하며 소매며 품에서 날붙이를 꺼내는데 가만 기다리던 파랑은 질린 듯이 물러났다.
“됐어. 그것들 아니어도 어차피 사방에서 느껴지니까.”
언제 기습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구는 파랑을 보는 녀석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너는 이런 무기가 없는 곳에서 온 것이냐?”
“적어도 그런 조잡한 무기는 없는 곳이지.”
많이도 숨겼다. 여러 겹으로 입은 의복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무기의 개수를 대충 파악한 파랑이 불쾌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는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 거기에 서린 살기를 느끼는 거다. 그게 역겨운 거고.”
파랑이 사내에게서 느끼는 불유쾌함은 살기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뭔가 더 복잡해 보였지만 깊게 알아낼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감춘 물건에서도 살기를 느낀다?”
녀석의 검은 눈망울이 번뜩였다. 흥미로운 눈빛은 금방이라도 파랑을 해체해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분명 힘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음에도 파랑은 왠지 모르게 그 눈빛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왜, 너는 못 느껴?”
물어보면서도 내심 파랑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 건조한 세계에 저는 완전한 이방인이라는 것을. 제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이렇게 낯설고 메마른 기분에 살갗까지 따끔거리진 않을 테니 말이다.
“…너는.”
뚫어져라 파랑을 바라보던 남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억지로 삼키듯 어렵사리 결론을 내렸다.
“역시 사람이 아니구나.”
자신보다 체격은 훨씬 컸지만 체력이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폭이 전혀 달랐다. 파랑이 일찍이 저 남자가 용이 아니라고 판단했듯 상대도 마찬가지인 것이리라.
“먼 타지에서 온 자들 중 파란 눈을 한 자는 봤지만 너처럼 청옥을 녹여 물들인 것 같은 머리카락까지 가진 이는 없었다.”
홀린 듯 촛대를 들어 가까이 다가온 녀석이 또다시 검은 눈을 반짝였다. 제 손아귀 아래에서 죽을 뻔한 것은 벌써 잊은 걸까.
두려움이나 경계의 감정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흡사 물처럼 순수한 기운이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작은 불꽃의 열기마저 불쾌하게 느꼈을 파랑이지만 잠시나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면밀히 파랑을 관찰하며 자문자답했다.
“끝도 없이 만들어 내던 얼음 무기도 그렇고. 아, 그때마다 네 손에 그….”
…약하지만 순수한 동물인가, 사람은? 의문이 생긴 파랑이 말허리를 자르고 불쑥 물었다.
“여긴 너처럼 약한 사람만 사는 곳이야?”
“뭐?”
“근처에 기척이 꽤 많은데. 아무래도 약하니까 무리지어 살아야하는 거겠지? 물고기처럼.”
“무, 물고기라니! 어찌 그리 하등한 생물과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냐!”
당연한 이치를 말했을 뿐인데, 자부심 강한 사람은 또다시 파랑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에서 갑작스레 기함하며 열을 올렸다.
“단순히 물고기처럼 떼를 지어 천적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함이 아니다. 찬바람을 막고 물이 가까운 곳을 찾아 터전을 마련하다 보니 자연스레 촌락이 되어 모인 것일 뿐 사람은 보통 가족 단위로….”
“아니면 아닌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길어?”
대체 왜 내내 침착하다 사소한 부분에서 뜬금없이 화드득 타오르는 걸까. 파랑은 도무지 녀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 날 만족시킬 거냐고.”
어차피 제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만, 사람에게 아가미가 있든 없든 관심 없었다. 파랑은 혼자 잔뜩 오해한 남자를 내버려 두고 감흥 없는 눈으로 물을 찾았다.
온갖 냄새가 섞여 정신이 사나웠지만 다행히 물은 가까이에 있었다. 쟁반 위에 놓인 주전자를 찾아낸 파랑은 그 독특한 모양의 물건을 관심 있게 관찰하면서도 입으로는 일부러 냉정하게 굴었다.
“너나 나나 각자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난 침입한 게 아니라 내 물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거기였을 뿐이라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원하는 게 있을 리 없잖아.”
푸른 어둠이 점차 걷히고 사위가 밝아지고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했다는 뜻이 아니면 무엇인가. 조바심이 난 파랑이 주전자를 끌어안고 막 남자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불필요한 살생은 나도 귀찮을 뿐이야. 그러니까 네가 할 일은 나를 다시….”
“…너!”
깜짝 놀란 남자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밤이 지나는 내내 그가 놀라고 기함하고 아연해지며 실색하고 경악하는 모습만 본 파랑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그가 긴 손가락으로 파랑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색이, 변하였다.”
“색? 변하긴 뭐가 변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긴 머리칼을 내려다본 파랑은 그대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란 머리카락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아직 잠에 빠졌다 느닷없이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이 어이없는 상황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건만.
“머리 색이 바뀌었다.”
“…….”
“…눈동자조차도.”
눈앞의 남자가 위험한 날붙이의 역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드디어 당혹감에 사로잡힌 파랑의 감정을 읽어 냈을 테니까.
“몸의 색을 자유롭게 물들여 바꾸는 재주도 있었느냐?”
또 한 번 기막혀 하는 남자를 두고 파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능력은 없었으니까.
***
“아니, 최 직각이 어인 일인가? 당연히 오늘도 야직을 서겠다 고집을 피울 줄 알았더니.”
“송구합니다. 고뿔이라도 든 것인지 몹시 고단하여… 급한 일은 모두 마쳐두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직제학 송 씨가 의아한 눈으로 도겸을 면밀히 살폈다. 도겸은 거짓을 들킬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밤에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느라 핼쑥해진 얼굴이 거짓에 설득력을 더해 주었다.
“내 자네를 본 이래로 이리 상한 낯은 처음이구만. 지난밤에 부용지 그 찬물에 빠졌다던데, 무어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예.”
“응?”
무심히 진실을 고할 뻔한 도겸이 서둘러 혀 놀림을 정정했다.
“…니요. 아닙니다. 그저 그, 바람을 쐬려다 발을 헛디딘 것뿐입니다.”
집에 두고 온 묘령의 여인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행여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간혹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도겸은 혀를 콱 깨물어가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서 낯빛이 좋지 않은 게로구먼! 어디 달리 상한 곳은 없고?”
상한 곳을 나열하자면 침을 삼키기도 힘들 만큼 아픈 목이며 찢어진 팔은 물론, 전신만신이 성치 못해 단순 고뿔이 아니라 당장 앓아누워도 시원찮을 판이긴 했다. 그러나 도겸은 내색하지 않았다.
“물에서는 바로 빠져나와 다친 곳은 없습니다.”
“꽤나 험하게 빠진 모양이던데, 자네 단령까지 벗겨져 둥둥 떠 있었다질 않나?”
늘 품행이 경건하고 행색이 깔끔한 도겸이었던지라 어쩌면 규장각의 각신들 모두 지난밤에 있었던 사건에 부쩍 관심을 가졌다.
그저 우스꽝스러웠을 도겸을 놀리고 싶은 것이라면 몰라도 더한 주의를 끄는 일은 사양이었다.
“적잖이 당황하였던지라 의복을 제대로 갖추는 것도 잊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자네도 사람이긴 사람인 모양이지? 물에 빠질 때도 있고.”
허허 웃은 직제학이 농담을 섞어 하는 말에도 도겸은 차마 웃지 못했다.
사람이 아닌 자가 제 집에 있기 때문일까.
“젊음이 마냥 능사는 아니라네. 혈혈단신일수록 스스로를 챙겨야 하지 않겠나.”
다른 각신들에겐 여간 깐깐하게 구는 송 직제학이지만 도겸에게 만큼은 당분간 당직을 서지 말라 당부하기까지 했다.
“새겨듣겠습니다.”
당직을 서지 못한다는 건 책을 읽을 시간을 빼앗기는 것과 진배없는 일인지라 달갑지 않음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단 일 각이라도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하필 이 시간에 자리에 있는 상관이 말 많기로 유명한 송현익인지라 보통 곤란한 게 아니기도 했다. 마음이 이미 궐 밖 서촌에 가 있는 도겸은 서둘러 조퇴 절차를 마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럼 이만….”
“듣자 하니 자네 양친께서 유명을 달리하실 적에 전소된 집을 다시 지어서 산다던데, 맞나?”
조깃배에는 못 오를 양반 같으니. 이리 수다스러우면 소음을 싫어하는 조기들이 죄다 도망칠 테니 말이다. 아니면 게으름 피우고 싶은 오후 나절이라 그런 것인가.
가려는 이를 붙잡고 계속 말을 붙이는 통에 도겸은 한숨을 삼키며 떨떠름하게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바깥 일 하며 혼자 돌보기엔 너무 큰 집이기도 하지 않나.”
“…예?”
뭔가 미심쩍다 생각하던 차 송현익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자네 약관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 혼인도 올리지 않는 거냔 말이지. 보게, 그리 몸이 성하질 않은데 집에 안주인이 없으니 퇴궐한들 누가 돌보아 주겠나?”
“아직은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내 자네가 친아들 같아 하는 소리다만, 세자 저하께서는 무려 국혼을 세 번째로 치르시려는 참인데 자네가 아직 미혼이라니! 자네가 어디 빠지는 게 있나, 아쉬운 게 있나? 사위로 맞으려는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건만….”
“조실부모하여 팔자부터 사나운 사내에게 어느 가문이 귀한 딸을 내어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