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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4)화 (4/197)

도겸은 상대가 주춤하는 사이 슬쩍 얼음 창의 옆쪽으로 비켜섰다. 예상은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방향을 틀어도 뾰족한 촉이 그를 따라와 섬뜩하게 했기에.

이쯤 되니 분해지는 터라 혀라도 칼처럼 놀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네 정체가 무엇이냐. 설마 규장각에 귀한 서책이라도 훔치러 온 것이냐?”

“훔쳐? 내가?”

잿빛 구름에 몸을 감추고 있던 달이 서서히 드러나며 여인과 도겸을 환히 비추었다.

“헐벗은 채로 못에 떠 있다가 이리 사람을 해하려 드는 이유가 무엇이냐 묻고 있다. 너는….”

푸르다. 황당한 듯이 도겸을 노려보는 여인의 머리칼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푸른 안광은 파란 눈동자에서 새어 나온 것이었다.

죽은 사람보다 더 차갑고 창백해 보였던 건 푸른 머리칼이 몸을 감싸고 있던 탓이었을까.

“너는.”

도겸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아야 했다.

“너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구미호라도 되는 것이냐?”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짜증스러운 대꾸와 함께 시간이 멈춘 듯 허공에 떠 있던 얼음 창들이 일시에 날아들었다. 다급히 몸을 피한 도겸의 젖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묻는다면서!”

어둑한 사위에 연달아 얼음 깨지는 소리가 일었다. 부서진 얼음잔해들이 반짝이며 비산했고 그 가운데 고요히 선 도겸은 안타깝게도 칼이 아닌 접선, 그러니까 부채를 쥔 채였다.

“…이게 묻는 자의 예의인가?”

장도 대신 찾은 대안이긴 했으나 무서운 속도로 날아드는 창을 간신히 쳐냈을 뿐 훌륭한 돌파구는 되지 못했다. 낭패감을 숨긴 도겸이 여인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답할 의무가 없겠군.”

“내 창이 왜….”

여자의 눈이 가늘어짐과 동시에 맥락 없이 생겨난 여러 개의 창이 또다시 공기를 가르고, 뒤이어 차갑고 거친 파열음이 일었다.

“왜 내 창이 부서지는 거야!”

몇몇은 요행으로 피했으나 기어이 부채마저 놓친 도겸은 한쪽 팔을 움켜쥔 채였다. 물론 옆구리가 뚫리는 것보다야 천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여유를 잃은 쪽은 그가 아니었다.

“설마하니 내 접선이 초나라 상인이 팔던 그런 훌륭한 방패일 리는 없으니.”

이제 얼음 창은 부채가 아닌 손을 세워 쳐낼 수 있을 만큼 약해져 있었다. 처음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면밀히 살필 때 쩍하고 갈라지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고작 부채에 부딪쳐 깨지는 네 창도 그저 그런 살얼음이 아니겠느냐.”

“그럴 리가.”

공격을 차단당하자 직접 창을 든 여자가 흥분하며 도겸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피할 길이 없었다. 도겸은 도망칠 새 없이 뒤로 넘어지며 반사적으로 들이닥친 창을 붙잡아 막았다.

도무지 체구와 비례하지 않는 힘이었다. 점차 공격력이 약해져 안심하게 했던 창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얗게 얼어붙어 맞닿은 손바닥에 마치 작열통 같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내 잠을 깨운 네놈의 정체는 무엇이고, 여긴 어디냐고!”

더 당황할 게 있을까 싶었지만 코앞에 있음에도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여인은 도겸을 끝없이 당혹스럽게만 했다.

힘 싸움에서 확실히 우세인 쪽이 왜 이런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는 걸까.

“시치미를 떼는 군!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침입했다는 소릴 내가 믿을 것 같나?”

아니, 어쩌면 저보다 더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의아해하는 도겸의 뺨으로 뭔가가 뚝 떨어져 흐른 건 그때였다.

“시치미를… 떼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데.”

내내 공격당한 건 이쪽인데 왜 침입자가 피를 흘리는 것인가. 묻는 자만 있고 답하는 이가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봐. 지금 코에서 피가….”

눈으로 본 것을 말해 주려던 차에 이번엔 살기를 얼려 만든 듯 매섭던 창이 물로 변해 쏟아졌다.

“대체 이게… 뭐냐고.”

거기다 금방이라도 도겸을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여자마저 힘없이 도겸의 품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물벼락에 이어 웬 여인까지 받아 안은 도겸은 한동안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사람이 아니라 얼음을 끌어안기라도 한 것인지 하얀 입김이 검은 허공을 잿빛으로 물들였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대체 어떤 꿈이 이리도 사납고 요란하단 말인가.”

마침내 생각하기를 포기한 도겸이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아 버렸다.

저 멀리 휘영청 뜬 달만이 남몰래 두 남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

깊은 물속에서 잠들었건만 깨어 보니 사방이 막힌 어둡고 건조한 공간 안이었다. 꿈에서 식물처럼 약한 녀석이 겁도 없이 물에 들어와 건드리기에 가볍게 목뼈를 부러트리려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이 든 건가?”

꿈이 아니었다. 예민하게 감각을 세운 파랑은 눈을 들어 확인하기도 전에 즉각 소리 나는 쪽으로 창을 날려 보냈다.

“아윽!”

그런데 창이 생겨나질 않았다. 손끝에 물이 맺히기는커녕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한 것 같은 격통만이 강하게 일었다.

아까 얕은 물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이어진 이러한 통증은 수천 년을 사는 동안 처음이었다. 힘이 모이지 않고 흩어져 쭉 빠져나가는 생경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붙잡았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또 한 번 고막을 진동케 했다.

“나만 다친 건 아닌가보군.”

통제 없이 활짝 열린 감각들이 주변의 모든 정보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수많은 내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구분도 구별도 더뎠다.

건조하고, 나무 냄새가 강하고, 메말랐고, 비릿한 피 냄새, 뜨겁고, 타들어 가는 듯한….

“여긴 어디지?”

“내 집이다. 눈앞에서 혼절해 버렸는데 침입자를 위해 내국에다 의원을 부를 수는 없지 않느냐.”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다. 어지러웠다. 시야를 밝힌 파랑은 한쪽에 놓인 작은 촛불이 뜨거운 열기의 주범인가, 잠시 고민하다 극심한 갈증에 생각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물.”

본능적으로 몸과 같은 물을 찾자 크고 곧은 손이 물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손을 뻗자마자 홱 내빼는 통에 받진 못했지만.

“…뭐야?”

“함부로 선의를 베풀다 또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염려가 되어 말이지.”

파랑을 바라보며 보란 듯이 물을 모조리 마셔 버린 남자가 빈 그릇을 내보였다. 파랑은 눈을 치켜뜨며 성을 냈다.

“네 몸의 물을 뽑아 마셔줄까?”

“이리 겁박하는 것을 보니 여유가 없는 모양인데.”

어째선지 아까 전과는 달리 살벌한 협박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이제는 그 살얼음 조각도 못 꺼내는 건가?”

이를 악문 파랑은 창이 아니라 몸을 날려 남자의 목을 힘껏 쥐었다. 장신의 남성을 벽에다 매섭게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이 떨어져 자잘한 소음이 일었다.

“그렇다고 해서 널 죽이지 못하는 건 아니란다.”

처음엔 당황하기만 하더니 두 번이 되니 적응이라도 한 걸까. 상대는 숨통이 막히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강한 자들의 맹점이란… 한결같지.”

지나치게 많은 자극에 미처 알지 못했다. 목덜미에 칼날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강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을 지나치게 믿는다는 것이다.”

옷소매에 숨기고 있던 짧은 칼을 역으로 쥔 녀석이 예리한 날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파랑의 시선이 흐트러진 틈에 체격 차를 이용해 뻗은 팔의 안쪽 관절을 내리쳤다. 팔이 꺾여 힘이 풀린 사이를 노린 듯 했다.

“…강자로 살아 보니 약한 녀석들의 맹점도 한결같던데.”

그러나 마치 모든 섭리를 무시하듯 사선으로 가격하는 힘보다 파랑이 작은 팔뚝으로 버티는 힘이 더 컸다.

단단한 쇠도끼로 가느다란 나무를 힘껏 찍듯 사정을 두지 않은 공격에도 꺾이지 않고 목을 조이는 힘만 더 세졌으니까.

도리어 짜증만 솟은지라 파랑은 이번에야말로 그냥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즐기진 않았지만 이런 순간에까지 죽일 방법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늘 함부로 까분다는 거.”

용이든 뭐든, 어차피 심장만 깨부수면 될 일이다. 파랑의 시선이 잘게 뛰는 남자의 심장 부근으로 향했다.

목을 조르는 동시에 손톱을 세워 심박이 느껴지는 부위를 곧장 찌르려던 차, 녀석이 파랑의 팔목을 붙잡았다.

“죽이기 전에… 아직 서로 의문이 많지 않느냐. 그것부터 풀어야 하지 않겠나?”

“그건 지금 느껴지는 다른 기척의 주인을 잡아다 물어보면 그만.”

“하나 나보다 널 제대로 도울 이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이건만 녀석의 기개는 나름대로 봐줄 만했다.

그래 봤자 곧 죽는다는 공포심에 아무 말이나 내뱉는 허세겠지만, 당장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타개해야 하는 파랑으로서는 다른 이를 잡아가며 불필요한 힘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날 만족시켜 봐.”

아량을 베풀어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마침내 자유로워진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팔짱을 낀 채 몇 번인가 코를 킁킁대던 파랑은 거침없이 무방비한 남자의 몸에 손을 대었다.

“무, 무슨, 이게 무슨 짓이냐!”

목을 졸릴 때도 이렇게 놀라진 않더니, 직접 귀를 대어 듣는 것이 아님에도 녀석의 심박이 거세어진 게 느껴졌다.

단순히 몸을 뒤져 남은 쇠붙이를 찾아내려던 파랑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썹만 씰룩였다.

“네가 또 얄팍한 쇠붙이로 얍삽한 수를 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그럼. 성가신 건 미연에 방지해야지?”

“그렇다고 어찌 여인이 함부로 사내의 몸을 더듬고… 만족시켜 보라고 하질 않나!”

안 그래도 보기 답답할 정도로 겹겹이 입어놓고 한 번 더 매무새를 살핀 남자가 파랑에게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파랑이 한 걸음 크게 다가가면 더 크게 물러나다 다시 벽에 다다른 그는 결국 항복이라도 하듯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알아서 꺼낼 테니 그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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