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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3)화 (3/197)

단둘뿐인데도 도겸에게 가까이 다가온 언이 목소리를 낮추고 손을 모아 속삭였다.

“자네를 부마 삼는다면 공주와 옹주들 사이에서 혈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예감하신 거라고.”

이때다 싶었는지 언은 최도겸이라는 미남자가 세자의 예동일 때부터 동궁전을 기웃대는 공주들이며 옹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까지 설명하려했다. 물론 도겸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라비가 돼서 누이들의 체면을 그리 구길 셈인가.”

“어허? 참이라니까. 자네가 그 나이 먹도록 단신일 수 있던 건 순전히 공주들과 옹주들이 모종의 합의를 도출해 냈기 때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홀몸인 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도겸이 친우의 치부라면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푹 찌르고 나서야 수다가 그쳤다. 이제 좀 조용해지려나 싶던 차, 언이 난데없이 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가슴팍을 움켜잡으며 괴로워했다.

“최 직각, 자네의 직언에 아무래도 내 뼈가 상한 것 같으니 당장 어의를 불러 주겠나? 위급하네!”

눈을 가늘게 뜬 도겸은 언을 부축하며 격하게 걱정했다.

“저하, 제게 먼저 보여 주십시오. 혹시 의원이 와서 어디가 상했는지 모를 수 있으니 확실히 부러트려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뭐?”

“개의치 마소서. 신이 단번에 해낼 테니…!”

“아니, 최 직각… 야, 최도겸!”

터무니없는 농을 진지하게 주고받다 기어이 엎치락뒤치락해 가며 몸싸움까지 할 뻔한 두 남자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시름도 홍진도 잊고 술기운에 기대어 가볍게 굴던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분을 되찾았다.

“…나라가 기울어갈수록 내가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나?”

“그게 뭔가?”

손바닥으로 곤룡포를 가볍게 털어 구겨진 옷의 매무새를 정리한 언이 씩 웃었다.

“백성들이 웃음을 잃는 것이네.”

“…….”

“웃음이 없는 나라. 나는 그런 세상이 올까 봐, 그게 가장 겁이 나.”

함부로 대꾸할 수 없었다. 감히 나아질 것이라 부질없는 희망으로 고문을 할 수도,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재액에 파묻힐 것이라 독설을 퍼부을 수도 없지 않나. 도겸은 그저 친우의 곁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딱 하나, 자네가 웃을 때 같이 웃을 벗으로 남겠다는 것뿐이야.”

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간질간질하구만. 그거면 되었네.”

함께 어수문 앞까지 나가 배웅하던 차, 세자가 의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불청객은 이제 그만 쫓겨나 줄 테니 자네도 꾀 좀 부리는 게 어떤가?”

“그러라고 독한 술을 가져온 게로군.”

“이제 알겠나? 자네가 이렇게 하해와 같이 너른 마음을 지닌 막역지우를 가졌다는 걸.”

도겸은 한참이나 서서 세자를 전송했다. 기다리고 있던 익위사와 함께 가볍게 휘청휘청 멀어져 가는 세자가 꼭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것 같이 보인다면 기우일까.

그 모습을 뒤로하고 다시 주합루로 올라온 도겸은 서책을 다시 펼쳤다가, 결국 무거워진 마음에 달아오른 숨이라도 덜어내려 창가로 향했다.

“후우….”

달이 아직 하늘 높이 떠 있는 시각인지라 후원의 이곳저곳이 제법 밝게 보였다.

눈이 내리는 정경 대신 늘 흰 종이만 보고 살았는데 언제 이렇게 새싹이 돋는 계절이 왔나, 새삼스러운 감회가 도겸을 헛웃음 짓게 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오랜 가뭄에 자연스레 술을 절제했더니 오늘따라 더 취하는 것만 같았다. 학문의 깊이를 따지자면 언과 며칠 밤을 지새울 자신이 있었지만 음주에서만큼은 언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멀리 있는 게 아니었군.”

술이란 참으로 얄궂은 녀석이라, 알싸하게 취기를 올려 순간의 흥을 일으키고는 여지없이 두통을 남겨 괴롭혔다.

후원을 바라보며 봄을 질투하는 차가운 밤공기를 술처럼 들이켜던 도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유랑을 마치고 돌아섰다.

“아니, 잠깐.”

정확히는 돌아서려했다. 몽롱한 시선 끝에 뭔가 걸린 탓이었다. 주합루 앞으로 사각 바르게 난 연못인 부용지, 거기에 있어선 안 되는 무언가가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면 착각인가.

도겸은 술에 취하고 밤공기에 취해 헛것을 보았다 자조하면서도 실체를 확인하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얼음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짧은 숨을 들이켰다.

“…어찌!”

무거운 눈꺼풀이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술기운이 달아났다. 직후 도겸이 취한 행동은 언제 취했냐는 듯 주합루 밖으로 나가 나무 계단을 두어 개씩 뛰어 내려가는 일이었다.

관복의 옷자락이 볼썽사납게 펄럭여도 미처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제발 잘못 본 것이기를, 혹은 이것이 꿈이기를. 하나 애석하게도 도겸이 마침내 어수문 밖 부용지 앞에 당도하여 마주한 것은, 역시 사람이 맞았다.

그것도 새하얀 나신을 드러낸 채 의식 없이 물에 떠 있는 여인이었다.

놀란 도겸은 무의식적으로 황급히 돌아섰다가, 아차 싶은 생각과 함께 이번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사모(紗帽,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와 신발만 벗어 두고 즉시 못에 몸을 던졌다.

수심이 깊지 않아 헤엄을 칠 필요는 없었지만 묵직한 저항감은 둘째 치고 차가운 물이 뼛속까지 적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을 건져야겠다는 일념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을 만큼.

“이보시오, 이보시오!”

바삐 띠를 물 밖으로 내던진 도겸이 단령을 벗어 달빛에 퍼렇게 질린 듯한 하얀 몸을 덮었다. 어차피 물에 젖은 옷이라 체온보다는 체면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푸른 달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까이서 보니 변사체보다 더 핏기 없이 창백해 보였기에, 기실 도겸은 그때까지 구하려는 이가 죽었으리라 여기고 있었다.

“부디 용서하시오. 다른 궁녀를 부를 틈이 없어 부득이….”

“…운이 나쁘구나.”

작은 몸을 막 안아 들었을 때였다. 순간 귀를 의심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도겸의 행동을 멎게 했다. 하마터면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심장이 멎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눈만 커진 채 물러난 틈에 여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스스로 발을 딛고 섰다. 달빛 아래 냉랭한 눈빛이 번뜩였다.

“또다시 내 잠을 깨우는 녀석이 있다면 이번엔 정말 죽이기로 했거든.”

“깨우다니, 난 그저 낭자가 물에 빠져 위급하다 생각하여…!”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이리 차가운 물에서 잠을 잔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냐고.

하지만 바로 거리를 두며 항변하려던 도겸은 눈 깜짝할 새에 목을 조르는 여인의 괴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느라 더 이상 변명을 할 수도,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이, 게 무슨!”

몽중몽인가. 그렇다면 몇 번이나 까무러칠 만큼 놀랐으니 깼어야 맞다. 금녀의 구역이나 마찬가지인 규장각 부용지에 버젓이 누워 있던 것부터, 작고 가녀린 체구로 6척이 넘는 남자를 한 손으로 들어 내던진 것까지, 납득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나약한 녀석이 어떻게 내 물에 들어왔을까. 부러트릴 맛도 안 나겠구나.”

아니, 하나 있다면 괴이한 여인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경부가 부러질 듯 고통스럽다는 점이었다.

“크윽!”

아무리 물에서라지만 괴인은 장정을 들어 올리는 걸로도 모자라 연못 밖으로 내던지기까지 했다. 왜 하늘에 떠 있어야 할 별들이 목전까지 내려와 빙글빙글 도는 것인가.

꽉 막혀 있던 숨을 연거푸 토해 내느라 도겸은 소리쳐 누군가를 부를 틈도 놓치고 말았다. 하필 서향각이나 주합루와는 정반대쪽이라 혼신을 다해 고함쳐도 부족할 판국에 말이다.

“아니면, 날 죽이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고 싶었던 건가?”

물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물이 길을 터 주기라도 하는 건지, 괴물은 놀랍게도 ‘물을 계단처럼 밟고’ 연못 밖으로 나왔다.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지.”

괴물이 하얀 손을 펼쳤다. 그러자 손 주변에 하얀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길고 날카로운 창이 생겨났다.

“살리려고 왔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 된 도겸이 억울함을 토해 냈다. 하지만 여자는 망설임 없이 창을 던졌고 도겸은 숨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꼈다.

다행히 찔리진 않았지만 창끝의 서늘한 냉기가 살갗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한밤중에 사람이 연못에 빠져 둥둥 떠 있는데 그냥 지나칠 이가 어디 있겠냔 말이오!”

창이 뿜어내는 하얀 냉기 탓일까, 도겸의 숨결마저 하얗게 얼어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창이 다름 아닌 날카롭게 깎아낸 길쭉한 얼음덩어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않기로 작정했다.

“뭐? 연못이라니. 내 물이 겨우 그만할 리가….”

얼음 창으로 도겸을 위협하고 정작 느긋하게 다가오던 괴인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달을 등진 채라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푸른 안광만큼은 선명했다.

“내 물이 왜 이리 작아졌지? 여긴….”

괴이한 침입자가 당황하며 주변을 휘둘러보는 동안 도겸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직면한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파악한 뒤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이 뒤로 넘어가면 머지않아 대조전이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엔, 임금의 침전이 위치한다.

깊게 헤아릴 것도 없이 도겸은 저 위험한 불청객이 내전까지 닿을 수 없게끔 필사적으로 막아야 함을 깨달았다. 사명감을 띤 그의 눈빛이 한층 결연해졌다.

“주합루에서 내려다보는데 웬 사람이 의식도 없이 물에 떠 있는 것 아니겠소. 그에 급히 구하려했을 뿐인데, 어찌 내게 이러는 것이오?”

봇짐도 아닌 목숨을 요구하는 상대의 뻔뻔한 작태를 비난하며 뒤로 숨긴 손으로는 부지런히 허리춤을 뒤적였다. 패용한 장도를 찾기 위해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감히 이 물, 부용지를 소유하려 들다니.”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칼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몸싸움을 벌이다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었다.

“궐의 주인이자 지존이신 주상 전하께 이런 불경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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