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선비의 깊은 샘엔 용이 산다 (2)화 (2/197)

“차라리 밖에 나가서 말썽을 부리는 게 나을 지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을 들켰다간 너나 나나 제 명엔 못 죽을 테니 말이다.”

고관대신들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에서 세자와 각신이 마주 앉아 술을 나눠 마시다니, 다른 각신이라면 몰라도 도겸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 시간부로 ‘절대’의 명제가 깨지게 되었다.

그러나 친애하는 벗을 위해서라면야, 도겸은 한 수 접어주기로 했다.

“걱정 말거라. 곧 세자빈을 맞이하면 이리 사소하게나마 밤이슬 맞기도 어려워질 것이니.”

그러나 언이 빈 잔을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잇는 말을 듣고는 어렵사리 떠오른 미소가 단박에 가셨다.

“세자빈… 이라니.”

얼마나 놀랐냐 하면 귀하디귀한 술이 약간 흘러 옷소매가 약간 젖을 정도였다. 대경한 도겸이 언을 바라보았지만 언은 그저 비뚜름하게 웃으며 잔을 다시 채울 뿐이었다. 그리고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곧, 세 번째 금혼령이 내려질 것이다.”

***

“크으윽… 왕이시여. 제발 목숨만은!”

몸이 짓눌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한 남자가 꺽꺽대며 호소했다. 그의 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물줄기였다. 그 앞에 선 여자는 손가락 하나만을 까딱거리며 물을 다루고 있었다.

“그렇게 목숨이 아까운데 날 죽일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오, 오해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파랑 님을 죽이겠…!”

말을 채 다 끝맺기도 전에 남자의 입이 솟구친 물줄기로 틀어막혔다. 언뜻 푸른 물결처럼 구불대는 긴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자신을 죽이려 드는 이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배운 적도, 이해하려 한 적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스스로에게까지도 자비 없이 살아왔을지 모른다.

“날 죽이려던 건 이해할 수 있어. 약한 우두머리는 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왕을 죽인 자는 다음 왕이 된다. 대신 실패하면 대가는 당연히 자신의 죽음이다. 그리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 파랑은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보통 대가의 지불은 금방 끝내는 편이었으나 이번엔 저를 귀찮게 한 괘씸죄를 더해 약간의 고문을 가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정당한 결투도 아니고 비겁하게 뒤통수를 치려는 짓은 우리 종족의 수치가 아닐 수 없지.”

가지를 치는 건가 싶더니 어느새 그물의 형태를 한 물줄기가 보기보다 더 단단하게 압박을 가했다. 남자의 비명도 커져 갔다.

입을 틀어막힌 채라 더없이 커진 눈이 그의 고통을 대신했다. 그나마도 실핏줄이 터져 흉측해졌다.

“…살고 싶어?”

“끄, 끄윽!”

물론 오래가지 않아 흥미를 잃은 왕이 별안간 역도의 입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손도 하나 풀어주었다. 밧줄이 아니라 물이라 수증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 손으로 너와 뜻을 함께한 이들을 가리켜봐. 그럼 고민이란 걸 한번 해 볼 테니.”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타닥타닥 튀었지만 크게 일지 못했다. 그나마도 자욱한 물안개에 잡아먹혀 사그라졌다.

애초에 모인 자들 모두가 반구형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갇혀있어 저항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대한 물은 파랑의 손짓 한 번에 연기로 흩어졌다가 벨 수도 태울 수도 없는 물이 되고, 그러다 날카롭고 차디찬 얼음으로 변해 쇄도했다.

역시 자신밖에 모르는 종족답게 제 목숨이 중요한 주동자가 함께 결의한 자들을 짚어냈다.

“흐음, 널 제외하고 총 셋인가?”

가까스로 짚어낸 면면들을 가볍게 훑어본 파랑이 손가락을 튕겼다. 한곳으로 모인 안개가 네 개의 하얀 얼음 창으로 변하기가 바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헉!”

곧장 심장으로 파고든 창날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역시나 파랑의 성에서 주인을 모시던 다른 동물이 셋, 그리고.

“고민이란 걸 해 본다고 했지 살려 준다 약속한 적은 없으니까.”

이 무의미한 반역을 일으킨 녀석이었다. 역시 같은 종족 중에서는 더 이상 파랑과 힘을 겨룰 이가 없었다.

“끄, 극… 파랑… 이 오만한 용 같으니…!”

일격에 심장을 꿰뚫린 용이 파랑에게 꾹꾹 참고 있던 저주를 쏟아 냈다. 붉은 눈동자에 비친 파랑은 더 이상 흰 피부에 파란 물결 모양 머리를 가진 여인이 아니었다.

“그 힘이 언제까지 갈, 크흑, 영원할 것 같으냐? 절대….”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듯 투명한 비늘을 가진 수룡이 공포에 질린 화룡의 마지막 불씨를 잠재우려하고 있었다. 녀석의 심장에서는 피가 아닌 붉은 폭발이 일었다.

“그래. 영원한 건 없겠지.”

“후회할… 날이… 끄아악!”

최소 천년의 도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용의 심장은 여의주라고도 불린다. 다른 손에 넘어가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보물이 된다고 했던가.

그리고 이렇게 심장을 깨트려 모든 힘을 잃은 용은.

“그래서 기다렸어. 날 이길 수 있는 녀석을.”

“자만하지, 마라…!”

거대한 외양과 위용도 모두 잃고 다시 이무기로, 또한 도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는 이무기는 이지마저 잃고 고작해야 하등한 실뱀 따위로 추락하고 만다.

“이제 지겹거든.”

직전까지만 해도 파랑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던 녀석은 제 심장이 깨져 치솟은 불길인 줄도 모르고 깜짝 놀라 없는 다리로 줄행랑을 쳐 댔다.

그 한심한 꼴을 지켜보던 파랑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난 뜨거운 게 제일 싫어.”

이전에 다른 심장을 깨트렸을 땐 그 자리에 울창한 숲이 자라나기도 했고, 산이 치솟기도 했었다. 아무리 약한 용의 것이라 해도 수천 년에 걸쳐 쌓인 도력이 흩어지는 순간은 각오해야 했다.

즉각 거대한 물을 일으켜 찍어 누르듯 진화하긴 했지만 새카맣게 타 잿더미가 된 주변의 아름다운 정경은 되돌릴 수 없었다.

물로 씻어 내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랜 시간 정기 가득한 물을 주어 가꿔 온 것들을 맥없이 잃고 말았다.

대체 어머니는 왜 이렇게 약하고 부질없는 것들을 아꼈을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파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염을 잠재우려 쓴 물을 회수했다.

사방에서 이끌려 온 물로 이루어진 구체가 커질수록 잠시나마 일었던 짜증도 수그러들었다.

“많이 뜨거웠지.”

커다란 물방울에 손을 넣고 섬세한 결을 어루만지던 파랑이 흠칫 놀란 건 깨끗하게 뽑아낸 물에서 뭔가를 발견했을 즈음이었다.

“뭐야.”

순수한 물외엔 아무것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투명한 액체 속에 반짝이는 뭔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 얼음 조각인가 싶어 집어서 확인해 보려던 파랑의 눈이 커졌다.

“…반지?”

아무 무늬도, 장식도 없지만 흠하나 없이 깨끗하게 반짝이는 은빛의 얇은 반지는 파랑이 잡기도 전에 이미 손가락에 끼워진 채였다.

단순히 어딘가에 떨어져 있다 얼결에 이끌려와 섞인 우연이겠지만, 미묘하게나마 제 통제를 벗어난 것 같은 상황에 파랑은 희미한 찜찜함을 느꼈다. 분명 ‘물’만 회수했는데.

…그럼에도 반지의 빛깔이 썩 나쁘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뭐, 가끔은 이런 전리품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무심하게 중얼거린 파랑은 가볍게 돌아서 푸른 성 안으로 향했다. 습격을 받은 파랑의 성은 화룡과의 싸움으로 일부가 녹아 내리거나 그을음이 남은 채였다.

그러나 주인의 눈길 한 번에 희다 못해 시퍼런 냉기에 휩싸이더니 부러지듯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세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맨발로 내딛는 하얀 걸음이 성문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얼음 문이 굳게 닫혔다. 완벽하게 고독한 순간이 되자 비로소 파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아무리 거대한 용일지라도 우러러볼 수밖에 없을 만큼 높고 아름다운 성이지만 거기까지였다. 막상 담 너머엔 끝이 보이지 않는 짙푸른 바다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너비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광대한 바다야말로 가장 험준한 요새나 다름없었다. 파랑은 멈추지 않고 물에 들어가 그 푸르른 품에 안겼다.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부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용의 성체로 변한 파랑은 전투로 인해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였다.

그러나 검붉게 타들어 간 화상이며 찢긴 열상들은 깨끗한 물을 만나 서서히 아물고 깨진 비늘도 새로 돋아났다. 물이 파랑이고 파랑이 물인 순간이었다.

마침내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심연으로 가라앉을 즈음 파랑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그러곤 천천히 똬리를 튼 채 잠을 청했다.

또다시 제 잠을 방해하는 녀석이 나타난다면 가차 없이 죽이리라, 그런 다짐과 함께였다.

***

“이번 세자빈 간택은 무관들을 뽑듯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말끝을 흐린 세자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또 한 번 술병을 기울였다.

“더는 잃을 수 없으니 말이야.”

가만 듣던 도겸은 부지런히 언을 위로할 말을 골랐다.

“더는 잃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극진히 모실 테니.”

그 세자빈들의 죽음엔 미심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건강하게 지내던 이들이 갑자기 쇠약해지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말이다.

잔뜩 심중한 도겸과 달리 언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술병을 뒤집어 탈탈 털어 대느라 바빴다.

“이런, 벌써 끝인가.”

세자로서의 체통을 생각하면 철없는 행동을 꾸짖고 싶었으나 한편 술 한 방울이 아쉬운 시기인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또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숨기려 하얗게 웃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주합루가 다시 천지의 이치를 모두 모아 담은 곳으로 돌아갈 시간인가보군.”

“그렇다면 동궁의 주인 또한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도겸의 걱정을 축객령으로 이해한 언이 서운한 듯 투덜댔다.

“너무한 것 아닌가? 전하의 최 직각을 내 친우로 끌어오려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리 냉큼 돌아가 버리다니.”

“내가 언제나 네 친우로 남길 원한다면 전하의 부마로 삼으면 될 일이야.”

부마가 된다면 두 번 다시 관복을 입을 일이 없을 테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하는 도겸의 뒤에서 언이 혀를 찼다.

“전하께서 왜 자네를 이 후원 규장각에 숨겨 두셨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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