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을 찾아든 소슬한 바람이 간간이 덧문을 스치며 장난질을 치는 초봄의 밤이었다. 겨울 끝 무렵의 찬바람이 미련이 남았는지 집요하게 창을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주합루 창호에 비친 하나의 인영은 한참 전부터 곧은 자세로 앉아 간간이 책장만 넘길 뿐이었다.
또 한 번 책장을 넘기려던 차, 이번엔 덜컹이는 소리가 아니라 여닫이문이 열렸다. 내내 책장에 집중하고 있던 도겸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누구십니까.”
바람이라면 문을 못살게 굴 수는 있어도 열지는 못할 터. 행여 열렸다면 닫기 위해 도겸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규장각 문을 보수해야겠어. 우리 최 직각 독서에 방해가 되니, 원.”
행여 귀한 서책이나 기록에 손을 대려는 누군가일 수도 있어 긴장하던 와중에 책장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흑색 곤룡포의 주인, 세자 이언이었다.
“벌써 삼경(三更,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일세. 자넨 잠도 없는가?”
본디 규장각 현판에 비선생물입 견래객불기(比先生勿入 見來客不起, 선생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고 손님이 오는 것을 보아도 일어나지 말라)라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나 있던 참이라 별수없이 언에게 상석을 내어준 도겸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야직입니다.”
“이럴 때 자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면 나는 국본으로서 신하의 등에 도포라도 벗어 덮어 주며 제법 훈훈한 광경을 만들었을 텐데 말이야.”
“서책에 집중하다 보니 졸 틈이 없었습니다.”
무뚝뚝하고 딱딱한 도겸의 반응에 언이 가볍게 타박했다.
“이 사람아, 일지 살펴보니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입직은 죄 자네 몫이었던데!”
자리에 앉으려던 세자가 기습적으로 도겸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아니면 자네 혹시, 매일 밤 나를 기다렸던 겐가?”
언의 음흉한 언사에 드디어 도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신다면 왜 이제야 오신 것입니까.”
웬일로 목석같은 도겸이 호응하자 언이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나를 기다렸다고?”
“그렇습니다.”
도겸은 책상 위에 쌓인 서책들 중 하나를 언의 앞에 꺼내 두었다.
“저하와 논의해 보고 싶은 주제가 한둘이 아니니 말입니다.”
“뭐?”
“염려 마십시오. 연구 중인 작금의 정책들과 관련된 것은 아니니.”
기가 찬 언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학문에 관해 토론하려는 도겸을 질책했다.
“조강에 주강, 석강까지 겨우 마치고 이제야 조금 쉬려는 내게 자네는 이제 야강까지 시키려는 겐가?”
“그러려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만. 설마 적적하여 오신 것이라면…”
점잖게 쫓아내려는 것을 알아차린 이언이 못들은 척 도겸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니 자네가 벗이 없는 걸세. 자네만 남겨 두고 모두 밤이슬을 맞으러 나간 걸 보면 모르겠나? 모두가 한통속인 게지!”
벗이 없다며 노골적으로 놀려 대도 도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참이라면 한심하기 그지없겠습니다. 이리 귀한 서책들을 읽어 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두고 겨우 밤이슬을 맞다니요.”
“그렇지! 그럼 어디 말해 보게. 오늘 자네에게 입직을 떠넘긴 이가 누군가? 내 당장 전하께 고하여 처벌할 테니. 응?”
언이 살살 꼬드겼지만 도겸은 입술에 무거운 추라도 달아 놓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굴었다.
“반대로 저를 벌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다른 각신(閣臣, 조선 후기에 둔 규장각의 벼슬아치)들의 당직을 빼앗고 귀한 책들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허, 이럴 때 간신 노릇을 하란 말이네. 그래야 등제 때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것 아닌가.”
이언의 말이 간신(奸臣, 간사한 신하)을 의미하는지, 간신(諫臣, 임금에게 옳은 말로 간하는 신하)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허물을 고하여 홀로 승차하는 간신(諫臣)이 된 들, 동료들의 눈엔 간신(奸臣)에 불과할 터이니 말이다.
기실 아까 몇몇 각신들은 신이 나서 퇴궐하는 것을 보았지만, 도겸은 시치미를 뚝 떼기로 작정했다.
“참입니다. 주간엔 경황이 없어 느긋하게 독서를 할 짬이 나질 않는 데다 반출이 불가한 서책이 많으니 야직을 서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자넨 그게 문제라는 걸 모르나?”
도겸이 읽고 쌓아 둔 책 더미를 툭툭 가리킨 언이 혀를 찼다.
“자네가 과히 열중하니 다른 각신들이 자넬 따라잡을 틈이 있나. 뭐든 적당히 하게, 적당히. 특출한 건 모난 것과도 같으니.”
어쩐지 어설픈 전기수처럼 과장된 말투더라니 역시나 세자가 염려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역사엔 주장이 강하며 능력이든 성격이든 모난 신하를 두둔하고 매사에 중간치만 하며 안일하게 구는 신하를 경계한 선왕도 있었다.
그리고 도겸은 그러한 선왕을 매우 존경했지만 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마냥 성미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새겨듣겠습니다.”
빈틈없이 깍듯하게 구는 도겸이 못마땅했는지 자리에 앉는 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겸아.”
호명이 신호라도 되듯 도겸의 곧은 시선이 한풀 꺾이고 꼿꼿한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래. 언아.”
오랜만에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이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대쪽 같은 얼굴로 꾸지람을 늘어놓았겠지만 언젠가 언이 단단히 박아 두어 가능한 일이었다. 언이 흡족한 듯 씨익 웃어 보였다.
“우리도 다른 각신들처럼 밤이슬이나 맞으러 나갈까? 날이 풀려 걷기도 좋을 테지.”
늦은 밤에 규장각을 찾아온 세자의 진의가 여기에 있었나. 도겸의 눈썹이 씰룩였다.
“모두들 그간 과로에 시달려 퇴궐시킨 거래도. 뭣보다 전하께서 동궁에 사사로운 궐 밖 출입은 되도록 자제하라 명하시지 않았는가. 나갔다 자칫 별순라와 마주치면, 명일 아침부터 관아에서 나란히 볼기를 맞을 텐데?”
다른 때 같았다면 야금이 세자에게까지 적용되진 않았겠지만 궁둥이가 가벼운 언에게는 기어이 따로 임금의 어명이 내려졌기에 도겸에겐 마땅히 언을 말릴 의무가 있었다.
할 일 없으면 동궁으로 돌아가 부족한 잠이나 자 두라는 퉁명스러운 핀잔이 이어졌다.
“나는 아직 볼 책이 많으니 학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 동궁으로….”
“어허, 내 말을 새겨 듣겠다더니 아직 채 일각(一刻)도 지나지 않았는데!”
언이 책을 끌어가는 도겸의 손목을 덥석 잡아 멈추게 했다.
“그럴 줄 알고 벌써 다 준비해 왔다, 이놈아.”
“…무엇을?”
손목을 붙들린 도겸은 당황하여 눈만 크게 뜬 채로 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내 뒷짐을 지고 있는 줄만 알았던 세자가 등 뒤에서 하얀 술병을 내어 놓았을 때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잊었나? 하물며 귀한 서책이 상하기라도 했다간…!”
“그래서 내가 널 잡은 것이 아니냐. 귀한 서책께서 상하기라도 하실까 저어되어 말이지.”
언은 잽싸게 도겸이 끌어가던 책을 저 멀리 치워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도겸은 물러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랜 가뭄으로 저자에선 쌀 한 톨 구경하기가 힘든데 어찌 술을 입에 대려 해.”
“자넨 나를 얼마나 버러지 같은 국본으로 만들 셈인가? 누가 들으면 내가 나라 사정도 모르는 세자인 줄 알겠네.”
어떻게 챙겨온 건지 작은 잔 두 개를 마저 꺼낸 언이 도겸의 몫을 야무지게 챙겨 주었다.
“가뭄 든 해부터 술을 빚지 않아 이게 동궁에 남은 마지막 술이라네. 마지막이라 자네와 함께하고 싶은 거고.”
걱정하는 도겸과 달리 언은 느긋하게 책을 열람하는 탁자를 단박에 술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네, 혹 이 주합루에 숨겨진 비밀을 아는가?”
하얀 술잔 두 개를 각각 자신과 도겸 앞에 내려놓은 언이 느닷없이 진중한 낯빛을 하며 어조를 낮추는 통에.
“숨겨진… 비밀이라니?”
도겸은 더 이상 언을 말릴 수가 없었다.
“바로 밤이면 주합루의 집 주(宙)자가 술 주(酒)자로 바뀐다는 것이네.”
“…….”
물론 더 말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천지 우주의 모든 이치를 더하여 한곳에 모아 두었다는 고귀한 뜻을 단숨에 깎아내린 세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무어 있을까.
언짢음이 기어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정색하는 친우를 본 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한술 더 떴다.
“뭐 하나, 술 안 받고?”
물론 이런 통탄할 농담 또한 매사에 정직하기만 한 도겸을 비무장시키려는 의도일 터. 도겸은 어쩔 수 없이 잔을 받으며 마지막까지 언을 걱정했다.
“왜. 세자자리가 늘 불안하니 시원하게 때려치우려고 이리 경박하게 구는 건가?”
“그랬다면 월담을 하여 밖으로 나가 주색을 탐하고 흥청망청하다 자네 말대로 별순라에게 들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볼기를 까보이는 세자가 되었겠지. 뭐, 그런 최후도 나쁘지만은 않겠군 그래.”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구는 언의 눈빛은 실상 무겁게 침잠한 채였다. 실컷 방자하게 떠들던 세자가 한숨 섞인 자조와 함께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문득 돌이켜보니 자네와는 이런 비밀 하나 둔 게 없어 저질러 보려는 것이니 잠자코 따라 주시게.”
그렇게 직언만 하다간 혓바닥이 칼날로 변하겠다며 뚱한 얼굴을 하는 언이었다. 도겸은 한숨이 마구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궁 안이 더 전쟁터이기에 하는 말이지.”
“그만. 이러다간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네 직언에 체하는 게 먼저겠구나.”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릴 수만 있다면야.”
“그러니 체하지 않도록 냉큼 술을 한 모금 마셔야 하지 않겠나?”
더 말릴 틈도 없이 잔을 부딪친 언이 시원하게 술을 들이켜자 철옹성 같던 도겸도 결국 허물어졌다. 비로소 술을 넘기는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