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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90)화 (1,190/1,192)

제1190화

장막으로 떨어진 묵용린은 그물에 잡힌 대어처럼 놀란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봉봉은 이렇게 아프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분명 그가 잘못된 방법으로 시도한 것 같았다. 설마 이렇게까지 아플까. 정말 이렇게 아프다면, 어머니 성격에 아버지를 흠씬 두들겨 패고 진작에 내쫓았을 터. 어찌 그녀와 사금언을 낳았겠는가?

사봉봉은 침상에 떨어진 묵용린이 화를 내며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침상 끄트머리를 잡고 일어났고, 벌거벗은 몸을 훤히 드러낸 채 그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놀라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무섭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다만 여전히 곁눈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기에, 그녀는 아예 돌아눕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잠시 뒤, 묵용린은 이불을 젖히고 침상에 누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사봉봉은 가만히 누워 있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밤은 깊어져 갔고,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작은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릴 터였지만, 묵용린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의 호흡 또한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봉봉은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경직돼 있던 몸을 조금씩 이완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잠들었다.

* * *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묵용린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녀가 하품을 하자 밖에서 곧장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사봉봉은 짧게 대꾸하고는 눈가를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밖을 지키던 경화와 경옥이 장막을 걷어 고정한 뒤 그녀의 환복을 도왔다.

“천아는?”

경화가 대꾸했다.

“천아 언니는 월규 고고께 갔습니다.”

사봉봉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월규 고고의 병이…….”

“아닙니다. 어젯밤 마마께서 고생하셨을 테니 월규 고고께 원기를 회복하는 방법을 물어본다며…….”

사봉봉이 얼굴을 붉혔다.

“걔는 온종일 무슨 생각만 하고 다니는 거란 말이냐? 정작 알아봐야 할 건 안 알아보고, 알아볼 필요 없는 건 쓸데없이 알아보러 다니고.”

“소인은 쓸데없이 알아본 적 없습니다.”

금천아가 문턱을 넘으며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보십시오. 방금 태의원에서 가져온 겁니다.”

그녀는 그것을 경화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서, 물을 받고 마마의 목욕 시중을 들어. 물에 이걸 풀면 통증을 가라앉힐 수 있고 심신 안정에도 좋대.”

경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준비할게요.”

“잠깐.”

사봉봉이 경화를 불러 세우더니, 금천아를 흘기며 말했다.

“급히 허둥댈 거 없어. 애당초 그럴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마마, 월규 고고가 그러는데 처음…….”

“그 입 닫거라.”

“처음엔 아프다고…….”

“입 닫으라니까 또.”

사봉봉이 화가 나서 그녀를 때렸다.

금천아는 살갗이 두꺼워 하나도 아프지는 않았지만, 사봉봉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기에 경화와 경옥에게 눈치를 주며 방에서 내보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사봉봉에게 물었다.

“마마, 어젯밤에도 성사가 안 된 겁니까?”

사봉봉이 코웃음을 쳤다.

“안 됐어.”

“황상께서 또 병이…….”

“아니다.”

“한데 어찌?”

사봉봉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묻지 말라는데 또 묻다니. 정녕 본궁이 네게 곤장을 내려야겠느냐?”

금천아는 차마 더 물을 수 없었다.

잠시 뒤, 사봉봉이 그녀에게 물었다.

“월규 고고는 좀 어때, 괜찮아지셨느냐?”

“계속 침상에만 힘없이 누워 계셨었는데, 황상께서 어젯밤 봉명궁에서 주무셨단 얘기에 금세 기운을 차리셨습니다. 이 자란紫蘭(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가루도 고고가 태의원에서 받아 가라고 분부하신 겁니다. 욕통에 풀면 마마께 좋을 거라고요.”

“네가 또 고고한테 쓸데없는 헛소리를 늘어놨겠지.”

“그럴 리가요, 고고가 얼마나 똑똑하신 분인데요. 예전에 태상황과 태후 곁에서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지켜보셨겠습니까? 고고가 그러길, 황상께선 겉으로 보기엔 차가워도 마음씨는 따뜻하신 분이랍니다. 태상황처럼요.

태상황도 태후 마마 때문에 후궁을 비우셨는데, 황상께서도 마마를 위해 그리하셨잖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 황상께서도 참으로 다정다감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마마, 부디 황상께 조금만 더 잘해 주십시오. 태후 마마가 태상황께 하시는 절반만 해 드려도 황상께선 충분히 만족해하실 겁니다.”

사봉봉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고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하여 하루가 다르게 몸이 나빠진 거다.”

“누가 아니랍니까.”

금천아가 말했다.

“황상과 마마의 대혼 때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처음으로 몸져누우셨다가 겨우 좀 괜찮아졌는데, 청양 전하와 성 전하도 곧 혼사를 치러야 하잖습니까.

고고가 그러는데 두 전하 모두 아기 때부터 돌봐 왔으니, 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공평하게 혼사를 준비해 드릴 거라 합니다. 그러니 몸이 안 힘드시겠어요?”

사봉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궁에 갇혀 시집도 가지 않고, 정말 안쓰럽구나. 녹하 고고와 기홍 고고에 비해 월규 고고는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

“이게 다 그 위 태의 때문이죠.”

금천아가 성을 내며 말했다.

“고고가 시집도 못 가게 시간만 끌었잖습니까.”

“얼마 전에 황상께서 조만간 월규 고고한테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하시더구나. 예전에 노 의정과 고고를 맺어 주려고 하셨었는데, 곧 혼사를 정해 주려고 하시는 건 아닐까?”

“그럼 좋겠네요.”

금천아가 웃으며 말했다.

“고고한테 짝이 생기면 황상과 마마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수 있잖아요.”

* * *

월규는 잠에서 깨어 천천히 눈을 떴다. 침상 장막이 위로 걷혀 고리에 걸려 있었다. 남향으로 난 창이 반쯤 열려,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녀의 오른손은 침상 가에 걸쳐 있었다. 아마 방금 누군가 진맥을 하고 간 듯했다. 하지만 잠들기 전에 이미 진맥을 받았는데, 노 의정은 어찌 이리 금방 맥을 짚었단 말인가? 설마, 그녀의 병이…….

멀지 않은 탁자 앞에 의정 의복을 입은 사내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그 사내는 허리를 둥글게 만 채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중이었다. 검은 관모에 청색 관복. 글씨를 써 내려가는 그의 손목을 따라 너른 소매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 사람 같았지만, 아니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사람은 노낙원이었다.

소락이 침상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머, 고고 일어나셨어요?”

글을 쓰던 사내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지만, 또다시 이어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월규는 소락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노 의정, 혹 내 병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 사내는 노낙원이 아니라… 위중청이었다!

분명 그녀가 잘못 본 것이리라. 아마 환각 증세까지 생긴 것일 테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다거나…….

“월규.”

사내가 앞으로 걸어오더니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많이 수척해졌구려. 내가.”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재빨리 들어 그녀의 머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왔군.”

월규의 눈에 뿌옇게 물안개가 차오르더니 눈시울도 천천히 붉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빤히 위중청을 바라보았다.

“몰랐소…….”

위중청도 눈시울을 붉혔다.

“당신이 이런 결정을 내릴 거라는 걸 알았다면 그리 가지 않았을 거요…….”

월규는 고개를 쳐들어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런 순간에도 그녀는 여전히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천천히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금 와서 그런 말을 무엇 하러 한답니까?”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거 아오.”

위중청이 말했다.

“월규, 내가 머리를 빗겨 줄 수 있게 해 주시오.”

월규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내 머리를 빗겨 준다고요?”

“무례한 부탁이라는 거 아오. 하지만 난, 그리하고 싶소.”

위중청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예전에 태후께서 기분이 나쁘실 때면, 태상황께서 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셨소. 나도 머리를 빗겨 주며 사죄하고 싶소.”

“그럴 필요 없어요.”

월규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랑 나는, 그럴 사이가 아니잖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머리를 빗겨 주는 것뿐이잖소.”

위중청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월규, 내가 잘못했소.”

월규는 침묵에 잠겼다. 잠시 뒤, 그녀는 방 안의 하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다 나가 있어.”

소락은 곧장 하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뒤, 문을 꼭 닫아 주었다.

월규는 침상에서 내려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아프게 하면 매질을 해서 내쫓을 거예요. 다신 들어오지 못하도록요.”

“좋소.”

위중청은 마른침을 삼키곤, 빗을 집어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몇몇 궁녀가 소락을 둘러싸고 재잘댔다.

“소락 언니, 방 안에 그 사람은 누구예요?”

소락이 눈을 희번덕였다.

“보고도 모르겠니? 고고께서 눈시울을 다 붉히셨잖아. 분명 위 태의가 돌아온 거야.”

“세상에!”

한 궁녀가 놀라 소리쳤다.

“그럼 노 의정은 어떡해요?”

“맞아요. 노 의정도 고고께 마음이 있잖아요. 고고께서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직접 와서 진맥도 봐 주고, 얼마나 세심하게 챙겨 줬는데요.”

“누가 아니래. 조만간 노 의정과 결실을 거둘 수 있을 텐데, 위 태의가 너무 늦게 오셨네.”

“무슨 헛소리야?”

소락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대체 누가 노 의정과 결실을 거둔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러다 고고의 평판만 나빠지니까.”

꾸지람을 당한 궁녀는 혀를 빼꼼 내밀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뒤, 누군가 소락에게 물었다.

“소락 언니, 위 태의가 고고의 머리를 빗겨 주면 고고께서 위 태의를 용서하실까요?”

소락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고고가 누구를 선택하든 우린 축복만 하면 돼.”

다른 궁녀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고고의 완고한 성격상 아무도 안 고르실까 봐 걱정이에요.”

궁녀의 말에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월규의 성격대로라면 정말 두 사람 다 거부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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