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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88)화 (1,188/1,192)

제1188화

채 대인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희가 사뿐사뿐 들어와 고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묵용감이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황후를 밖에 세워 둔 것이냐?”

“소인이 어찌 감히 그리하겠습니까.”

사희가 웃으며 말했다.

“복도에 서 있다가, 저 멀리 마마께서 오시는 모습을 발견하고 황상께 알려 드리려 한 것이지요.”

묵용린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애써 태연한 척 헛기침을 했다.

“오면 온 것이지, 무엇 하러 상황을 보고한단 말이냐. 쓸데없이.”

사희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묵용린 곁을 오래 지킨 만큼 황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말로는 그를 꾸짖고 있었지만 사실은 퍽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황급히 말을 뱉었다.

“그럼 소인은 밖에서 마마를 기다리겠습니다.”

묵용린은 상주서를 바라보며 애써 눈에 담긴 웃음기를 감추곤 그리하라고 대꾸했다.

사봉봉이 계단을 오르며 사희에게 물었다.

“황상께선 안에 계신가?”

“계십니다, 마마”

사희가 활짝 웃으며 알랑거렸다.

“안 그래도 황상께서 마마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상께서 본궁을 무엇 하러 기다리신단 말인가?”

“그것이.”

사희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황상께선 날마다 마마께서 오시길 바라시니까요.”

사봉봉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금천아와 사희는 눈짓을 보내며 한쪽으로 가더니 조용히 각자의 정보를 공유했다.

사봉봉이 안으로 들어올 때, 묵용린은 여전히 상주서를 읽는 척했다. 그는 사봉봉이 인사를 건네는 것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으켜 세워 주었다.

“예를 갖출 것 없소.”

가볍게 그녀의 팔을 붙잡자 은은한 말리꽃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그는 참지 못하고 심호흡을 내쉬었고, 사봉봉은 조용히 그와 거리를 벌렸다.

묵용린은 손이 텅 비자 금세 허전해졌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와 사봉봉의 관계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듯했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게 다 좋아 보였지만 사실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황후, 무슨 일로 짐을 찾아왔소?”

사실 사봉봉은 조금 후회막심했다. 금천아가 요즘 들어 말솜씨가 부쩍 좋아진 게, 그녀도 홀랑 넘어갈 정도였다. 목장을 짓는 건 아무 문제없고, 경험 많은 관리인을 뽑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데 왜 기어코 장 수의를 보내야 한단 말인가. 꼭 그녀가 장 수의를 출궁시키기 위해 목장을 짓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다 묵용린이 오해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신첩.”

그녀가 꾸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신첩, 다른 일 때문이 아니라 그저 황상을 뵈러…….”

묵용린은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아니, 황후는 다른 일이 있소.”

그리 말하면서도 그는 사봉봉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봉봉은 묵용린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가장 무서웠다. 마치 저 눈빛에 자신도 불이 붙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신첩은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녀가 한 발짝 뒷걸음질 치자, 묵용린이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황후는 다른 일이 있어 찾아왔대도. 곰곰이 생각해 보시오.”

사봉봉은 계속 뒷걸음질 치다 결국 벽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눈앞의 황제는 멈추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 신첩, 일이 있어서 온 게 맞습니다. 신첩의 말부터 들어 주십시오…….”

“좋소. 짐이 그리하겠다 약조하지.”

묵용린은 손을 뻗어 벽을 짚고는 사봉봉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가두었다. 사실 묵용성이 가르쳐 준 자세였는데, 처음 해 보려니 그도 긴장이 되어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사봉봉이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약조한다니, 무얼 약조한단 말인가?

“황상, 신첩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소.”

묵용린이 웃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장 수의를 출궁시켜 목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아니오? 짐도 동의하오. 짐이 출자도 해 주겠소. 관가의 투자를 받으면 일 처리가 한결 수월하지 않소.”

사실 금천아가 진작부터 상황을 보고했고, 그는 사봉봉이 직접 입을 열기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후궁의 여인을 전부 내보낸다면 그도 사봉봉 앞에서 제법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을 것이다.

“…….”

사봉봉은 잠시 생각했다. 설마 묵용린이 가르친 덕에 금천아의 언변이 그리 유창해진 것이란 말인가? 두 사람이 작정하고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체… 누구를 위해 후궁을 비우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가 신경 쓰지 않게 하려고……?

“왜 아무 소리도 안 날까요?”

금천아가 사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사희는 고개를 저었다. 귀를 조금 더 가까이 대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궁금해하는 얼굴로 금천아를 바라보더니, 창가로 걸어갔다. 얇은 틈새로 엿본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금천아에게 멀리 떨어지라고 손짓했다. 금천아는 그가 들킨 줄 알고 단숨에 기둥 뒤로 쪼르르 달려갔다.

사희가 영십칠도 멀찍이 잡아끌며 말했다.

“자네도 멀리 떨어져 있게.”

영십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훑어봤다. 사희도 그의 성격을 알았기에 그는 영십칠에게 슬쩍 무어라 귓속말했다. 영십칠은 조금 기괴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반월문 쪽으로 물러나며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암암리에 숨어 있던 암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더니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숨겼다.

그때, 한 궁녀가 차를 내왔다. 사희는 살금살금 걸어 그녀를 가로막고는 아무 말 없이 뒤쪽을 가리켰다. 그만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궁녀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사희 공공…….”

그녀가 소리를 내자, 사희는 곧장 그녀의 입을 막고는 강제로 끌고 갔다.

곁채에 들어가서야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앞에선 절대 소리를 내지 말게.”

궁녀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희 공공, 어찌 그러십니까?”

사희는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예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다들 방 안에 꼼짝 말고 있게. 누구도 남서방을 들어가선 아니 되네. 내 명을 거역하거든 곤장을 내릴 것이야.”

궁녀와 소태감을 이렇게 해결한 사희는 곁채를 나오자마자 불진을 안고 걸어오는 왕장량을 발견했다. 그는 곧장 왕장량을 가로막으며 귓속말을 했다. 왕장량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금천아는 사희가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꼭 무언극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대체 무얼 봤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조용히 다가가 속삭였다.

“사희 공공, 황상과 마마께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사희는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꾸했다.

“다른 이에게는 절대 말해선 안 되네. 황상께서 대낮부터 글쎄…….”

말을 다 잇지도 못했는데 왕장량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가 건조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저 알았으면 된 것을, 굳이 말로 뱉진 말게.”

금천아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사희에게 물었다.

“대낮부터 글쎄 뭐요?”

사희가 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엄지를 세우고 서로 맞대며 말했다.

“이거 말일세.”

금천아는 그제야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반월문 뒤로 숨어 버렸다. 하지만 뛸 듯이 기뻤다. 황상과 마마께서 마침내 결실을 보다니.

사희 공공의 노력 덕에 남서방 반경 열다섯 보 내로는 황제와 황후뿐,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못했다. 황제는 이번이 처음인 데다가 대낮인 것도 모자라 장소도 남서방이지 않은가. 시간도, 장소도 맞지 않은데 처음이기까지 하니, 황상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조금도 소홀해선 안 되었다.

사희와 왕장량은 서로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황제와 황후 마마도 참으로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한참 뒤, 사봉봉이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잔뜩 상기된 얼굴이 얼핏 보였다. 아무 말도 없이 홀로 분주히 걸어가는 게, 금천아의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금천아도 차마 황후를 놀라게 할 수는 없었기에 조용히 뒤따랐다. 마마도 이번이 처음이니, 응당 월규 고고에게 몸을 보충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물어봐야 했다.

사희와 왕장량은 좀도둑처럼 문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고했다.

“황상, 소인들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문에 기대어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황제는 책상 뒤편에 앉아 넋을 놓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문을 밀고 들어갔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어쩐지 조금 이상했다. 책상도 가지런히 정리 정돈되어 있었고, 바닥도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사희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상태였다. 그는 황상께서 마마를 책상에 눕혔을 줄 알았다.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져 한바탕 쑥대밭이 되고……. 책상에서 내려온 뒤에는 푹신한 평상으로 자리를 옮겨 마마의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빛은 붉게 물들고……. 황상은 옷을 풀어 헤친 채 이마가 땀으로 흥건해지고…….

하지만 방안은 깨끗하기만 했다. 황제의 옷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멀끔했고, 조금 전 마마가 나갔을 때도 마마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긴커녕 단정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상한 점이라면, 황제와 황후 모두 혼비백산한 표정이라는 것이었다. 황후 마마는 말할 것도 없었고, 황제는 더 심각했다. 사희와 왕장량이 들어온 것도 아예 보지 못한 것인지, 거의 혼이 빠져 있었다.

“황상?”

사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묵용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평소처럼 대꾸했다.

“무슨 일이냐?”

“…….”

사희는 일이 성사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황제에게 맞아 비명횡사하겠지.

* * *

금천아는 마침내 사봉봉을 따라잡았다.

“마마.”

사봉봉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어찌 그리 수상쩍게 따라오는 것이냐?”

금천아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마마, 황상과 두 분이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금천아가 히죽거리며 두 엄지를 맞댔다.

“일이 성사된 겁니까?”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았건만, 그 물음에 사봉봉은 또다시 화륵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금천아의 질문을 무시한 채 서둘러 봉명궁으로 돌아왔다.

곧장 내전으로 들어선 그녀는 문을 닫아 버렸다. 몇 발짝 뒤에서 그녀를 쫓아오던 금천아는 문에 가로막히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마마께서 왜 저러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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