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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87)화 (1,187/1,192)

제1187화

“하지만 저 여종은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지 않소. 저…….”

사금언이 냉소를 지었다.

“저 여종이 못 봤다고 하면 끝입니까? 입을 열게 하는 건 어렵지 않지요. 한바탕 곤장을 치면 무슨 말이든 다 할 테니까요.”

여종은 화들짝 놀라 몸을 벌벌 떨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노야, 부인,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사금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 죽으면 불운한 것일 테고, 목숨은 건진다고 해도 이런 노비는 필요 없을 테니 노비 매매상에게 팔아 버리시지요.”

여종은 더 겁이 났다. 다른 집 노비로 팔려 가면 그나마 나았지만, 그러다 기루에 팔려 가기라도 한다면 정말 팔자를 망치는 셈이었다. 그녀가 채 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노야, 소인을 팔지 말아 주십시오! 팔지 말아 주시어요, 소, 소인은……!”

사금언이 매섭게 소리쳤다.

“본 것이냐, 만 것이냐?”

여종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봐, 봤습니다. 봤습니다.”

“누가 물을 뿌리더냐?”

여종이 고개를 들더니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채 소저를 모시는 여종 서아였다.

“저, 저 애가 그랬습니다.”

“허튼소리!”

서아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사금언이 다리를 걸어 막았다. 서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소인은 아니에요! 소인이 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소인은 계속 아가씨 곁을 지키느라 떨어진 적이 없는데…….”

“그래?”

사금언이 냉소를 지었다.

“네가 소타 뒤를 따라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보았는데? 무얼 하러 간 것이냐?”

사금언의 말에 채 대인이 별안간 서아의 뺨을 쳤다.

“어서 말하거라. 무얼 하러 간 것이냐!”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서아는 곧장 고꾸라졌고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채 소저 앞으로 기어가더니 채 소저의 다리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소인은 아닙니다. 소인은 아니에요, 아니란 말입니다…….”

채 소저는 서아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 부친을 바라보니 암암리에 그녀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서아를 걷어차며 말했다.

“똑바로 말해야 아버지께 청을 드릴 것 아니냐.”

서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소, 소인이 물을 뿌렸습니다. 하지만 소인은 안에 사람이 있는지 결코 몰랐습니다.”

“웃기시네!”

가소타가 말했다.

“내가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는데, 그걸 못 들었다고?”

“못, 못 들었습니다.”

“거짓말!”

사금언이 말했다.

“채 대인, 저 여종이 자신의 짓이라는 걸 시인했으니 이제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사 공자의 말대로 우선 곤장을 친 뒤, 맞아 죽지 않거든 매매상에게 팔아넘기겠습니다.”

“팔지 마시어요, 아가씨, 제발 소인을 팔아넘기지 마시어요. 아가씨와 얼마나 오랜 시간 함께했는데…….”

서아가 또다시 채 소저의 다리를 껴안으려 했지만, 그녀는 냉담한 얼굴로 서아를 피했다.

서아는 가슴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끊어 내려는 채 소저의 행동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아, 서아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노, 노야께 청을 드린다고 하셨잖아요…….”

채 부인이 마구 욕을 내뱉었다.

“죽어 마땅한 것, 이리 큰일을 저지르고도 청을 드려 달라는 말이 나오느냐! 너 같은 애는 진작에 내쫓았어야 하는데.”

서아는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은 소인이 뿌린 게 맞지만, 어디까지나 아가씨가 시켜서 한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하나둘 안색이 급변했다. 가난청만이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채 소저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성을 내며 말했다.

“난 네게 물을 뿌리라고 한 적 없다!”

“명확히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소인에게 암시를 주셨지요.”

채 소저가 다급히 설명했다.

“그건, 네가 잘못 알아들은 거야. 난 어쨌든 네게 물을 뿌리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녀의 말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소타의 뒤를 따르라고 서아에게 암시를 준 것은 분명 그리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설령 물을 끼얹는 건 아니라 해도 분명 다른 방법으로 가소타를 괴롭혔을 터.

사금언이 매섭게 그녀를 훑어보더니, 채 대인에게 말했다.

“오늘 댁의 소저께서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혼사도 여기서 무르는 게 좋겠습니다.”

채 대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하… 하지만 황상께서 정해 주신 혼사를…….”

채 소저는 수치심에 그에게 소리쳤다.

“공자도 저 애를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요? 전 공자를 위해서…….”

“내가 저 애를 싫어하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저 애를 업신여기는 건 절대 용납 못 합니다.”

말을 마친 사금언은 가소타를 끌고 자리를 떴다. 가소타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채 소저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난청은 눈가에 웃음기가 서린 채 걸음을 옮겨 그들의 뒤를 따랐다.

채 대인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가 대인, 내 나중에 반드시 사죄하러 찾아가겠소. 가 대인이 황상께 우리 딸아이 얘기 좀 잘해 주시면 어떻겠소? 황상의 말씀은 중천금이니, 황상께서 정해 주신 혼사를 이렇게 무를 수는 없지 않겠소…….”

가난청이 옅은 미소로 대꾸했다.

“채 대인께서 잘 모르시는 듯하군요. 황상께서는 처남인 사금언보다 저희 소타를 더 아끼십니다. 이 일은…….”

그가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채 대인은 부인과 잠시 시선을 마주치더니, 별안간 딸의 따귀를 한 대 때렸다.

“고얀 것, 우리 채가의 명성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구나!”

채 소저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더니 얼굴을 감싸 쥐곤 자리를 피했다. 자신은 사금언의 기분을 맞춰 주고자 가소타에게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 한데 그것이 도리어 제 발등을 찍은 격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 * *

딸아이의 출중한 용모 덕에 사금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었다. 사금언은 황상의 처남인 데다가 동월 최고 갑부의 아들이니, 권세도 재력도 월등한 존재였다. 다들 훌륭한 사위라며 부러워하기 바빴는데, 이제는 그것도 다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처음 황제가 혼인을 정해 주었을 때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호박은 이제 그의 집안에 굴러 들어오길 원치 않으니, 채 대인은 급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며 설득해 줄 사람을 찾으러 다니기 바빴다.

그런데 이런 일은 남에게 부탁해도 소용없었다. 가부와 영부, 사부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기에 사부를 설득하려면 가부와 영부에게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채 대인은 가부에 사죄를 청하러 가면서 귀한 선물을 한 꾸러미나 들고 갔다. 가동에게 사금언을 잘 좀 타일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 대인은 그날 일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가소타는 그의 목숨과도 같은 딸이라, 그는 딸이 채부 측간에서 물벼락을 맞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검을 뽑아 들려 했다.

옆에 있던 녹하가 필사적으로 말리며 어서 가라고 소리친 덕에 채 대인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채 대인은 문관이었기에 무관과의 교류가 극히 적었다. 그 때문에 그는 가동이 이리 흉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부탁이고 뭐고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영부를 찾아갔다.

영 부인은 매우 온화한 성격이었고 예를 갖춰 대해 주었다. 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한 영 부인은 차까지 내주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니, 영구가 잔뜩 날이 선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소타가 채 대인의 저택 측간에서 누군가에게 물벼락을 맞았단 말이오?”

그는 시위들의 수장인만큼, 화를 내지 않아도 절로 위엄이 느껴졌다. 채 대인은 영구가 입을 열지 않고 있을 때에도 이미 주눅 든 상태였는데, 그가 입을 열자 절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채 대인은 뜨거운 찻잔을 든 채 식은땀을 흘렸다.

“오…오해, 다 오해였소…….”

기홍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까닭 없이 측간에 물을 뿌린단 말입니까? 중추가 지나서 날도 추워졌는데, 소타가 감기에 든 건 아닌가 걱정입니다.”

영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배웅해 드리겠소.”

“…….”

고민하던 채 대인은 다시 사부로 향했다. 사금언은 아직 나이가 어려 혈기왕성하니,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는 사 장군과 사 주인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쩌면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몰랐다.

사장풍은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비꼬듯 입꼬리를 올렸다.

‘인품이 저리 낮은데, 감히 사부의 며느리가 되겠다고? 꿈도 야무지지.’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앵앵이 있으니까.

사앵앵은 그날, 가소타가 물벼락을 맞았단 얘기를 사금언에게 전해 듣고선 한바탕 성질을 부렸었다. 그때 치민 화가 아직 다 풀리지도 않았는데 마침 채 대인이 제 발로 찾아와 주니, 분풀이 상대를 찾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장사꾼이자 장군의 부인으로, 결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채 소저를 한바탕 꾸짖는 바람에 채 대인은 귀가 새빨개졌고, 결국엔 주눅이 들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어쨌든 황상이 직접 명한 혼사이니 지엄하신 황상께서 약속을 어길 리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회를 마치고서 그는 남서방으로 찾아가 황상께 청을 드렸다.

황제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황제는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채 대인은 허리를 굽힌 채 황제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어쩐지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한참 뒤,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채 대인의 천금은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마음씨는 영 시원찮군. 그래도 다른 대인의 천금들에게 경고를 줄 수는 있을 듯하네. 이렇게 하지. 짐이 이 일을 여서女書에 넣으라 이르겠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행동을 더 조심할 수 있도록 말일세.”

채 대인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황상께서 지금 이 일을 널리 알리겠다고 하시는 것인가……. 그는 가난청이 했던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황상은 사금언보다 가소타를 더 아낀다는 말. 사금언은 그저 혼사를 물렀지만, 황상은 딸아이의 혼삿길을 아예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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