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6화
명문가의 천금들을 다들 경멸하는 눈빛으로 가소타를 바라보았다. 가 대인이 어딘가 미흡해 보이는 것 같단 얘기는 그들도 이미 들어 본 적 있었다. 태상황의 총애를 입어 어쩌다 보니 이품 고관이 되었다던데, 지금 보니 가소타도 아버지를 닮은 듯 어디에 내놓을 만한 꼴이 못 되었다.
명문가 규수들은 교양도 있고 웃는 낯으로 온화하게 말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내용까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가소타, 시가회가 곧 시작되니, 저택 하인에게 화원에 데려다 달라고 할래? 어차피 여기 있어도 넌 못 알아듣잖아.”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건 가소타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사금언을 가리켰다.
“금언 형도 못 알아듣는데 왜 남아 있어?”
호부상서 집안의 규수가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사 공자는 채 소저의 정혼자인데 당연히 남아야지.”
그녀의 말에 가소타는 한데 모여 있는 천금들의 얼굴을 훑더니, 양 대학사의 천금을 바라보며 퍽 진지하게 말했다.
“채 소저께선 뛰어난 미인이라더니, 역시 명불허전이군요.”
채 소저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사금언도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가소타, 눈을 대체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이쪽이 채 소저라고.”
가소타가 그제야 채 소저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기가 소개도 안 해 줬으면서, 나한테 성질이야.”
“됐고, 어서 가서 혼자 놀아.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
사금언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가소타는 입술을 내밀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사금언은 발을 질질 끌며 가기 싫어하는 가소타의 모습에, 짜증이 난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와.”
가소타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고개를 돌려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금언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됐고, 그냥 여기 있어.”
그가 채 소저에게 설명했다.
“저 애가 워낙 사고뭉치라 아무도 안 지켜보면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시는 잘 몰라도 조용히 있으면 될 겁니다.”
그가 한 말이니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가소타는 계속 남아 있게 되었고, 기쁜 마음에 의자를 사금언 옆으로 끌고 와 앉았다.
사금언이 발로 막아서며 말했다.
“멀찍이 떨어져. 너만 보면 짜증 나니까.”
가소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멀리 떨어뜨렸다.
저쪽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누군가 웃으며 가난청에게 말했다.
“자네 누이는 자네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사 공자를 따라다니는군. 정말 재미있어.”
가난청이 웃으며 말했다.
“내 누이가 어릴 때부터 금언과 함께 자랐거든. 늘 소란스럽게 떠드는 게 몸에 배었지. 우리가 시가를 논하는 동안 재미없다며 답답해할 텐데, 그래도 금언이 놀아 주겠군.”
시가회가 시작되었다. 한 사람씩 한 글자를 제시하면 다 같이 시를 이어서 읊는 게 규칙이었다. 시를 잇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했다.
가소타는 턱을 괸 채 다른 사람들만 구경만 했다. 그녀는 이런 것에 별로 흥미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지만, 누군가 시를 잇지 못해 벌주를 마실 때면 잔뜩 신이 나서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한번은 채 소저가 걸렸는데, 다른 이들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와중에 가소타가 홀로 앞장서서 소리쳤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채 소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어 올리곤 소매로 가린 뒤 한 모금 작게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가소타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가소타는 고개를 돌린 채 사금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사금언은 성가셔하는 얼굴로 채부의 하인에게 손짓하더니 몇 마디 지시를 남겼고, 하인은 곧장 가소타를 끌고 갔다.
채 소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사금언이 말했다.
“측간에 가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채 소저는 웃으며 더는 묻지 않더니, 자신의 여종 서아絮兒를 바라보았다. 서아는 몰래 가소타 뒤를 밟았다.
가소타는 볼일을 다 본 뒤, 바지를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별안간 머리 위에서 물 한 바가지가 쏟아졌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녀는 서둘러 요대를 묶고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날이 춥진 않았다. 하지만 옷이 물에 젖으니 바람만 불어도 절로 재채기가 났다.
“누구야? 누가 물을 끼얹은 거야?”
그녀가 목청이 터져라 소리쳐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데려다준 하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소타는 옷자락을 툭툭 털고 다시 시가회가 열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몰골에 다들 손가락질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채 소저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금언은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겼다. 가소타가 흠뻑 젖은 꼴로 나타나자, 그는 안색이 급변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이랬어?”
가소타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내가 어찌 알겠어요. 나와 보니 아무도 없던데.”
사금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가소타를 보며 비웃었던 공자와 천금들을 일일이 훑더니, 그들에게 물었다.
“누구 짓이야?”
채 소저는 정말 의외였다. 사금언도 가소타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소타가 저런 일을 당했다고 발 벗고 나서다니? 하지만 그녀의 저택에서 벌어진 일이고, 오라버니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그녀가 수습하러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실수로 물을 끼얹었나 봅니다. 아마 소타 소저가 측간에 있다는 걸 모르고 한 짓일 거예요. 이렇게 하죠, 제가 여종에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라고 하겠습니다.”
“옷은 당연히 갈아입어야 하는 거고, 이 일도 명백히 밝혀야 합니다.”
사금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모르고 물을 뿌렸다고요? 채 소저 댁에선 그런 식으로 일합니까? 안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물을 끼얹는다고요?”
그가 몰아세우는 듯한 말투로 따져 묻자, 채 소저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게…….”
상서부의 천금이 수습에 나섰다.
“그리 큰일도 아닌 것을요. 소타 소저한테 새 옷으로 보상하면 될 일입니다.”
사금언이 코웃음을 쳤다.
“매년 어머니께서 우리 사가 상호의 가장 좋은 옷감으로 소타에게 새 옷을 지어 주시는데, 이 애한테 새 옷이 부족할 것 같습니까? 이번 일은 분명 누군가 고의로 한 짓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을 뿌린 뒤에 왜 아무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뒤가 켕겨서겠지요.”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을 때, 가난청은 채 공자를 따라 저택에 새로 들인 말을 구경하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몽달에서 구해 온 말인데, 체형도 거대하고 발굽도 둥글고 튼실했다. 석판에 발굽이 닿을 때마다 내는 소리를 들으며 가난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준마가 확실하군.”
한 하인이 분주히 달려와 고했다.
“공자, 가씨 아가씨가 물에 젖어 사 공자께서 화를 내고 계십니다. 우리 아가씨께서 서둘러 와 보시랍니다.”
가난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동생이 어찌 물에 젖었단 말인가? 지금 어디 있나?”
그는 말을 뱉으며 서둘러 시가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채 공자는 하인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오해일 걸세. 분명 오해일 거야. 다들 호수 섬이 아닌 정원에 있다고 하니, 내가 가 대인을 정원으로 안내하겠네.”
가난청은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가소타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사금언은 성이 난 얼굴로 무어라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가난청은 걸음을 늦추고 사람들 뒤에 섰다. 채 공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 대인, 어찌 앞으로 가지 않고?”
가난청이 미소를 지었다.
“나 대신 누군가 동생을 지켜 주니, 굳이 나갈 필요 없을 것 같네.”
이곳은 측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사금언은 모든 이들을 여기로 데려와, 물을 뿌린 사람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채 소저에게 물었다.
“소타를 측간에 데려다준 종은 어디 있습니까?”
채 소저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잡일을 하는 여종이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디든 돌아다니지요. 저택이 크니 저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면 저택 관리를 불러 주십시오.”
채 소저는 어쩔 수 없이 하인에게 관리를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는 채 대인과 채 부인까지 모시고 왔다. 사금언이 성질을 부리고 있다고 하니 다들 놀라 찾아온 것이다.
가소타가 저택에서 물벼락을 맞았다는 말에 채 대인은 더욱 당황했다. 가동은 그저 이품 관리라 품계상 그와 별 차이 없고 성격도 순한 것 같았지만, 태상황의 노신이라 황상이 유독 신임하는 신하였고 사적인 친분도 깊었다. 그런 집안의 딸이 자신의 저택에서 모욕을 당했으니 이는 정말 큰일이었다.
그는 즉각 관리에게 가소타를 측간에 데려다준 여종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다들 관리만 기다리고 있는데, 채 부인이 불만스러운지 채 대인에게 조용히 투덜거렸다.
“사 공자는 곧 우리 사위가 될 사람인데 뭐 때문에 저리 가씨 집안 천금을 위해 나선대요. 참 이해가 안 가네. 누가 보면 꼭 저 가 소저를 좋아하는 줄 알겠어요.”
채 대인이 눈을 부릅떴다.
“헛소리! 두 집안의 친분이 얼마나 깊은데. 게다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니 응당 누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사 공자가 나서는 게 당연하지.
게다가 사 공자가 나서지 않더라도 가 대인까지 우리 저택에 있는 마당에 이 일이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소? 대체 어느 눈치 없는 것이 이 사달을 벌여서는, 잡히기만 하면 내 엄벌에 처할 것이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채 소저는 눈꺼풀을 드리운 채 당혹감을 숨기려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가 여종을 데리고 왔다.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던 여종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인은 아가씨를 측간에 데려다 드리고 곧장 자리를 떴습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관리가 아무리 물어도 그녀는 끝까지 잡아뗐다.
채 대인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자신의 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아버지의 시선을 피했다. 채 대인은 대충 눈치를 챘는지 웃으며 사금언에게 말했다.
“사 공자, 보아하니 저 애는 정말 모르는 듯하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소타 아가씨도 놀랐을 테니 우선 돌아가 쉬게 하고, 나중에 내 직접 찾아가 사죄하겠소.”
가소타가 사금언을 힐끔 바라보더니 곧장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괜찮아요. 물 좀 맞은 게 뭐 놀랄 일이라고요. 전 나약한 여인이 아니에요. 대체 누가 물을 끼얹었는지 오늘 꼭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채 대인, 들으셨지요? 소타가 오늘 꼭 찾아내겠다니 저도 도와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