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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84)화 (1,184/1,192)

제1184화

양 수의는 승덕전에 올 때마다 황제가 연주를 시킬까 봐 늘 고금을 가져왔다. 황제의 명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방석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자신이 바꾼 곡조를 연주했다.

그녀의 연주 실력은 매우 훌륭했고 편곡한 곡도 뛰어났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가락에 취해 곡조에 빠져들었다. 오직 묵용린만이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연주가 끝나자, 그가 고개를 들고 박수를 쳤다.

“훌륭하군.”

그가 사봉봉에게 물었다.

“황후는 어땠소?”

사봉봉도 양 수의의 연주를 즐겁게 감상하였기에 훌륭하다고 대답했다.

묵용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양 수의에게 말했다.

“이리 능력이 뛰어나니, 태상사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소?”

양 수의는 화들짝 놀라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장 바닥에 엎드려 감사 인사를 표했다.

“황상, 태상사는 신첩이 어려서부터 꿈에 그리던 곳이었습니다. 황상께서 정말 신첩을 태상사에 보내 주신다면, 신첩은 남은 일생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사실 그녀도 오늘 이 마음을 내비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먼저 언급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겐 정말 엄청난 깜짝 선물이었다.

“잘 생각해 본 것 맞소? 태상사에 들어가려면 출궁을 해야 하오. 다시는 양 수의로 살 수 없소.”

“이미 충분히 고민하였습니다. 신첩은 태상사에 가고 싶습니다. 부디 황상께서 도와주십시오.”

묵용린은 잠시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짐이 도와주겠소. 다만 그대의 신분이… 혹 집안에 자매가 있소?”

“예, 딸 넷 중 큰언니는 일찍이 출가했고, 신첩이 셋째입니다. 넷째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지요. 둘째 언니는 재작년부터 병을 앓아 시골 별장에서 요양하던 중, 작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묵용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 소식을 전하시오. 둘째 언니가 아직 별장에서 요양 중인 것처럼 해 달라고 말이오. 그리고 그대는 짐을 정리하여 밤에 조용히 출궁하고, 며칠 뒤에 둘째 언니의 신분으로 태상사에 들어가시오.”

양 수의는 기쁜 발걸음으로 물러났다.

묵용린은 슬쩍 사봉봉의 안색을 살폈지만,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떠보듯 물었다.

“짐이 양 수의를 태상사로 보냈는데, 황후의 의견은 어떻소?”

사봉봉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기쁘시다면 신첩도 별다른 의견 없습니다.”

“…….”

‘짐은 그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는 일이거늘…….’

그는 단념하지 않고 끝까지 물어보기로 했다.

“황후는 하고 싶은 말이 없소?”

사봉봉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양 수의를 태상사로 보냈으니, 장 수의도 좋은 곳으로 함께 보내 주시지요.”

묵용린이 기쁜 마음에 막 입을 떼려는데, 계속해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그들의 입궁은 규율에 맞지 않았습니다. 출신 신분도 낮으니 모두 내보내시지요. 몇 년 뒤에 신분이 높은 이들로 신첩이 황상께 골라 드리겠습니다. 그리하면 조정을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떴던 묵용린의 가슴은 급격히 깊은 곳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짐은 그대를 위해 후궁을 비우려는 것인데 이런 호의를 받아 주지 않다니, 정말 너무하군.’

그가 차가워진 안색으로 코웃음을 쳤다.

“황후가 그리 말하니 장 수의는 남겨 두는 게 좋겠구려. 황후가 너무 적적할 것 아니오?”

사봉봉이 평온한 얼굴로 대꾸했다.

“황상 말씀도 맞습니다. 장 수의는 똑똑하고 어진 성품이니, 곁에 두시어 이따금 답답한 마음을 달래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묵용린이 무슨 말을 하든 사봉봉은 곧장 또 다른 말로 그를 가로막아서, 말문이 막히기 일쑤였다. 그는 숨이 턱 막혀 내쉬지도 들이마시지도 못할 것 같았다. 화가 나서 치가 다 떨릴 지경이었다.

사봉봉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자 더는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호랑이 수염도 적당히 당겨야지, 힘껏 당기면 괜히 사서 고생할 뿐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그만 물러가겠다고 고했다.

장 수의는 문 앞에 서서 양 수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 수의의 모습에 장 수의가 물었다.

“황상께서 태상사 얘기를 꺼내셨어요?”

양 수의가 가까이 다가와 장 수의를 끌어안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고마워요, 우리 아우님.”

장 수의는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저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요. 전 자신을 위해서 그리한 거거든요. 형님이 나가면 후궁엔 황후 마마와 저뿐이니, 그래도 황상께서 절 더 높게 봐 주시겠죠.”

양 수의는 조금 부끄러웠다. 승덕전에서 그녀도 정말 이렇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법 오랜 시간 함께 붙어 지낸 두 사람은 친자매처럼 살갑게 지냈다. 장 수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양 수의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함께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 수의가 탄식을 뱉으며 말했다.

“처음 입궁했을 땐 황상을 잘 섬겨서 지위도 올라가고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저 아들딸 하나씩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한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궁 안이 이리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황상께서도 결국엔 태상황의 뒤를 따르시는군요. 끝내 황상의 총애를 얻는 주인공이 황후 마마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사실…….”

“당연히 황후 마마이셔야죠. 설마 허 귀비겠어요?”

양 수의가 말했다.

“그 못된 허 귀비가 저지른 잘못만 해도 대체 몇 개예요. 가여운 유 귀인을 바둑알 삼아 처참한 말로를 걷게 했잖아요.”

“누가 아니래요.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전부 다 지켜본다더니, 못된 짓을 많이 하니까 하늘이 노해서 거둬간 거겠죠. 역시 숙비가 처신을 잘했어요. 입궁하자마자 투명 인간처럼 숨어 지내더니 결국엔 친왕비가 되었잖아요. 적막한 궁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것보다는 고귀한 신분의 친왕비가 되는 게 낫죠. 이제 형님도 활로를 찾았으니 남은 사람은 저뿐이네요.”

양 수의가 물었다.

“아우님도 다른 길 좀 생각해 봤어요? 내가 볼 때, 계속 궁에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장 수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 형님처럼 그런 재능도 없고, 그저 말에 대해서나 조금 알 뿐인걸요. 지금은 태상사에 여자 관원이 없지만 과거에는 있었대요. 형님이 태상사 첫 여관인 것도 아니니 황상께서 말씀하셨다면 분명 문제없을 거예요. 저랑은 정말 다른 상황이죠. 전 태복사 목장에 들어갈 수 없어요. 여인을 뽑았던 선례가 아예 없거든요.”

그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태복사 목장으로 가느니, 차라리 절 변방 목장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어요.”

양 수의가 놀라며 물었다.

“세상에, 변방에서의 삶은 무척이나 고생스럽다던데요.”

“그렇게까지 고생스럽진 않아요. 날씨가 조금 궂을 뿐이죠. 그것 말고는 얼마나 자유로운데요.”

장 수의가 동경에 젖은 눈빛으로 말했다.

“변방에 목장을 짓고 말을 길러서 임안성이랑 강남에 팔고 싶어요.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말은 궁에 팔고요. 저도 옛날에 황후 마마께서 하셨던 것처럼 잘할 수 있어요.”

“와, 마상馬商이 되고 싶은 거군요.”

장 수의가 고개를 흔들거리며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사가 상호는 황상皇商이고 동월 최고의 갑부죠. 매년 그들이 고용하는 상대는 수도 없이 많아요. 만약 사가 상호와 거래를 할 수 있다면 제가 뭘 더 걱정하겠어요?”

양 수의가 탄복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우님은 정말 큰일을 할 사람이네요. 저는 못 합니다. 그저 태상사에서 곡조를 손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아우님이 정말 진심이라면, 제가 황상께 말씀드려 볼게요.”

장 수의가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은 황상을 찾아가도 소용없어요. 황후 마마를 찾아가야 해요.”

“좋아요. 그럼 황후 마마를 찾아가서 말씀드려 볼게요.”

장 수의가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벌써 마마께 말씀드릴 수 있는 사람한테 부탁해 두었거든요.”

“누구요? 누구한테 부탁했는데요?”

장 수의는 웃기만 할 뿐, 뜸을 들이며 대답을 회피했다.

* * *

사봉봉이 봉명궁에 돌아오자마자 금천아가 원망을 토로했다.

“마마, 황상께서 후궁을 비우시려는 건 분명 마마를 위해서인데 마마는 어째서 그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황상께서 얼마나 화를 내나 지켜보시려고요?”

사봉봉이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넌 내 사람이니, 황상의 사람이니?”

“소인은 당연히 마마의 사람이죠. 하지만 오늘 일은 마마께서 너무하셨습니다.”

“하면 네가 한번 말해 보거라. 본궁이 어찌해야 했는데?”

“당연히 황상의 마음을 받아 주시고 이참에 장 수의도 해결하셨어야죠. 그럼 모두한테 다 좋잖아요?”

사봉봉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 수의를 해결하다니, 너 설마 장 수의를…….”

금천아는 사봉봉이 오해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급히 대꾸했다.

“마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소인이 얼마나 모범적인 사람인데요. 소인의 말은 양 수의가 출궁하니 장 수의도 더는 궁에 머물 수 없단 뜻이었어요. 차라리 원하는 게 있는지 물어봐서 도와주는 게 더 낫다는 거죠. 다들 떠나고 나면 마마도 조용히 지내실 수 있잖아요?”

“황상 말씀 못 들었어? 장 수의는 남겨 두신다잖아.”

금천아가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그건 마마 때문에 억지로 그리 말씀하신 거고요. 황상께서 아무리 못되게 구셨었다고 해도 다 옛날 일이 아닙니까. 지금 와서 자꾸 옛일을 되새기지 마시어요, 도량이 작아 보이니까요.”

사봉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도량이 작아 보인다고? 하!”

금천아는 잠시 침묵하다 화제를 돌렸다.

“마마, 사가 상호에서 일 년에 말을 몇 필이나 사죠?”

사봉봉은 조금 의아했다.

“그건 왜 묻느냐?”

“마마와 부인께서 가장 근심하셨던 일이잖습니까. 좋은 말을 사지 못해 매년 엄청난 은량을 쏟아부으셨고요. 마마, 만약 변방에 좋은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다면 앞으로는 그 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사봉봉은 도통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변방에 목장을 짓는 겁니다. 그리고 말을 잘 아는 사람을 불러 말을 기르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 상대에 필요한 말도 기를 수 있고, 임안과 강남에 팔 수도 있을 겁니다. 궁에도 팔 수 있고요. 마마, 고민 좀 해 보십시오. 아주 좋은 일 아닙니까?”

“하지만 어디서 말에 정통한 자를 찾는단 말이냐?”

“장 수의입니다. 장 수의 부친이 태복사 마창협령이 아닙니까.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목장을 엄청 돌아다녔답니다. 그야말로 말 전문가지요. 지난번에 황상께서도 장 수의가 말에 대해 잘 안다며 칭찬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봉봉은 그제야 금천아가 하고 싶었던 말을 돌고 돌려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목장을 세우는 건 정말 괜찮은 생각이었다.

“마마, 사실 이건 장 수의의 생각입니다. 마마께서 좀 도와주시어요. 장 수의가 그러는데 마마께서 허락만 해 주시면 매일 향불을 꽂고 마마의 장수를 빌겠답니다.”

“하지만 황상께서…….”

“만약 마마께서 정말 그리하시면 황상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오늘 일도 문제 삼지 않으실 거예요.”

금천아가 필사적으로 타일렀다.

“장 수의는 소원을 이루고 황상께선 기뻐하시고, 마마께서도 평온하게 지낼 수 있지 않습니까? 일거삼득의 좋은 일을 어찌 그리 고민하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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