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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83)화 (1,183/1,192)

제1183화

영안을 언급한 건 사금언의 폐부를 찌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그가 장공주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남들은 알지 못했고, 이곳 시위들은 영구 부자를 극진히 숭배했기에 곧바로 영안을 추켜세웠다.

“영 부문주는 호랑이 아비 밑에 역시 호랑이 자식이 난다는 증거지.”

“맞아! 영 대인도 대단하지만 영 부문주는 청출어람이지.”

사금언은 듣기 싫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다 흩어져. 당직을 설 시각이다.”

말을 마친 그가 성큼성큼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가소타가 즉시 뒤따라갔다.

“금언 형, 우리 같은 조예요.”

원래 사금언과 같은 조였던 시위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얻어먹었으면 그 값을 해야 한다. 가씨 아가씨가 대신 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는 조금 더 쉴 수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양보했다.

광화문 옆에서 사금언은 양손을 늘어뜨리고 표정은 차갑게 굳힌 채 금강야차상처럼 서 있었다.

가소타가 그의 맞은편에 서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사금언이 냉랭하게 입을 막았다.

“당직을 설 때는 말하는 게 아니야.”

가소타는 입을 다물고 대신 그에게 눈을 깜빡거렸다. 사금언은 그녀가 도대체 뭘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잠시 후, 사봉봉이 금천아를 데리고 다가왔다가 가소타를 발견하고 웃으며 물었다.

“소타, 첫날부터 당직이구나. 아직 적응이 안 되지?”

“괜찮아요.”

가소타는 대답하고 나서야 예를 차려야 한다는 게 생각나서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사봉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필요 없어. 그냥 서 있으면 돼. 저들이 안 가르쳐 줬니?”

사봉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사금언을 나무랐다.

“오라버니 노릇을 어떻게 한 거야? 소타는 처음 왔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왜 안 가르쳐 줬어?”

사금언이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내가 이 애의 오라버니도 아닌데,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 가르치라지!”

사봉봉은 눈살을 찌푸렸다.

“넌 소타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잖아! 그 정도의 의리도 없니? 영안을 보고 좀 배우렴. 청양에게 얼마나 잘하니?”

사금언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로 약속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심장을 찢은 사람은 그의 친누이이고, 이 나라의 황후였다. 그는 아무 말도 대꾸하지 못하고 잔뜩 성이 나서 콧방귀만 뀌었다.

사봉봉도 그들과 잡담을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황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다가 사금언을 돌아본 그녀가 한 마디 했다.

“입가에 뭐가 묻어 있단다.”

사금언이 만져 보니, 그건 끈적한 참깨였다. 아까 그는 가소타의 해바라기 씨를 받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가 전달해 준 참깨 떡을 받아먹었다. 아마도 그걸 먹다가 실수로 묻은 것 같았다.

사봉봉이 떠나자, 그는 가소타를 탓했다.

“입가에 뭐가 묻었는데 왜 알려 주지 않았지?”

가소타는 억울했다.

“말하려고 했는데,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눈짓으로 아무리 알려 줬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서 누구를 탓해요!”

“…….”

그때,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아주 예쁘게 생긴 궁비였다. 무척 가냘프게 생겼는데, 걸어가는 자태가 아름다웠다. 그녀의 곁에는 궁녀 두 명이 따라가고 있었다.

가소타와 사금언은 시선을 마주쳤다. 사금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기자, 그녀는 즉시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광화문은 승덕전으로 가는 문으로, 저 여인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지만 분명 승덕전에 가려는 궁비일 것이었다. 사봉봉이 방금 간 곳도 승덕전이기에, 사금언은 이 궁비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분 때문에 입을 열기 곤란했다. 어쨌든 그는 황후의 친동생이기 때문이다.

가소타는 사금언과 같은 마음이었다. 황제 오라버니의 첩실이 황제와 황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길을 막았다.

“마마, 어디로 가십니까?”

다가온 사람은 양 수의였다. 그녀는 장 수의만큼 똑똑하진 않아도 속으로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다. 허 귀비가 죽고 유 귀인도 죽었다. 숙비는 조용히 궁을 나갔으니 이제 궁에 남은 사람은 그녀와 장 수의뿐이었다.

황제가 황후를 대하는 태도는 그녀도 똑똑히 보았다. 이 일로 그녀는 오랜 시간 고민했다. 차마 경솔하게 승덕전에 찾아갈 수 없었지만, 마침 황제가 부르니 그녀는 기회를 틈타 황제의 의도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어린 시위가 앞을 막아서도 온화하고 겸손하게 대꾸했다.

“황상께서 승덕전으로 부르셨네.”

가소타는 두 궁녀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소식을 전한 사람은 누구였죠?”

“사희 공공이 전해 주었네. 말을 전해 주자마자, 공공은 곧장 자리를 떴지.”

가소타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한쪽 말만 듣고 보내 줄 수는 없는데…….”

“정말 황상께서 부르셨으니 못 믿겠으면 이 애들에게 물어보게.”

두 궁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확실합니다. 사희 공공이 찾아오셔서는 황상께서 저희 마마를 부르신다고 하였습니다.”

가소타는 사금언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처남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냉랭한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가소타는 곧장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사금언은 아직도 저들을 들여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제가 먼저 들어가서 물어볼게요.”

가소타가 말했다.

“마마께선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막 자리를 뜨는 찰나에, 그녀가 사금언에게 물었다.

“혼자서도 괜찮겠어요? 다른 형제를 불러올까요?”

사금언은 잔뜩 성이 나서는 포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갔다 오기나 해.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처음 근무 서는 여자애가 그에게 혼자서도 괜찮겠냐니? 그게 물을 말인가? 제까짓 게 뭔데, 만약 가소타가 저 여인을 막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발길질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가소타는 재빨리 승덕전에 도착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런 일로 황제를 찾아선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오해를 피하고자 슬쩍 사희를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다. 혹여 그녀가 황후의 지시로 이런 짓을 한다고 오해를 사면 정말 큰일이었다.

하지만 사희는 복도에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냉혈 판관처럼 계단에 꼿꼿이 서 있는 영십칠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영십칠에게 다가가 물었다.

“십칠 형, 내가 잠깐 대타해 줄 테니 당직실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와요.”

그런데 영십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가소타도 영십칠이 황제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조심스레 복도를 돌아, 창문에 귀를 대고 엿듣기로 했다. 막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데, 목이 갑자기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그녀의 옷깃을 잡고 끌어낸 것이다.

영십칠이 가소타를 바닥으로 패대기치며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얼 하는 짓이지?”

“훔쳐 들으…….”

“뭐?”

“아뇨, 사희 공공을 찾고 있었어요.”

이제 막 복도로 돌아온 사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서둘러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아이고, 가씨 아가씨, 소인을 찾으셨다고요.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가소타는 사희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나지막이 말했다.

“광화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어떤 마마가 승덕전으로 찾아왔더라고요. 황상께서 부르셨다는데, 정말이에요?”

“양 수의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소인이 직접 소식을 전해 드렸지요.”

“황상께서 양 수의는 왜 찾으시는데요?”

“그것이.”

사희가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잘 모릅니다.”

“황후 마마도 안에 있죠?”

“계십니다. 마마와 황상께서 얘기 중이시지요.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뇨.”

가소타가 패도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지금은 근무 중이라서요.”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분주히 걸어가는 모습이, 퍽 바쁜 모양이었다.

사실이라는 말에 가소타도 더는 양 수의를 막아설 수 없었다. 게다가 양 수의에 대한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생긴 것도 예뻤고 가녀린 목소리에 친절하기까지 하니, 가소타는 곧장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금언이 물었다.

“확실히 알아본 거 맞아? 정말 황상께서 부르셨대?”

“확실해요. 사희 공공이 직접 말해줬어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영십칠을 칭찬했다.

“십칠의 경공은 정말 신의 경지에 다다른 것 같아요. 그전엔 몰랐는데 오늘 십칠한테 잡혀 보니까 알겠네요. 역시 영 백부가 가르친 사람이라 그런지 영가군이 궁에서 으뜸이에요.”

그녀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영안 오라버니는 환경문에서 으뜸이고요.”

사금언은 이미 너무 오래 참고 있었기에 결국 화가 폭발하여 소리를 질렀다.

“영안 얘기 한 번만 더 꺼내 봐!”

가소타는 경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영안 오라버니랑 청양 언니의 혼사로 기분이 나쁜 거예요? 황상께서 금언 형한테도 예쁜 미인을 점찍어 주셨잖아요.”

그녀가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

“날 좀 봐요. 난 아무도 없는데 변함없이 즐거워하잖아요.”

사금언은 몸을 틀어 눈길을 돌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았다.

* * *

양 수의는 승덕전 안으로 들어가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차를 마시고 있던 묵용린은 시선도 들어 올리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일어나시오.”

양 수의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황후도 곁에 있었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짐이 듣자니.”

묵용린이 입을 열었다.

“중추 연회 때 선보인 가무 공연이 양 수의의 성에 차지 않았다던데?”

양 수의는 화들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만족스러웠습니다.”

“곡조의 반전이 매끄럽지 못하다며, 본인이 곡을 만들었다면 분명 원곡보다 더 나을 거라고 하지 않았소?”

장 수의는 놀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말을 한 적 있긴 했지만, 장 수의에게만 했을 뿐이었다. 설마 장 수의가 황상에게 찾아와 고자질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녀와 장 수의는 사이가 좋았다. 정말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냈는데 장 수의는 어째서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장 수의가 후궁이 비어 가는 틈을 노려 그녀를 누르고 더 높이 올라가려 한단 말인가?

“일어나시오. 짐은 그대를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오.”

묵용린이 말했다.

“음률에 뛰어나니 그날 밤 가무 곡도 기억할 테지. 그대가 편곡한 곡을 짐에게 연주해 주시오. 정말 능력이 뛰어난지 짐이 한번 봐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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