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2화
영구는 당직 근무를 마치고 막 퇴청하는 길에 한 여자아이가 나무 밑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타,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
그는 원래 성격이 차가워서 묵용청양과 가소타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 늘 그의 곁으로 기어 와서 달덩이 같은 얼굴을 들고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록 소타가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아주 귀여웠다. 그녀가 입을 벌리고 그를 보며 웃을 때마다 그는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늘 그녀를 끌어안아 목에 걸었지만, 소타의 엉덩이가 채 그의 목을 덥히기도 전에 가동이 달려와 소타를 안고 가 버렸다.
가동은 마치 그가 가소타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잔뜩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서 그는 어리둥절해했다.
그 또한 아들과 딸이 모두 있어서 가정이 조화롭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오직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다른 집은 모두 아들과 딸이 있지만, 그의 슬하에는 외동아들만 있었기에 그는 특히 딸이 갖고 싶었다.
그도 묵용청양을 좋아했지만 아쉽게도 그 웬수는 너무 강적이라서 그조차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차라리 공경하되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소타는 달랐다. 그녀는 영리하고 사랑스러웠다. 어른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저는 백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소녀가 사랑스럽게 말했다.
“오, 이 백부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냐?”
“네, 백부. 저는 시위영에 들어가서 시위가 되고 싶어요.”
영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넌 아가씨잖니. 여인은 시위가 될 수 없단다.”
“하지만 전 무공을 연마했잖아요. 조정을 위해 일하고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어요.”
영구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네 아버지가 너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고 한 것이냐? 그건 신경 쓰지 말거라. 네 아버지는…….”
“바보라는 거, 저도 알아요.”
가소타는 배시시 웃었다.
“우리 아버지랑 상관없어요. 제가 시위가 되는 게 좋아요.”
영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타야, 네 아버지가 너를 아예 망쳐 놓았구나. 만약에 네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너에게 그런 소망을 주입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어찌 시위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겠느냐? 이 백부의 말을 잘 듣거라. 돌아가서 네 어머니께 자수를 배우거라. 그것이 아가씨가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는 자수를 아무리 배워도 못하는걸요. 매번 어머니께서 수를 놓으라고 강요하실 때마다 제 손가락은 잔뜩 찔려서 벌집처럼 되고 말아요.”
그건 영구도 알고 있었다. 소녀의 통통한 손가락에 뚫린 자국이 잔뜩 생겨서 피범벅이 된 적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그는 기홍에게 녹하를 찾아가라는 말까지 했었다. 가소타에게 자수를 강요하지 말라고 타일러 보라는 것이었다.
“백부, 백부는 시위대의 총책임자죠?”
가소타는 고개를 쳐들고 기대를 가득 품고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말했어요. 백부만 허락하면 제가 시위가 될 수 있다고요.”
영구는 속으로 가동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소타가 모처럼 그에게 부탁을 하니 그 역시 정말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건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 시위대에 그런 규정은 없었다.
“저기, 소타야. 백부가 지금 황상을 만나야 하는 급한 일이 떠올라서 얼른 가 봐야겠다.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가소타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부랴부랴 승덕전을 향해 걸어갔다.
부리나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소타는 영 백부가 거절하기 힘들어서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 백부는 그녀의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자신이 그를 꽤 난처하게 만든 것이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와 식사를 한 가소타는 혼자 안뜰에 있는 탁자에 턱을 받치고 앉아서 허공에 뜬 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복도를 지나던 가난청이 그 모습을 보고 계단을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가소타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이를 가장 아끼는 가난청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뭐야?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오라버니한테 말해 봐.”
가소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버지와 영 백부도 도울 수 없는 일이니, 오라버니는 더더욱 안 되겠죠. 오라버니는 문관이잖아요.”
가난청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타야, 일을 해결하는 건 문관이나 무관과는 상관없어. 여기와 관련이 있지.”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이 오라비가 아주 똑똑하니 분명 넌 도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야. 한번 말해 봐. 뭐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야?”
“오라버니, 난 시위가 되고 싶어요.”
가난청은 듣자마자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어쩐지 아버지와 영 백부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더니. 두 분은 모두 동월에서 손꼽히는 권력을 가진 조정 대신이지만, 이건 확실히 그들의 능력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도를 바꿀 순 없지 않은가.
시위가 되는 것이 누이의 숙원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예전에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누이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금 절도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오히려 가소타가 한번 시도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방법을 생각해 볼게.”
가소타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버지도 영 백부도 안 된다고 했는데 오라버니는 방법이 있어요?”
가난청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일은 네가 사람을 잘못 찾아갔어.”
“그럼 누굴 찾아가야 해요?”
“시위 제도는 누가 정하지?”
“황상이지요.”
“그래, 황상은 제도를 만들 수 있으니 당연히 제도를 고칠 수도 있겠지?”
가소타는 문득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아서 기쁘게 말했다.
“오라버니, 그럼 전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 * *
사금언이 막 광화문光華門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금언 형.”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해서 사금언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본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가소타가 이등 시위의 갑옷과 투구를 용맹하게 걸치고 위풍당당하게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줄곧 가소타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달덩이 같은 둥근 얼굴에, 머리카락은 두 갈래로 틀어 올려서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 같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보기 싫게 틀어 올린 머리칼이 보이지 않았고, 달덩이 같은 얼굴도 투구로 반쯤 가려졌다. 거기에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이 도드라지고 여기에 바람을 일으키는 걸음걸이까지 더해지니, 정말 늠름한 영웅의 자태가 드러났다.
그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보고도 모르겠어요?”
가소타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도 이제 금언 형처럼 이등 시위예요.”
사금언은 기분이 팍 상했다.
“어린 여자애가 어찌 시위가 되었다는 거야? 나는 당당하게 시험을 통과해서 이등 시위가 되었어! 넌 뭘 했는데?”
가소타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우리 오라버니가 황제 오라버니와 친분이 있거든요.”
“우리 누님은 황후거든!”
사금언이 말했다.
“지금 바로 누님한테 가서 너를 시위대에서 내쫓으라고 말할 거야.”
“할 수 있으면 해 봐요.”
가소타는 개의치 않았다.
“봉봉 언니가 금언 형의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은데요?”
“가소타!”
사금언은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감히 황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가소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금언 형도 아까 우리 누님이라고 불렀잖아요?”
사금언은 그녀를 노려봤다. 생각해 보니 이런 하찮은 일로 괜히 황제와 황후를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당번을 서러 갔고, 함께 당번을 서는 시위들은 어린 아가씨가 시위로 왔다는 것을 매우 신선하게 여겼다. 가소타는 특유의 유순한 성격으로 금방 사람들과 친해졌고 함께 재잘재잘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한쪽에 서 있던 사금언만 냉랭한 시선으로 상황을 관망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놈들은 아가씨를 처음 보나? 어째서 저마다 가소타를 보는 눈빛이 번뜩거리는 거지?’
가소타는 호주머니에서 해바라기 씨를 꺼내서 모두와 나누어 먹었다. 그녀는 군것질을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간식을 들고 다녔다.
시위들은 평소에 군것질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결국 신분 때문이었다.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위풍당당한 시위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해바라기 씨를 한 움큼 꺼내서 까먹는다고 상상하면 꼴이 뭐가 되겠는가?
그러나 가소타가 가져온 간식은 아주 맛있었고 고소한 향기도 났다. 게다가 이등 시위는 일단 먹기 시작하자 거침이 없었다. 어쨌든 당직을 서는 방이니 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모두들 가소타가 함께 먹자고 청했을 때 사양하지 않았다.
처음엔 기둥에 기대어 있다가 탁자에 기대고, 그러다 하나둘씩 탁자에 앉아서 해바가리 씨를 까먹으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금언은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이가 없었다. 가소타가 온 첫날에 당직을 서는 방은 아가씨의 규방으로 변해 버렸다. 몇 명의 남자들이 함께 모여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가소타가 간식을 건넸다.
“금언 형, 먹을래요?”
사금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안 먹어.”
“먹기 싫으면 말아요.”
흥 하고 고개를 돌린 가소타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도 사금언은 황제의 처남이었다. 다들 그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금언, 듣자 하니 도찰원 어사 채 대인의 천금과 정혼을 했다죠?”
“응.”
“오, 그 분은 임안성에서 소문난 미인이신데 복이 터졌군요!”
사금언은 웃으며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자부심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우리 금언이가 이렇게 훌륭한데, 시집을 오는 아가씨가 복이 터진 거지!”
사금언이 우쭐대고 있는데, 가소타가 한마디 했다.
“금언 형이 그렇게 훌륭하다고요? 전 왜 몰랐죠? 총명함으로 따지면 내 오라버니보다 못하고, 무공으로 따지면 영안 오라버니보다 못한데.”
사금언은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
“가소타, 겨뤄 볼까? 정말 누가 더 잘 싸우는지?”
가소타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어린 아가씨에게 힘자랑하면 재미있나요? 이겨서 뭘 하려고요? 입으로만 요란하게 떠들지 말고, 정말 할 마음이 있으면 영안 오라버니랑 겨뤄 보지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