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1화
사봉봉은 그의 설명을 듣고 있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고, 묵용린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너무 가까이에서 보느라 눈이 사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봉봉의 반응이 더 빨랐다. 그녀는 얼른 뒤로 기댄 채 투덜거렸다.
“황상, 말씀을 하시려면 말씀만 하시지요. 신첩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너무 놀랐습니다.”
묵용린은 원래 뻔뻔한 짓을 하려고 했지만, 사봉봉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 얼마 전의 교훈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어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조금씩 세우며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게 다 청양 그 웬수 때문이다. 어젯밤에 뜬금없이 그에게 오더니 사봉봉이랑 입맞춤을 해 봤냐고, 느낌이 어땠냐고 은근히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자기는 영안과 해 봤다고 하는데 정말 시끄러웠다.
결국 그는 하룻밤 내내 그 일에 대해 생각했고, 방금 경솔한 짓을 저지를 뻔했다.
‘웬수! 이놈의 웬수!’
사봉봉은 아무리 훑어봐도 마음을 정할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신첩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양친의 뜻도 물어봐야 하고, 금언의 뜻도 알아봐야 합니다.”
묵용린이 말했다.
“그래도 좋소.”
그는 사희에게 초상화들을 사부로 보내라고 명했다.
사봉봉은 웃으며 말했다.
“황상, 그리 급한 일도 아닌데 이렇게 불쑥 초상화를 보내시면 신첩의 양친께서는 깜짝 놀라실 겁니다.”
묵용린도 웃으며 대답했다.
“사 장군과 사 주인장에게 짐이 금언을 아낀다는 걸 알려 주고 싶소. 참! 사 장군이 임안으로 돌아온 김에 다시 서북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 임안성에 남으라고 전하시오. 사 장군은 공로가 있는 신하로서,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유유자적하는 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소? 황후의 뜻은 어떠하오?”
사장풍은 원래 사봉봉의 혼사 때문에 묵용린이 서북으로 쫓아낸 셈이었다. 그런데 이제 임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니 사봉봉은 당연히 기뻤다. 사 장군이 사 주인장을 살핀다면 그녀도 궁에서 안심할 수 있었다. 사봉봉은 얼른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묵용린은 그녀를 직접 일으켜 세우며 잡은 그녀의 팔뚝을 미련이 가득한 손길로 두 번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황후, 짐은…….”
사봉봉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황상, 금언의 일만 살피지 마시고, 성 전하의 일도 마음을 쓰셔야 합니다.”
묵용린이 대꾸했다.
“짐도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숙비의 일은 알려지면 좋지 않소. 합당한 명분을 찾아야 하는데…….”
사봉봉이 말했다.
“황상, 그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태상황께서 하셨던 대로 본받으면 됩니다.”
그 해 묵용감은 궁비들을 출궁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했었다. 시집갈 사람은 시집보내고 벼슬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벼슬을 줬으며, 죽음을 위장해 자유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결국 궁궐에는 한가로이 부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묵용린은 사봉봉이 암시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에 그녀를 자세히 살펴봤지만, 그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백했다. 정말 순수하게 그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려는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는 듯했다.
그는 조금 실망했다. 그는 사봉봉을 좋아하고 그녀의 전부를 갖고 싶었다. 그녀의 몸을 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건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는 항상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잘 대해 주려는 걸 그녀도 모두 알고 있을 텐데, 왜 그녀는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걸까?
* * *
황제가 보낸 초상화들을 받았을 때, 사앵앵은 확실히 깜짝 놀랐다. 그녀는 사장풍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린 황제가 뭐 하는 짓일까요?”
“아마도 그동안의 잘못을 보상하고 싶은 것 같소.”
사장풍이 말했다.
“예전의 일들은 이미 지나가지 않았소? 듣자 하니 황상과 봉봉이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하오. 우리 딸이 보배라 누구나 안 좋아할 수가 없지 않소. 내가 서북에서 돌아올 때도 황상께서는 영가군을 보내 은밀히 나를 호위하게 했소. 그렇게 한 건 분명 봉봉이를 위함일 거라고 생각했소.”
사앵앵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그 말은 황제가 봉봉이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세요?”
“내가 저번에 궁에 들어갔을 때 황상께선 내게 예의를 깍듯하게 지켰소. 예전과 많이 달랐지. 만약 그게 봉봉이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소.”
사앵앵은 한탄을 쏟아 냈다.
“그렇다고 해도 후궁에 첩이 여럿 있잖아요. 봉봉에 비하면 그는 한참 모자라요.”
사장풍이 그녀를 달랬다.
“황제는 일반 백성들과 달리 황실 자손의 번성을 위해 아이를 많이 얻어야 하니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소. 봉봉도 한 나라의 국모로서 어깨가 가볍지 않소. 얻은 것이 많으면 잃어야 하는 것도 있는 것이오. 봉봉은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을 거요.”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금언이 뛰어 들어와 호들갑을 떨었다.
“황상께서 초상화를 보내왔다는데, 어디 있어요?”
사앵앵은 그 한심한 모습을 보자 손이 근질거려서 그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네가 황상께 부탁한 거냐?”
“설마요! 황상께서 먼저 제 혼사를 맡겨 달라고 하셨어요. 저에게 예쁜 부인을 찾아 주겠다고요.”
“예쁜 부인이 밥 먹여 주니?”
“당연하죠!”
“넌 너무 수다스러워.”
사앵앵이 손을 뻗어 또 때리려고 하는데, 사금언이 그녀를 피하며 초상화를 들고 자세히 살펴봤다.
사앵앵은 아들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예쁜 부인은 무슨. 소타가 얼마나 좋으니? 그렇게 좋은 아가씨가 어디 있어? 마음씨 선량하고, 사람을 진솔하게 대하며, 집안 내력도 잘 알잖아…….”
사금언은 한마디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가소타는 예쁘게 생기지 않았잖아요!”
“어디가 안 예뻐? 동그란 얼굴이 얼마나 복스러운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잖니?”
“그렇게 좋으시면 어머니께서 장가가세요. 전 싫어요!”
“이 나쁜 놈!”
사앵앵이 또 때리려고 달려들었지만, 사장풍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되었소. 자손들은 다 자기 복을 타고난다고 하지 않소.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둡시다.”
사금언은 한참 고르다가 도찰원 어사 채 대인의 천금이 그려진 초상화를 골랐다.
“전 이 사람을 아내로 맞이할래요.”
* * *
가소타는 조금 마음이 답답했다. 청양 언니와 영안 오라버니가 혼인하고 사금언도 혼사를 정하니 갑자기 낙오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만 벗들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렸고 친오라버니도 아직 정혼을 하지 않았으니, 그녀의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참 멀었다.
사실 그녀도 정혼을 해서 알지도 못하는 남자아이와 놀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냥 청양 언니와, 그리고 사금언과 예전처럼 어울려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재미있게 놀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길 원했다.
그녀가 더욱더 답답한 것은, 벗들은 모두 혼인할 뿐만 아니라 각자 일도 가지고 있었다. 사금언은 이등 시위였고, 청양 언니는 환경문에서 일했다. 오직 그녀만 온종일 빈둥빈둥 놀고 있으니 벗들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래선 안 돼!’
그녀도 이제 컸으니, 자신의 일이 있어야 한다. 그녀는 얼른 가동의 침소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아버지!”
낮잠을 자던 가 대인은 비록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늙지 않았다. 막 녹하를 누르고 일을 벌이려던 찰나, 갑자기 딸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 아내 위로 털썩 엎어지고 말았다. 녹하는 그를 흘겨보며 힘껏 밀쳤다.
“어휴, 이 화상!”
그리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꾼 녹하는 가소타를 꾸짖었다.
“왜 소란을 피우느냐? 네 아버지께서는 아직 주무신다.”
가소타가 말대꾸했다.
“해가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는데도 자고 계세요? 아버지, 설마 저에게 남동생을 만들어 주려는 거 아니에요?”
이 말을 듣자 가동은 참지 못하고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녹하에게 힘껏 꼬집혔다.
“지금 웃음이 나와? 이게 다 당신이 버릇을 잘못 들여서 그래! 부모한테 저렇게 말하는 딸이 어디 있어?”
가동이 책임을 떠넘겼다.
“그게 왜 내 탓이야? 저건 다 청양한테 배운 건데.”
녹하가 그를 노려봤다.
“청양도 어릴 때부터 당신이 가르친 거잖아!”
가소타가 또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제가 정말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들어가도 돼요?”
가동은 허둥지둥 옷을 입으며 말했다.
“잠깐! 들, 들어오지 마라. 아버지는, 지금 옷을 입는 중이다!”
가소타가 투덜거렸다.
“정말! 왜 이렇게 꾸물거려요.”
가동은 옷을 다 입고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었다.
“소타야, 아버지는 무슨 일로 찾느냐?”
“시위가 되고 싶어요.”
가동은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아직도 단념을 못 하는 것이냐? 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느냐, 아가씨는 남을 때리거나 죽이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환경문도 때리고 죽이는 일인데 청양 언니는 왜 할 수 있어요?”
“환경문의 부문주가 영안이기 때문이란다. 그가 동의했기에 청양이 환경문에 들어갈 수 있었단다.”
“아버지도 궁중의 시위대를 맡고 있잖아요. 아버지만 동의하면 저도 갈 수 있지요, 뭐.”
“하지만 아버지는 일인자가 아니란다. 윗사람이 있단다.”
가동은 손가락으로 공중을 가리켰다.
“그 사람이 동의해야 가능하단다.”
가소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녀가 떠나자, 녹하가 물었다.
“뭘 알겠다는 거지?”
가동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누굴 찾아가야 하는지 알겠다는 거지.”
녹하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영 대인을 골탕 먹여도 괜찮겠어?”
“괜찮지.”
가동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영구가 우리 소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리고 자식이라고는 말도 안 하고 냉랭한 영안밖에 없잖아. 늘 우리 집처럼 소란스러운 생활이 부럽다고 했었어…….”
“난 영 대인이 그렇게 말하는 거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녹하는 그를 흘겨봤다.
“게다가 소란스러운 것도 부녀만 그런 거지, 나랑 난청이는 아주 정상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