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9화
기홍은 특히 경악하며 아들을 바라봤다.
“정말 잘 생각해 보았느냐? 장공주 전하를 맞이하겠다고?”
영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습니다.”
영구와 기홍은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부모였기에 영안이 원치 않으면 황제의 앞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고 이 혼사를 반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안이 혼인을 원하자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은 마주친 서로의 눈빛 속에서 깊은 염려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소식은 곧 소상히 알려졌고, 가가와 사가도 다 알게 되었다.
사앵앵과 녹하가 함께 축하 인사를 하러 영가를 방문했는데,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걱정이 가득한 기홍을 발견했다.
녹하는 농담 삼아 말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무려 장공주를 며느리로 들이는데 왜 이렇게 울상이야?”
기홍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걱정이 안 되겠어? 청양은 우리가 자라는 모습까지 다 보았잖아. 아끼는 마음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지만, 며느리로 삼자니 솔직히 자신이 없어. 신분의 격차는 결코 넘어설 수 없을 텐데. 우리 영안은 또 고집불통이라서 나중에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사소한 잘못도 죄를 짓는 꼴이 될 거라고.”
녹하가 그녀를 달랬다.
“무슨 그런 걱정을 해? 청양과 영안은 어릴 때부터 같이 싸우면서 컸잖아. 예전에도 싸웠는데 혼인을 한다고 안 싸우겠어? 게다가 황상께서 부부싸움까지 관여하시겠니? 걱정하지 마, 황상은 태상황이 아니니까. 황상께서는 사리에 밝고 영안도 도리를 아는 아이이니, 소란이 벌어진다 해도 다 청양의 수작일 거야. 황상께서 무조건 청양만 편애하시는 분도 아니고, 영안을 처벌하시는 일은 없을 거야.”
사앵앵은 옆에서 유유자적 차를 마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혼사 덕분에 저도 한시름 놓았어요. 아시겠지만 우리 금언이 어릴 적부터 장공주와 혼인하기를 원했잖아요. 이제는 완전히 단념할 수 있을 거예요. 저랑 싸울 일도 없을 거고요.”
녹하는 또 농담을 던졌다.
“너무 하시네요. 기홍은 걱정되어 죽겠는데 그리 고소해하면 어떻게 해요?”
“제가 고소해한다고요?”
사앵앵은 자신을 가리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봉봉이가 궁에 들어가서 황후가 된 거 다들 잊으셨어요? 설마 소타가 궁중에 들어가 황후가 되는 걸 정말 원하세요?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한 남자를 놓고 경쟁하는 걸? 그런 사람은 집안에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죠. 만약 금언이도 장공주를 맞이해야 한다면 그건 저보고 살지 말라는 말이에요.”
녹하는 히죽 웃었다.
“봉봉은 총명하고 능력이 있어서 충분히 황상을 쟁취할 수 있을 거예요.”
기홍은 이제야 사앵앵의 고초를 느낄 수 있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황후이시지만, 마음이 어렵겠어요.”
* * *
영안이 부마가 될 거라는 소식에 가장 언짢아한 사람은 바로 사금언이었다. 그는 홀로 연무장에서 화풀이하듯 나무 말뚝을 내리쳤다. 서늘한 가을바람에도 그의 이마에 땀이 가득 맺혔다.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친 가소타는 한쪽 계단에 앉아서 아쉽다는 듯 말했다.
“청양 언니도 혼인할 줄은 몰랐네요. 언니처럼 특별한 여인은 평생 혼인할 필요가 없는 줄 알았어요. 청양 언니와 짝을 이룰 만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죠.”
그녀의 말에 사금언이 거칠게 화를 내며 물었다.
“그럼 영안은?”
가소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영안 오라버니는 겨우 빠지지 않는 수준이죠. 청양 언니가 좋아한다고 하시잖아요.”
사금언은 소리를 지르며 말뚝을 강하게 한 대 더 내리쳤다. 그의 손바닥은 온통 빨개졌다.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다. 청양은 어째서 영안을 좋아하는 것일까? 그 얼음같이 차가운 놈을! 마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와 말해도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가소타는 사금언이 미쳐 날뛰는 걸 보고 놀라서 일어섰다.
“금언 형, 말뚝 부러지겠어요!”
사금언은 가소타를 힐끔 흘겨보더니, 손을 두어 번 흔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정말 눈치도 없구나. 어째서 내 손이 망가질 걸 걱정하지는 않지?’
가소타는 그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금언 형,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요?”
사금언은 참다 못해 눈이 뒤집혔다. 그녀가 이렇게 눈치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그는 더 이상 이 눈치 없는 가소타와 함께 있기가 싫어서 발길을 돌렸고, 가소타가 그를 쫓아왔다.
“금언 형…….”
“금언 형이라고 부르지 마.”
사금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너랑 그렇게 친한 사이니?”
“그럼요, 친한 사이죠.”
가소타가 말했다.
“우리 둘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잖아요. 청양 언니와 영안 오라버니처럼.”
사금언은 화가 나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와 가소타는 절대로 영안과 묵용청양이 아니었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고, 가소타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그를 쫓아갔다.
“금언 형, 기다려 줘요.”
사금언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넌 황상과 영안, 그리고 난청도 오라버니라고 부르면서 왜 나한테만 형이라 부르는데?”
“저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잖아요. 그리고 청양 언니도 영안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아요.”
“너랑 별 차이 안 난다고?”
사금언은 피식 웃었다.
“내가 가난청보다 나이 많거든!”
“난청 오라버니는 제 친오라버니잖아요. 그건 다르죠.”
가소타가 잠시 멈칫하더니 비위를 맞추듯 부드럽게 말했다.
“금언 형이라고 부르니, 더 친한 것 같지 않아요?”
사금언이 더욱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저리 가! 누가 너랑 더 친하고 싶대?”
가소타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청양 언니와 친해지고 싶고 부마가 되고 싶어 하는 것도 알지만, 청양 언니는 금언 형을 싫어하고 영안 오라버니만 좋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씩씩거리며 달아나 버렸다.
사금언은 쫓아가서 혼쭐을 내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만 할 뿐,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비겁한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는 갈림길에 서서 묵용청양을 찾아갈까 망설이다가 궁문 너머로 영안이 나타나자 얼른 다가가 엄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영 부문주.”
영안은 의아했다. 왜 사금언이 이렇게 진중하게 자신을 부르지?
“금언? 무슨 일이지?”
“영 부문주와 한번 겨뤄 보고 싶습니다.”
“지금?”
“네, 지금.”
“지금은 안 된다. 난 승덕전에 가야 해.”
사금언은 그가 묵용청양을 보러 궁에 들어온 줄 알았는데 승덕전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시간을 많이 끌진 않을 겁니다. 잠시면 됩니다. 누구든지 땅에 넘어지면 지는 거 어떻습니까?”
영안이 물었다.
“이기면?”
“이기면 부마가 되는 겁니다.”
“만약 지면?”
“지면 부마가 될 자격이 없는 겁니다.”
영안은 그제야 사금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사금언이 부마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계속 사금언을 어린애 취급했기에 그저 애가 하는 말이겠거니 여기며 한 번도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아이는 진심이었고, 그에게서 부마 자리를 빼앗으러 온 것이었다.
“좋아.”
영안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여기 말고 연무장으로 가자.”
두 사람은 함께 연무장으로 갔고, 사금언이 먼저 공격 자세를 잡았다. 영안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쏜살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사금언은 눈앞이 순간 어른거리더니 손목에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영안이 손을 탁탁 털었다.
“됐지? 승부는 끝났다. 난 간다.”
이렇게 한 마디만 남기고 영안은 정말 가 버렸다.
사금언은 이를 악물고 벌떡 일어나 영안에게 달려들었다.
영안은 등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옆으로 피하다가 한 걸음을 비스듬히 내디디며 그를 잡아당겼다.
또 손목에 통증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사금언은 또다시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영안은 고압적인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사금언, 황상의 처남이라고 날뛰지 말고 적당한 수준에서 멈춰.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지금처럼 넘어뜨릴 것이다.”
사금언은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는 영안을 이길 수 없었다. 사오 년 더 수련한다 해도 영안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무공이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지런함 외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영안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영안이 멀리 가 버리자, 사금언은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떨군 채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묵용청양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경쾌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짐작하건대, 그녀는 분명 영안을 찾아 궁을 나가는 길일 것이다.
미처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묵용청양이 먼저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 물었다.
“뭐야? 누가 때렸어?”
사금언의 표정은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이 복잡했다.
묵용청양은 그가 괴롭힘을 당한 줄 알고 표정이 굳어졌다.
“말해! 누구야? 나한테 말하면 내가 대신 화풀이 해 줄게.”
사금언은 마음이 동해서 물었다.
“정말 화풀이를 해 주실 겁니까?”
“물론이지.”
묵용청양이 그를 두둔하며 말했다.
“넌 내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널 괴롭히는 사람을 가만히 둘 수 있겠어?”
“영안이 때렸습니다.”
사금언이 그녀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방금 연무장에서 싸웠습니다.”
“왜 싸웠어?”
사금언은 진실을 말하기가 쑥스러워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무공을 겨뤘습니다.”
“아, 그런 거였어?”
묵용청양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우리 영안의 적수가 되겠어? 그와 겨루는 건 사서 고생하는 거야.”
사금언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다 못해 뿜어낼 뻔했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영안이라니! 충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더는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묵용청양도 그와 잡담할 겨를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난 먼저 갈게.”
몇 걸음 멀어진 그녀를 사금언이 다시 불렀다.
“영안을 찾으러 가는 길이십니까?”
“응.”
묵용청양이 대답했다.
“나도 그와 무공을 겨루려고.”
사금언은 망설이다가 한 마디 했다.
“영안은 승덕전으로 갔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다시 걸어온 묵용청양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워. 헛걸음할 뻔했네.”
묵용청양이 승덕전으로 향하자, 사금언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봉명궁으로 향했다. 황상의 처남이라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고, 봉명궁의 아랫사람들은 그를 보고 너도나도 인사를 건넸다. 사금언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내전으로 들어갔다.
“누님, 나도 혼인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