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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77)화 (1,177/1,192)

제1177화

그제야 다들 다급해졌고, 얼른 그들을 안으로 맞이하여 그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영안은 이런 예우를 받는 게 처음이라 좀 어색했다.

“황상, 마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신이 삼킨 독약은 보름이 지나야 효력을 발휘한다고 하니, 지금은 괜찮을 겁니다.”

묵용린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에게는 남원 황실에서 보낸 해독 영약이 있었다. 지난번에 가소타가 중독되었을 때 가동이 하나 가져갔으니, 또 한 병이 남아 있었다. 그는 빨리 사희를 불러 그 영약을 찾아오게 했다.

말하는 사이에 노낙원이 도착해서 영안의 맥을 짚었다.

“영 부문주, 어딘가 운기할 때 통하지 않는 곳이 있으십니까?”

영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곳은 없소.”

“좀 이상합니다.”

노낙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정말 독약을 드신 게 맞습니까?”

“먹었어요.”

묵용청양이 끼어들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한입에 삼키는 걸 똑똑히 보았어요.”

“무슨 독약을 먹었는지, 영 부문주께서는 기억하십니까?”

“새까맣고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환약으로, 삼킬 때 청량한 맛이 느껴졌소.”

노낙원이 한참 홀로 중얼거리다가 황제에게 읍하며 입을 열었다.

“황상께 아룁니다. 소신이 보기에, 영 부문주께서는 맥이 침착하고 안정된 상태로, 들뜨거나 무겁게 가라앉지도 않았으며 느려지거나 빨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가늘어지거나 굵어진 것도 아니지요. 아주 정상적인 맥상을 보이고 있으니, 영 부문주께서는 독에 당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묵용청양이 목소리를 높였다.

“노 의정, 다시 잘 살펴보세요. 그는 분명 독약을 먹었어요.”

“전하, 소신이 영 부문주의 맥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중독된 흔적이 없사옵니다. 게다가 영 부문주께서도 운기를 하실 때 막힘이 없으셨다고 하시니, 중독된 사람의 증상이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이상한데.”

묵용청양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안월이 분명 독약을 먹였잖아? 매달 보름에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릴 거라고 했는데, 그럼 그게 다 거짓말이었단 말이야?”

그녀는 턱을 매만지며 몸을 돌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영안을 바라봤다.

“영 부문주, 안월 아가씨가 당신을 정말 좋아했나 봐.”

영안은 순간 사레가 들렸다.

“콜록, 콜록…….”

묵용린이 물었다.

“좋아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묻지 마세요.”

순간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린 묵용청양이 투덜거렸다.

“아주 가련한 한 쌍의 연인이 따로 없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영안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전하, 저는 아닙니다.”

“네가 그렇든 아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묵용청양은 말할수록 안색이 나빠지더니, 홱 돌아서서 가 버렸다.

영안은 벌떡 일어나 황급히 황제와 황후께 예를 갖추곤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묵용린은 어리둥절했다.

“저들이 왜 저러는 거요?”

사봉봉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묵용성은 한눈에 알아챘다.

“황형, 황저를 위해 부마를 세워야겠습니다.”

묵용린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영안을 부마로 삼는다면 짐도 마음을 놓을 수 있지.”

묵용성은 은근슬쩍 자신의 일을 언급했다.

“황형, 그럼 신제의 혼사는…….”

“네 혼사는 급하지 않다.”

묵용린이 말했다.

“장유유서, 먼저 네 황저의 일을 처리하고 나중에 다시 논의하는 게 좋겠구나.”

묵용성은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황형, 중추절이 지나면 숙비 마마를 출궁시키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계속 궁에 머물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숙비는 이미 출궁했다.”

묵용린은 말을 하면서도 사봉봉을 슬쩍 보더니 목을 가다듬는 척, 주의를 집중시켰다.

“후궁에 여자가 많으면 퍽 성가시니, 다 내보냈으면 좋겠군.”

그러나 사봉봉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묵용청양이 궁으로 돌아와 걱정을 덜었기에, 그녀는 황제에게 예를 취한 후 금천아를 데리고 봉명궁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호의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자 묵용린은 조금 멋쩍었다.

돌아오는 도중에 금천아가 말했다.

“마마, 방금 황상께서 하신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말씀?”

“황상께서 후궁에 여자들이 많아지면 귀찮으니까, 다 내보낸다고 하셨잖습니까.”

사봉봉은 피식 웃었다.

“황상은 강산을 중시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태상황과 달라.”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금천아가 말했다.

“만약 황상께서 마마를 위해 후궁을 비우신다면 마마께서는 어떻게 하실 건지요?”

사봉봉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느냐? 그냥 살던 대로 살아가는 거지.”

금천아가 다시 물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 * *

영안은 요대궁까지 쫓아갔고, 묵용청양은 씩씩거리며 문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 처소에 들어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내 평판은 뭐가 되겠어?”

옆에 서 있던 아랫사람들이 몰래 듣고 있자 묵용청양이 눈을 부라렸다.

“너희들과 상관없는 일이니 모두 물러가거라! 감히 엿듣는다면 본 전하가 곤장을 내릴 것이다!”

묵용청양은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 아랫사람들은 다들 벌떼같이 달아나 그들에게 이야기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전하, 소신은 바로 전하의 평판을 위해 온 겁니다.”

영안이 별안간 예를 갖추며 말을 이었다.

“소신은 전하를 껴안았고, 또 전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하여 소신은 전하를 책임져야 합니다.”

묵용청양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맞잡고 배배 꼬면서 물었다.

“갑자기 왜 이래? 무슨 뜻인데?”

“황상께 장공주 전하를 달라고 청하겠습니다.”

입술을 삐죽거린 묵용청양은 괜히 하늘을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내가 꼭 승낙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왜 승낙하지 않으십니까? 전하, 설마 저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안월을 질투한 건데?”

“허튼소리, 누가 질투를 했다고 그래?”

“그러면 왜 나한테 입을 맞추라고 했는데?”

“그건 네가 불쌍해서, 네가 한을 품고 죽을까 봐 그런 거지.”

“나랑 입맞춤까지 했는데 설마 다른 사람과 혼인할 생각이야?”

“그건 생각 좀 해 봐야겠어.”

“뭘 더 생각하겠다는 거야! 너, 내가 화병 나서 죽는 꼴을 봐야겠어?”

영안이 불쾌함을 표시할수록 묵용청양은 도리어 기분이 좋아졌다. 사방을 살펴보니 마침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영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입을 한번 맞춰 보지 뭐.”

* * *

중추절이 막 지난 뒤, 임안성에 사는 백성들은 굉장한 소식을 들었다. 그건 바로 황금 절도 사건은 좌상 허장우가 강호인과 야합하여 벌인 짓이라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경악스러운 소식에, 밥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나 저잣거리의 골목마다 모두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좌상 대인은 조정 최고의 권력자에 가산도 막강하다고 하는데, 뭐 하러 황금 몇 상자를 탐한 겐가?”

“그건 모르는 소리네. 부자일수록 욕심이 많지.”

“누가 그러는가? 사 주인장은 동월 제일의 부자이지만, 헛된 욕심을 부리지는 않잖는가. 하늘과 땅도 무심하지 않으셨지. 드디어 사가 상호의 누명이 벗겨졌잖나.”

“허가 사람 중엔 궁중에 있는 귀비 마마도 계시잖나…….”

“듣자니 귀비 마마께선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나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는군.”

“그러니까 사람이 땅에서 하는 걸 하늘은 다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 않나? 좌상 대인이 제아무리 황상의 인척이어 봤자, 죄를 지으면 도망갈 수 없는 법이지.”

“내가 듣기론 죽은 사람은 허 귀비가 아니라 귀인이라던데?”

“일이 이 지경이 된 걸 좀 보게. 사람이 죽지 않으면 결말이 나지 않겠지.”

“누가 아니래? 이제 두고 보게나! 허가 일가는 임안성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야.”

“…….”

백성들이 떠드는 이런 말들은 대부분 근거 없는 소문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허허실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었다. 허 귀비가 죽은 건 사실이지만, 화가 나서 죽은 건 아니었다. 자신의 아비가 죄를 인정하자, 그녀는 자신의 궁전에서 목을 맸다. 형벌이 두려워 자결한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묵용린은 몇 번이고 한탄을 쏟아 냈다. 사람은 지내보아야 안다더니, 반년의 세월 동안 그는 인간의 비열함을 더욱더 처절하게 경험했다. 일찍이 마음을 주었던 황후 후보는 마음이 사갈처럼 악독한 미인이었고, 신뢰했던 조정 대신은 악랄하고 탐욕스러운 간신이었다. 군주로서 그는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은 정말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허 귀비가 목을 매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유 귀인은 활기를 되찾았다. 뜻밖에도 그녀가 똑바로 앉아서 닭국을 반 사발이나 마셨기에 아랫사람들은 매우 기뻐서 흐느껴 울었고, 얼른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황후에게 알렸다.

사봉봉도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서, 얼른 금천아에게 노낙원을 청하라고 분부한 뒤 자신도 얼른 유 귀인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어가 보니 과연 유 귀인은 기력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사봉봉이 온 것을 보고 침상에서 내려와 예를 취하기까지 했다.

사봉봉은 놀라서 바삐 다가가 유 귀인을 부축했다.

“이제 조금 좋아진 것이니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어서 침상으로 돌아가서 누워요.”

하지만 유 귀인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유 귀인은 그녀를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마마, 신첩은 정말 기쁩니다. 선을 행하면 보답이 있고, 악을 행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죠. 옛말에 벌을 받지 않은 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첩은 그때를 기다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하늘은 무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러던 중 도착한 노 의정이 다가와 맥을 짚어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산삼탕을 계속 먹으면 된다는 말만 하고 물러났다.

사봉봉은 아랫사람들에게 유 귀인을 침상에 눕히라고 명한 뒤, 바깥채로 나가 노낙원에게 물었다.

“의정, 귀인의 건강이 좀 나아진 거죠?”

노낙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 귀인은 이미 다 썩은 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저렇게 기운을 차린 건 돌아가시기 전에 나타나는 회광반조일 뿐입니다. 마마, 사후의 일을 준비하시지요.”

사봉봉은 가슴이 아팠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시 방에 들어가니 유 귀인이 침상에 누워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건 고작 그 몇 마디였다.

“벌을 받지 않은 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어. 역시 하늘은 무심하지 않으셨어…….”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유 귀인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의 호흡이 끊겼다. 아랫사람들은 순간 목 놓아 울부짖으며 전부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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