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5화
영안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도 돌려 보지 않았다. 묵용청양의 목소리는 금방 들리지 않게 되었으니 입을 틀어막은 게 분명했다.
“독약이지만 당장 죽지는 않아요.”
안월이 말을 이었다.
“매달 보름에 해독약만 잘 챙겨 먹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영안이 물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만약 해독약을 제때에 먹지 않으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묵용청양은 눈물이 날 정도로 초조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입도 막혀서 괴롭게 오열하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영안이 다시 물었다.
“널 도와 무엇을 해야 해독약을 받을 수 있지?”
“공자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내 곁에만 있으면 매달 보름에 공자를 위한 해독약을 줄 거예요.”
“…….”
영안은 방금 저쪽에서 묵용청양이 퍼부은 욕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 웬수는 워낙 뇌가 기이하게 돌아가기에 그는 항상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안월이 하는 말은…….
조급했던 마음에 소란을 피우던 묵용청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녀는 왠지 감동적이었다. 안월이 이렇게까지 영안을 좋아했다니. 너무 좋아서 독약을 써서라도 그를 통제하고 싶었구나. 그런데 이건 너무 고통스러운 사랑 아닌가?
영안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궁금해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안의 고뇌를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은 군관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도둑이니, 옛말에도 뜻이 다르면 함께 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그들 사이에 애정까지 얽혀 있으니 선택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한참 만에 영안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안월은 그를 태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공자가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길 원해요.”
“좋아.”
영안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장공주 전하만 보내 주면 당신을 따라가지.”
그의 말을 듣자 묵용청양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심하게 쥐어뜯긴 듯 괴로웠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시원스레 대답하자 안월은 오히려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진심으로 저와 함께 가길 원하는 건가요?”
“물론 아니지. 하지만 난 이미 네가 준 독약을 먹었고, 함께 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았나?”
묵용청양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닥쳤던 고통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영안이 그녀와 가겠다고 대답했건만 안월은 그를 믿지 않았다. 거기에 함께 가는 게 달갑지 않다고까지 말하니 안월은 또 기분이 상해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영 공자,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을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
밤의 장막이 천천히 드리워져 하늘과 땅을 모두 가리자, 갑자기 고개를 돌린 영안은 임안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이번 유인은 나쁘지 않았어. 나를 성밖으로 끌어내고, 네 형제들에게 시내에 가서 황금을 털라고 했지?”
안월은 잠시 굳어진 채 그를 쳐다보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역시 공자를 속이진 못했군요.”
“황금을 가져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희들 솜씨에 달렸겠지. 하지만 지금은 장공주 전하부터 풀어 줘.”
안월은 묵용청양을 지키고 있던 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자가 막 묵용청양의 혈도를 풀려고 하는 찰나, 영안이 말했다.
“멈춰.”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 냉랭한 얼굴로 그자에게 말했다.
“금지옥엽이신 장공주 전하다. 감히 아무나 손댈 수 없다.”
말을 마친 영안은 그자를 뒤로 밀쳤다. 그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쓰려는데, 안월이 제지했다.
“됐어. 뒤로 물러서. 영 공자가 하게 내버려 둬.”
영안은 숙연한 표정으로 묵용청양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혈도를 풀기 전에 할 말이 있으니까 잘 들어. 함부로 말하지 말고 욕도 하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산에서 내려가. 한 발짝도 지체하지 말고.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으면 눈을 깜빡여.”
묵용청양의 눈가엔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입 안에선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절대로 눈을 깜빡거리지 않았다.
“말 좀 들어.”
영안은 나직하게 말했다.
“황상과 황후 마마께서는 네가 어서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셔.”
묵용청양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어느새 눈물방울이 주르륵 떨어졌다. 입 안에 쑤셔 넣은 손수건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영안은 얼른 손수건을 빼내고, 그녀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날카롭고 우렁찬 울음소리가 묵용청양의 목구멍에서 쏟아져 나오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어깨를 꽉 잡은 영안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청양, 말 좀 들어.”
묵용청양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달빛도 어스름해서, 그녀는 그의 얼굴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안월과 떠나니 이제는 아득히 먼 곳으로 서로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도무지 슬픔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는 상심해서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따뜻하게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엄지로 눈물을 살짝 훔쳤다.
그는 다시 한 번 똑같은 말을 건넸다.
“청양, 말 좀 들어.”
저쪽에서는 안월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냉랭하게 말했다.
“대충하고 얼른 그녀를 보내세요. 제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도록.”
묵용청양은 소매를 들어 힘껏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눈으로 영안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잘 지내고 있어. 내가 가끔 보러 갈게.”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영안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중에 다시 만나자.”
묵용청양은 다시 안월에게 다가갔다.
“영안이 당신을 따라가는 동안, 잘 대해 주세요. 제때에 해독약도 잘 먹이고, 욕하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해요.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은 강요하지 마세요.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투는 방금 영안이 그녀에게 했던 것과 똑같았다.
안월은 한참 잠자코 있다가 피식 웃었다.
“어째서 영 공자의 어머니처럼 구는 거죠? 장공주 전하, 어서 갈 길이나 가시죠? 여긴 산길이라 날이 어두워지면 걷기 어려워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요.”
“나에 대해서는 당신이 신경 쓸 것 없어요.”
묵용청양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집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어요?”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안월은 집요하게 묻는 묵용청양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느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녀는 내려가는 산길을 가리켰다.
“어서 내려가요.”
묵용청양은 알겠다고 말했지만, 갑자기 번개처럼 잽싸게 손을 뻗으며 한걸음에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단번에 그녀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어서 해독약을 내놔!”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다들 정신을 못 차렸지만, 반응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비화루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구하려고 달려들었지만, 영안이 어찌 그들을 보고만 있겠는가?
잠시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가는 소리만 들렸다.
영안이 혼자서 대여섯 명을 상대하며 뒤엉켜서 싸우느라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쪽에서는 묵용청양이 안월의 목을 조르며 해독약을 내놓으라고 재촉했지만, 안월은 냉소를 지었다.
“이렇게 해서 저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묵용청양은 허리가 따끔하는가 싶더니, 두 팔이 힘없이 축 처져 버렸다.
영안이 그걸 보고 즉시 몸을 돌려, 난전에서 빠져나와 청양에게 달려왔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괜찮아?”
그저 잠시간 마비가 온 것이라 묵용청양은 몸에 큰 이상은 없다고 느꼈다.
“괜찮아, 우리 여기서 벗어나자.”
영안은 그러자고 대답하며 허리에 감고 있던 긴 채찍을 그녀에게 건넸다.
묵용청양은 채찍을 받으며 씩 웃었다.
“내 무기도 가져왔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채찍술을 익혀 왔기에, 채찍 하나만큼은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영안은 모든 것에서 그녀보다 뛰어났지만 유독 채찍술에서는 그녀를 뛰어넘지 못했다. 묵용청양이 강남으로 간 뒤에도 영안은 그 사실에 승복하지 못하고 줄곧 채찍술을 열심히 연마했다. 덕분에 그는 항상 채찍을 가지고 다녔고, 때마침 청양의 무기가 되었다.
그들은 장검 한 자루와 채찍 한 가닥으로 합심하여 적을 상대했다.
쌍방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팽팽하게 싸웠다.
묵용청양은 이렇게 영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투지가 끓어올랐고, 부드러운 채찍은 그에 화답하듯 그녀의 손짓에 무시무시한 춤을 추었다.
영안은 묵용청양의 안위를 생각해서 굳이 싸움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싸우면서 산길 아래로 도망쳤다.
안월이 쫓아와서 큰 소리로 물었다.
“영 공자, 정말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영안은 냉소를 지었다.
“난 죽는 것보다 협박받는 게 더 싫다!”
안월이 다시 홍색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바깥으로 드러난 두 눈에선 시리도록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영안은 소리쳤다.
“조심해!”
영안은 두 손을 치켜들었다. 곧바로 달빛 아래 한기가 서린 암기들이 하늘을 뒤덮은 은빛 말벌처럼 쏟아져 내렸다.
영안의 장검이 춤을 추며 촘촘한 검망을 형성했고, 그는 묵용청양에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 내가 뒤를 엄호할 테니.”
“가려면 같이 가!”
묵용청양의 채찍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호흡이 완벽했기에 뜻밖에도 그 암기들을 모두 막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싸우는 건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영안은 틈을 노려 묵용청양을 끌어당기곤 산 아래로 질주했다.
뒤에서는 암기들이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계속해서 날아왔기에, 영안은 몸을 날려 그녀를 감싸 안으며 회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힘을 너무 준 탓인지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굴러떨어졌다. 다급한 마음에 그는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내, 하늘로 던지듯 재빨리 쏘아 올렸다.
산비탈에서 뒤엉켜 굴러떨어지는 두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 만 길 낭떠러지가 있었다.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묵용청양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영안!”
“난 여기 있어.”
영안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거야.”
“너도 죽으면 안 돼.”
“그래, 우리는 죽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