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3화
안월은 냉소를 지었다.
“당신이 또다시 불을 낸다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 않을 거예요. 그냥 안에서 타 죽는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묵용청양은 해맑게 웃었다.
“내가 타 죽으면 뭘 가지고 원하는 것과 바꾸려고요?”
“그럼 안 바꾸면 되죠.”
“그렇게 해요, 그럼!”
묵용청양은 홰나무 아래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서 불이 붙기만 하면 사방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서도 다 볼 수 있겠네요. 어쩌면 성문 앞 보초병이 볼지도 모르고요…….”
안월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이전에는 묵용청양이 영안과 아이처럼 장난치는 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중요한 순간이 되자 이렇게 머리를 쓸 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불빛으로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려 하다니.
묵용청양이 한 허튼소리를 전부 믿지 않지만, 아무래도 염려스러운 마음에 안월은 그녀를 자기 방에서 함께 재우는 수밖에 없었다. 눈을 뗐다가는 이놈의 장공주가 또 무슨 간교한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 * *
묵용린은 영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빛을 반짝이며 몸을 곧추세웠다.
“소식이 있는가?”
영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묵용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다시 의자에 기대앉았다. 잠시 후, 그는 영구에게 물었다.
“영안은 뭘 하고 있는가?”
“난청과 함께 황금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황금만 찾으면 저희 수중에 비화루와 거래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묵용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한 서둘러야 하네. 그들의 손아귀에서 청양이 너무 고생할까 봐 걱정이 되는군.”
사봉봉이 말했다.
“만약 돈을 줘서라도 장공주 전하를 되찾을 수 있다면, 신첩이 어머니께 은자를 마련할 방도를 찾아보시라고 연락을 넣겠습니다.”
묵용린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황후의 마음은 짐이 고맙게 받겠으나 그럴 필요 없소. 청양이 저들의 손에 있기는 하지만 생명이 위태롭지는 않을 것이오. 곧 저들이 먼저 연락해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될 것이오.”
영구가 말했다.
“방금 소신이 들어올 때 허 귀비께서 월동문 앞에 꿇어앉아 계셨습니다. 그곳에 무릎을 꿇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았습니다.”
묵용린은 차가운 눈빛을 흘겼고,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의 아비가 구족을 멸할 대죄를 지었는데도 감히 짐에게 목숨을 구걸할 염치가 남아 있단 말인가! 그렇게 꿇고 싶다면 밤새 꿇어앉아 있으라고 하게. 신경 쓸 필요 없네!”
물처럼 차가운 밤, 얼음 같은 석판에 무릎을 꿇은 지 이미 오래였다. 한기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아 허 귀비는 참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금령에게 물었다.
“본궁이 여기에서 무릎 꿇고 있다는 걸 황상께서 알고 계실 것 같더냐?”
금령은 그녀가 안타까워서 눈시울을 붉히며 대전 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영 대인께서 안으로 들어가실 때 마마를 보았으니, 그가 얘기했다면 황상께서도 알게 되셨을 겁니다.”
허 귀비는 한탄을 쏟아 냈다.
“영 대인은 황후와 더 가까운 사람이니 그가 꼭 언급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네가 다시 가서 사희 공공에게 말해 보거라.”
금령은 할 수 없이 담 모퉁이를 따라 돌아서 영십칠을 피한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희를 불렀다.
사희는 그녀를 발견하고 속으로 짜증이 치밀었지만, 인기척이 너무 크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챌까 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왜 또 왔는가? 황상께서는 만나 주지 않으실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나한테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네.”
금령은 흐느끼며 말했다.
“사희 공공, 좀 봐주십시오. 들어가셔서 한 번만 아뢰어 주십시오. 우리 마마께서 저쪽에서 꿇어앉아 계신 지 벌써 두 시진이나 지났습니다.”
“두 시진?”
사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두 시진이 아니라 이틀 밤을 꿇어앉아 있어도 황상께서는 만나지 않으실 거네. 좌상은 멸족을 당해야 할 대죄를 저질렀네. 게다가 지금 장공주 전하의 안위까지 연관되었지. 만약 장공주 전하께서 사고라도 당하신다면, 황상께서 진노하셔서 무슨 일을 벌이실지도 알 수 없네.”
그가 막 돌아서려는데, 금령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귀비 마마께 황상을 뵐 기회를 딱 한 번만 주십시오. 마마께서는 냉궁에 들어가는 것으로 부친의 죄를 대신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사희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냉궁은커녕 감옥에 대신 들어가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네. 자네는 귀비가 황후 마마라도 되는 줄 아는가?”
그는 금령을 밀쳤다.
“저리 비키게!”
금령은 달려들어 그의 발목을 필사적으로 껴안았다.
“사희 공공, 우리 마마께서 공공을 후대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으로 귀비 마마를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앞으로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아이고,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시게! 내가 그것 때문에 곤장까지 맞았네. 나를 아주 망치시려는가?”
사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솔직하게 다 알려 주겠네. 방금 영 대인께서 허 귀비가 월동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고 이미 말씀을 올렸네. 하지만 황상께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으시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네. 이 말을 허 귀비께 그대로 전하고 그만 단념하시라고 말씀 올리게. 그런 대죄를 지었으니, 천왕이나 노자도 목숨을 구할 수 없을 것이네.”
금령은 탄식을 내뱉었다. 심장이 순식간에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사희는 그 기회를 틈타 그녀를 뿌리치고 돌아갔다.
* * *
가난청은 역시 동월에서 제일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안에게 사람을 보내 청이각에 숨겨진 문을 찾도록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말로 청이각에서 밀실이 발견되었다. 그 밀실 안에는 잃어버렸던 황금 네 상자가 그대로 있었고 한 조각도 모자라지 않았다.
이제 보니 청이각 땅 밑에는 밀실과 밀도가 가득했는데 그 설계도 아주 정교해서 기문둔갑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가난청 역시 이를 파악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낮부터 밤까지 계속 그 일에 매달려야 했다. 원래 영안의 성질대로라면 의심스러운 벽은 모두 한두 대 때려 부숴 놓고 다시 살펴봐야 했지만, 가난청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암기나 함정을 대비해 그가 무분별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황금을 찾은 두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비화루 사람들이 당분간은 묵용청양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건 단지 예측일 뿐이었다. 이제 정말로 황금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으니 묵용청양의 목숨은 정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영구는 즉시 이 소식을 널리 퍼뜨렸다. 비화루가 자취를 감추긴 했지만 소식통이 넓게 퍼져 있으니, 분명 황금이 조정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
영안은 수하들을 시켜 밀도를 따라가게 했는데, 밀도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청이각에서 두 골목 떨어진 폐우물과 연결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멀리 떨어진 냇가로 이어져 있었다. 밀도에서 뛰쳐나가면 마치 물고기가 바다에 뛰어든 것처럼 시내로 숨어들어 다시 찾기가 아주 어려울 것 같았다.
소제갈과 판등의 보고를 들은 영안은 반나절이나 침묵에 잠겼다. 비화루는 도둑의 소굴이었다. 그런데 그는 환경문의 부문주로서 몇 번이나 그곳을 들락거렸는데도 전혀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마 처음부터 그가 안월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 해, 그는 거리에서 권세를 등에 업고 약자를 괴롭히는 부잣집 자제를 혼쭐내고 안월을 구했었다. 그녀를 안전하게 호송하느라 청이각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그는 그날 위층 별실에 앉아 안월의 고금 연주를 감상했다. 아래층 손님들은 고개를 흔들거리긴 했지만, 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고금 연주에 빠진 건지 전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청이각은 그가 상상했던 풍류를 즐기는 장소와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안월은 이해심도 많고 조용한 성격이라서, 가끔씩 와서 술을 한 잔 마시며 그녀가 연주하는 곡조를 듣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이각은 그렇게 그의 단골집이 되었다. 수하인 소제갈 등이 남몰래 그와 안월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떳떳하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청이각이 도둑의 소굴이고 안월이 비화루의 사람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쯤 안월이 어딘가에 숨어서 그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 * *
안월은 사실 그를 비웃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밖에는 밝은 태양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탁자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건지, 그녀의 눈 밑에는 검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침상 위에는 묵용청양이 대자로 뻗어서 곤히 자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 보니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안월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장공주인가?
묵용청양은 하룻밤 내내 발을 안월의 배에 걸치거나 얼굴 위에 얹어 놓았다. 그녀가 잠시도 쉬지 않고 뒤척이는 바람에 안월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날이 밝자마자 일어났다.
안월은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청이각에 숨겨 두었던 황금이 영안에게 발각되었다는 우울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실 이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영안이 청이각에서 황금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막으로 꼼꼼하게 가려진 침상을 한 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방에서 나갔다.
방 바깥에는 형제 몇 명이 근심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즉시 다가와 그녀를 에워쌌다.
“누주樓主, 우리가 황금을 다시 뺏어 올까요?”
“어떻게 뺏는단 말이냐?”
그녀는 갸름한 눈을 치켜떴다.
“영안이 너희를 사로잡으려고 함정을 단단히 판 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리 함정에 빠지고 싶으냐?”
한 형제가 방 안 쪽으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우리에겐 인질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를 황금과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안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먼 곳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늦가을이었기에 빨갛고 노란 잎사귀들이 짙푸른 초목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산야 전체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원래 그녀는 이틀만 더 기다려 황제가 조바심을 내게 할 작정이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더 유리했다. 그러나… 저놈의 장공주와 계속 한 침상에서 잠을 잔다면, 어느 날 밤 더는 참지 못하고 단칼에 묵용청양을 베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라. 영안과 묵용청양을 교환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