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2화
눈을 뜬 묵용청양은 단아한 자태로 앉아 고금을 타고 있는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방금 꿈에서 본 그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아 청양은 그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안월.”
고금 소리가 갑자기 뚝 멈추더니, 안월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편안하게 웃었다.
“깼어요?”
묵용청양은 팔로 받치고 일어나 앉았지만, 머리가 아직 좀 어지러웠다. 그녀는 침상 머리맡에 기댄 채 사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제가 왜 여기에 있죠?”
“기절했었어요.”
안월이 말을 이었다.
“제가 청양 소저를 업고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안월이 저를 업었다고요?”
묵용청양은 정말 뜻밖이었다. 안월이 그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녀를 업을 수 있었단 말인가?
“맞아요.”
안월은 물을 한 잔 따라서 건네주었다.
“우선 물부터 마셔요. 먹을 걸 가져다줄게요.”
“아뇨,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청양은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했다.
“전 일이 있어서 가야겠어요.”
그녀는 가소타가 걱정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위험에서 잘 벗어났을까?
안월은 탁자 옆에 서서 묵용청양이 서둘러 신발을 신고 빠르게 입구까지 걸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묵용청양은 문을 밀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어라?”
묵용청양이 다시 한 번 힘껏 밀었지만 문짝은 삐걱거리기는 해도 열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안월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안월이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서둘러 돌아가려 하시는지요?”
묵용청양이 어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핑곗거리를 하나 꾸며 냈다.
“제가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안월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저 어머니는 지금 강남에 계시잖아요? 그분은 소저가 처소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조차 모르실 거예요.”
묵용청양은 대경실색했다.
“제가 누군지 압니까? 영안이 알려 줬어요?”
안월은 말없이 웃으며 방금 뭔가를 먹은 것처럼 손수건으로 입가를 톡톡 닦았다. 그 동작은 마치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는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녀는 분명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묵용청양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묵용청양은 순간 허리춤을 더듬었고, 곧 자신의 무기들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묵용청양은 속으로 크게 놀라며 안월에게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누구죠?”
“청양 소저, 벌써 잊으셨어요?”
안월은 요염하게 웃었다.
“전 청이각에서 기예를 파는 기녀잖아요.”
“아니에요. 당신은 단순한 기녀가 아니잖아요.”
묵용청양이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중요한 건 소저가 지금 내 손아귀 안에 있다는 거예요.”
“당신이 이미 제 신분을 알고 있다면 얼른 저를 풀어 주는 게 좋을 거예요.”
묵용청양은 목소리를 높여서 엄포를 놓았다.
“황형께서 진노하시면 당신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니.”
“안심하세요. 조정과 대적할 생각은 당연히 없어요.”
안월은 그녀의 위협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전 그저 당신을 이용해서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으려는 거예요. 그것만 손에 들어오면 당신은 돌려보낼 거예요.”
“무엇과 맞바꾸겠다는 거죠?”
안월은 또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닫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들어와 묵용청양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강호식 식사로, 뜨거운 반찬 두 개와 장우육 한 접시, 큰 찐빵 두 개 그리고 술 한 주전자였다.
묵용청양도 사양치 않고 앉아서 식사에 몰두했다.
안월이 말했다.
“혹시 음식에 독이라도 넣지 않았을까 걱정되지 않나요?”
“저랑 맞바꾸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요? 저를 독살하면 무엇으로 맞바꾸려고요?”
안월의 미소가 더욱더 깊어졌다.
“똑똑하네요.”
묵용청양은 그녀를 노려봤다.
“저를 인질로 잡은 게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는지 곧 알게 될 거예요.”
웃음을 터뜨린 안월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방에서 나갔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묵용청양은 정신을 차리고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힘껏 창문을 밀었는데, 너무 세게 미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녀도 함께 밀려 나갈 뻔했다.
바깥의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자 그녀는 식은땀이 났다. 창밖은 뜻밖에도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잠시 비틀거린 그녀는 곧바로 창틀을 꽉 잡고 똑바로 섰다.
정말 이상했다. 누가 이런 낭떠러지에 집을 세웠을까? 잘못해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마음을 다잡은 묵용청양은 조심스레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위쪽에 처마가 없는 것으로 보아 산 중턱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흥미가 생겼고 그러자 두려움도 없어졌다. 그녀는 창문에 턱을 괴고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안월과 청이각에 대해 생각했다.
이쯤 되니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장씨 가문의 아이가 청이각에서 발견된 이상, 청이각은 황금 절도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괴한들 또한 모두 청이각 지붕에서 내려왔다. 즉 청이각이 바로 그들의 소굴이고, 안월이 그 도둑놈이었다!
자신을 여기로 잡아온 건 청이각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는 건 가소타와 그 아이가 무사히 도망쳤다는 걸 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묵용청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청이각 사람들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알면 영안은 반드시 그녀를 구하러 올 것이다.
‘흥! 뭐가 환경문의 부문주야! 날마다 도둑놈의 소굴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여자 도둑을 좋아하다니!’
그녀는 이곳에서 나가면 어떻게 그렇게 보는 눈이 없느냐고 영안에게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사건의 전후 사정을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 산봉우리 너머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산간에는 어슴푸레한 황혼이 감돌며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잠도 오래 자고 밥도 배불리 먹은 그녀는 원기가 왕성해져 뭐라도 좀 하고 싶었다.
그녀는 우선 방을 한 바퀴 돌았다. 그 후 일단 침상 위에 늘어진 장막을 뜯어 바닥에 던지고 탁자를 발로 걷어차 부수곤 땔감으로 만들어 쌓아 놓았다.
그다음, 벽 쪽에 놓인 화분에서 찾아낸 돌멩이 두 개를 계속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이건 그녀가 예전에 서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돌멩이 두 개를 부딪치면 불꽃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때 시험 삼아 해 봤는데 정말 불꽃이 튀는 걸 확인했었다. 다만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지금은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천천히 하면 되지 뭐.’
한 시진 뒤, 그 돌멩이들은 거의 다 닳아서 없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성을 들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말처럼, 마침내 불똥이 튀어 장막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재빨리 불이 붙은 장막 쪼가리를 땔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칠흑 같은 밤에는 자그마한 불씨도 선명하게 보이는 법인데, 안월 일당은 가뜩이나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불길이 치솟자마자 금방 발각되었다.
어떤 이가 욕설을 퍼부었다.
“무슨 놈의 장공주가 저래! 자기를 태워 죽이겠다는 거야?”
안월이 소리쳤다.
“그만 투덜거리고! 빨리 사람이나 구해!”
안월은 앞장서서 산간 평지로 뛰어들어서 통로를 따라 달려 내려갔다.
묵용청양은 팔짱을 끼고 문가에 서서 여유롭게 불길이 피어오르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귓가에 인기척이 들려오자 그녀는 급히 물러섰다.
그 순간 어떤 사람이 문을 박찼고, 곧 안월이 뛰어 들어왔다. 안월은 묵용청양이 아무 일도 없다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치켜들었다.
묵용청양은 탁자 다리 한 개를 무기로 쓰려고 남겨 뒀었다. 안월이 공격할 자세를 취하자 그녀는 그것을 움켜잡고 안월에게 맞섰다.
하지만 안월의 보법步法이 매우 기이했다. 안월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앞까지 왔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묵용청양은 순식간에 온몸이 저려 왔고 손발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어, 지금 뭘 한 거예요!”
묵용청양은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비겁하게 수작 부리지 말고 통쾌하게 한판 겨뤄요!”
안월이 말했다.
“제가 뭐 하러 당신과 겨루겠어요? 그러다가 당신이 다치기라도 하면 원하는 것과 맞바꿀 수 없잖아요.”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 다행히 불길은 거세지 않아서 곧 잡혔고, 연기만 매캐하게 날 뿐이었다.
안월은 묵용청양을 어깨에 둘러메고 통로를 따라 굽이굽이 올라갔다.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장공주 전하에게 단단히 겁을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통로를 지나가는 동안 묵용청양이 머리나 다리를 부딪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화가 잔뜩 난 묵용청양이 고함을 질렀다.
“이렇게 부딪쳐서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없을 거예요!”
통로를 지나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곧바로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늙은 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잎사귀가 거의 떨어져서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 보였다. 나무 밑으로 휘영청 밝은 달빛이 가득했다. 멀지 않은 곳에는 낮은 가옥들이 하나둘씩 이어진 게 들쭉날쭉한 것 같으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묵용청양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이야말로 진짜 도둑놈들의 소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월은 그녀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마구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물어봤다.
“뭘 가지고 불을 피운 거죠?”
묵용청양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날 풀어 주면 알려 줄게요.”
아까 불을 피웠던 돌멩이 두 개는 진작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 버렸다. 절대로 찾지 못할 것이다.
안월은 그녀가 더는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몸에 두어 번 점혈해서 혈도를 풀었다.
묵용청양은 온몸이 즉시 가뿐해졌다. 팔을 가볍게 흔들고 발을 털면서 그녀는 뒤돌아 사방의 지형을 살펴봤다.
“이제 말해 봐요. 무엇으로 불을 붙인 거죠?”
묵용청양은 정색을 하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제가 예전에 강남에서 어떤 강호 술사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구결 하나를 가르쳐 줬는데, 그 구결은 읊기만 하면 불을 일으킬 수 있죠.”
안월은 믿지 않았다.
“그런 구결이 있다고요?”
“물론이죠!”
묵용청양은 뒷짐을 쥐고 마치 태연자약한 고수처럼 산봉우리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하늘 아래에서는 별의별 일들이 다 있어요. 단지 당신이 본 적 없을 뿐이죠. 당신이 또 저곳에 가둬도 난 다시 불을 피울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