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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170)화 (1,170/1,192)

제1170화

묵용린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어서 말하거라. 그들과 어찌 연락이 닿는단 말이냐?”

허장우는 비화루와의 연락 방법을 솔직하게 알려 주었고, 묵용린은 영구에게 곧장 그대로 따라 할 것을 지시했다. 이제 남은 건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묵용린은 봉명궁으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고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허장우에게 살기를 내뿜고 나니 남은 건 피로와 고통뿐이었다.

사봉봉은 그런 그의 모습에 가슴이 자꾸만 욱신거렸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은 그녀는 조용히 위로했다.

뭐라도 할 수 있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 묵용린은 자꾸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봉봉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짐은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람이오. 누이도 지키지 못하다니.”

사봉봉은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황상, 자책하지 마시어요. 그저 사고였습니다. 황상, 신첩을 믿으십시오. 장공주 전하에겐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묵용린이 고개를 저었다.

“짐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구려. 만약 청양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다면… 태후와 태상황에게 어찌 말해야 한단 말이오? 모두 짐 탓이오. 이렇게까지 사건을 끌지 말았어야 했는데……. 판결을 미룬 탓에 결국 이 사달이 났소.”

지금은 묵용린에게 무슨 말을 해 줘도 소용없을 것이다. 묵용청양이 평소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야 비로소 죄책감을 털고 일어날 수 있을 터.

사봉봉은 위로의 말을 전하는 대신, 허리를 숙이고 그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두 사람은 부부이기에, 무슨 일이 생기든 그녀는 항상 그의 곁을 지킬 것이다.

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월규는 가슴이 시큰거리면서도 큰 위안을 얻었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황제와 황후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두 사람의 금실이 마침내 빛을 보았는데, 하필이면 이런 상황이라니. 그녀는 조용히 몸을 돌려 눈물을 닦고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동쪽에서는 이미 어슴푸레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묵용성은 황형의 약속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시시덕댔다. 날이 밝기만 하면 황형에게 일을 빨리 진행시켜 달라고 재촉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는 대전 문가에 기대서서 동녘의 희뿌연 빛을 바라보며 조급해했다.

바깥의 궁 등이 다 꺼지자마자 그는 곧장 승덕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승덕전에 도착하니, 황제는 봉명궁에 있다고 했다. 그는 조금 뜻밖이었다. 그 말인즉슨, 어젯밤 황형이 봉명궁에서 묵었단 말인가?

그는 비록 사봉봉을 포기했지만 그 소식에 조금 얼떨떨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천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월규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시뻘게진 걸 보니 한바탕 울음을 터뜨린 것 같았다.

그가 황급히 월규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고고, 왜 그래요? 누가 고고를 화나게 한 거예요?”

월규는 차마 대꾸도 하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묵용성을 보니 청양이 더 생각난 탓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남매건만, 한 사람은 멀쩡히 그녀 앞에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생사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니…….

만약 묵용성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묵용청양이라 답할 것이다.

남매는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묵용청양은 어려서부터 그의 머리 꼭대기에서 위세를 부렸고 늘 그를 괴롭혔다. 어릴 때 묵용청양은 표범이 있는 정원에 그를 방치하여 거의 까무러칠 듯 놀라게 했었고, 조금 큰 뒤에는 괴팍한 성질이 되어 품위 없는 짓만 골라 했다.

그가 좋은 물건을 얻게 되면 빼앗는 것은 물론 그의 사람까지 빼앗아 갔다. 그녀에게 맞은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 셀 수조차 없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일일이 말해 봤자 제 입만 아프니 그는 그때 일은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묵용청양이 강남으로 간 뒤에야 그는 겨우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청양이 강남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또다시 몇 차례나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다. 오죽하면 한 백 년쯤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가슴이 어찌 이리 괴롭단 말인가? 마치 온몸이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두렵고 당혹스러웠다.

지금은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봉명궁으로 향했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니 눈앞은 흐려졌고 얼굴에 닿는 바람도 서늘했다. 얼굴을 문질러 본 뒤에야 그는 자신이 온통 눈물범벅이란 걸 알아차렸다.

묵용린은 사봉봉과 조용히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방 안은 슬픈 기색으로 가득했기에 노비들은 감히 두 사람을 방해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오더니 황제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울부짖었다.

“황형, 제발… 어떻게든 황저를 꼭 구해 주십시오…….”

넋을 놓고 있던 묵용린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순간 화가 나 그를 때리려 했지만, 비통한 그의 표정에 묵용린은 치켜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려 아우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조급해하지 말거라. 황형이 이미 방법을 강구하여 영 대인을 보냈다.”

묵용성은 서럽게 울부짖다가 뒤늦게 옆에 있는 사봉봉을 발견했다. 제대로 된 방향으로 엎드렸으니 다행이지, 만약 정신이 팔려 사봉봉 앞에 엎드렸다면 그는 입을 열기도 전에 황제에게 걷어차였을 것이었다.

사봉봉이 있으니 묵용성은 조금 부끄러웠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 의자에 앉았다.

사봉봉은 금천아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한 뒤, 직접 그에게 건넸다.

“전하, 그리 조급하게 구시면 아니 될 일입니다. 황상께서 이미 적절히 처리하고 계시니 같이 소식을 기다리시지요.”

차를 건네받은 묵용성은 사봉봉에게 감사를 표하곤, 묵용린을 바라보며 슬픈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가슴이 너무 괴로워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 * *

장명기는 황금 도난 사건의 결정적 인물이었기에 영안은 줄곧 암암리에 그를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장명기의 부모가 은신해 있는 곳을 알아냈다.

영안은 장명기가 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만약 임안을 떠날 예정이라면 분명 부모에게 인사를 하러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곧 중추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혹여 장명기가 쉽게 움직이지 못할까 봐 황제는 특별히 중추 연휴 사흘간 통행 금지를 해제하여 그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었다. 어쨌든 이미 군대를 매복해 두었으니 장명기만 나타나면 곧장 제압할 수 있었다.

이 일은 계속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영안과 소제갈 등 몇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다. 영안은 심지어 여전히 아무 실마리도 찾지 못한 척, 날마다 청이각에 틀어박혀 있기까지 했다. 적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묵용청양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엄청난 격전이 예상되는 일이었기에, 그녀가 위험해질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장명기를 붙잡으니 묵용청양이 비화루에 납치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영안은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갑작스러운 통증에 순간 멍해졌다.

비화루와의 거래는 영구가 책임지고 도맡았다. 그것과 관련된 일 처리도 전부 영가군이 맡았다.

영안은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가군의 표식을 발견하고 수하들에게 장명기의 압송을 맡겼다. 그는 우선 아버지를 찾아가서 상황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이미 눈부시게 밝은 낮이었다. 저녁의 화려함에 비해 낮은 적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밤이 늦도록 명절을 즐긴 사람들은 대부분 늦은 시간까지 잠을 청했고, 거리의 가게들도 문이 닫혀 있었다. 노점상도 보이지 않아 거리는 유난히도 고요했다. 영안이 탄 말의 발굽 소리만이 거리의 적막을 깨며 허공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영구는 다루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약간 열린 창의 좁은 틈으로 텅 빈 거리가 보였다. 그는 찻잔을 든 채 이따금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냉철한 그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비쳤다.

계단을 오르는 다급한 발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고 계단을 바라보았다. 영안이었다.

부자는 똑같이 무표정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영안은 빠르게 말을 몰고 온 탓에 목이 말랐다.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른 그는 한 모금에 몽땅 들이켠 뒤 영구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찌 되었습니까. 그쪽에선 반응이 있습니까?”

영구가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금군들이 성문을 지켰으니 파리 한 마리도 나가지 못했을 거다. 비화루 사람도 분명 성안에 있겠지.

아침 일찍 허장우가 말해 준 방법대로 비화루에 소식을 남겼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반응을 보여야 할 터인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설마 거물 손님의 목숨마저 저버리려는 것인지…….”

영안이 말했다.

“허장우가 거짓을 고한 건 아닐런지요?”

“그럴 리 없다. 황상께서 모든 걸 공개하셨으니 허장우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그나마 겨우 목숨을 건질 기회가 생겼는데, 그자가 무엇 하러 마다하겠느냐?”

영안은 찻잔을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더니 별안간 탁 내리치며 말했다.

“혹 허장우가 죽든 말든 비화루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요?”

영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문제다. 지금 우리 손엔 그자들과 흥정할 것이 없으니, 청양이…….”

영안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장명기를 심문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영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 *

장명기는 옥에 들어가더니 입을 꾹 닫고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영안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판등과 산응은 저마다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장명기의 입을 열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입에 걸쇠를 단 듯 한 마디도 뱉지 않았다.

영안은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내보낸 뒤 장명기에게 다가가 곧장 그를 때렸다.

입구까지 걸어 나온 판등과 산응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영안에게 돌아갔다.

화가 난 사자처럼 장명기를 마구 때리는 영안의 모습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판등이 서둘러 영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 형, 그만하세요. 이러다 죽겠어요.”

영안이 성을 내며 소리쳤다.

“저자를 죽일 것이다! 저자를 죽인 뒤엔 저자의 아들을 죽일 거고. 장씨 가문의 못다 한 멸문을 내가 처리해 주마!”

장명기는 모퉁이에 기대어 고통스러운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영안이 자신의 아들을 언급하자, 그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가 힘없이 물었다.

“내… 아들을 잡아 왔소?”

그 아이만 생각하면 영안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그는 또다시 장명기를 걷어차려다 산응에게 다리를 붙잡혔다.

“네 아들이 아니었다면 장공주 전하가 잡혀갔겠느냐?”

장명기가 말했다.

“우리 아들을 볼 수 있다면… 아들만 볼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다 털어놓겠소.”

영안이 판등을 뿌리치며 호통쳤다.

“저자를 포박하거라. 가부로 데려갈 것이다!”

소제갈이 영안을 타일렀다.

“안 형, 그건 규율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영안이 채찍을 내던지며 말했다.

“장공주 전하를 구하지 못하면 규율이고 뭐고 소용없다. 당장 저자를 포박하여 날 따라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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